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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값 등록금’ 실현을 요구하는 주된 목소리는 보편성에 대한 요구였다. 지난 6월 10일 2만여 명이 모인 서울 청계광장에서 가장 빈번하게 들린 구호는 “조건 없는 반값 등록금 실현하라”였다. ‘조건 없는’이란 관형어에는 “누구나 ‘미친 등록금’에 대한 부담 없이 대학에 다닐 수 있도록 허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그래서 그보다 나흘 전 손학규 민주당 대표는 광장에서 “우선 소득 하위 50%까지 반값 등록금을 실현하자”고 발언했다가, 대학생들의 야유를 듣고 하루 만에 “전계층 실시”로 방향을 바꿔야 했다. 보편성에 대한 요구와 그 요구의 즉자적 수용은 그 한계가 분명함에도, 다수 언론에 의해 ‘좌 클릭’이라는 수사로 포장됐다.

 

‘보편적 접근성’ 요구는 일단 정당

 

연간 비용 1천만 원을 넘나드는 등록금, 그리고 그 등록금을 부담해야 받을 수 있는 대학 교육에 대한 보편적 접근성을 보장하라는 요구는 그 자체로 의미가 분명하다. 자녀 1명을 대학에 보내려면 열 집 가운데 아홉 집이 한 해 소득의 10% 이상을 등록금으로 부담해야 하는 사회[각주:1]에서 등록금 액수 문제는, 그 문제에 대한 일반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작동 기제가 된다. 그 일반적 공감대의 기저에는 ‘나는 대학 교육을 주체적 요구에 의해 스스로 선택한 게 아니라, 사회의 요구에 강요당했다’는 ‘사실관계’가 배경으로 깔려 있다. 대학 졸업장이란 ‘신분증’을 획득하지 못하면 사람대접조차 받지 못하는 사회, 그래서 지난해 기준으로 전체 고교 졸업생의 79%, 전문계고 졸업생의 71.1%를 대학에 진학하도록 강제한 사회가 등록금 부담마저 오롯이 ‘수익자 부담’으로 떠넘긴다는 사실에 대한 분노가 그 목소리에 담겨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보편적 접근성에 대한 요구는 1차적 정당성을 획득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날의 광장에는 단순히 ‘등록금을 깎아달라’는 목소리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사립대를 국유화하라”, “국공립대 법인화 철폐하라”는 목소리도 함께 나왔다. ‘반값 등록금’ 촛불과 같은 시간에 총장실을 점거하고 ‘총장실 프리덤’을 외친 서울대 학생들의 ‘법인화 반대’ 투쟁은 그 지리적 거리만큼이나 개별적으로 인식됐지만, 사실 분리된 사안이 아니었다. 국공립대 전일제 등록 학생이 22%에 불과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낮고, 사립대 비율이 비정상적으로 높아[각주:2] ‘숭고한 교육 사업가들의 나라’라 불릴 정도인 한국 사회에서, 국공립대 법인화는 대학을 민영화해 대학 교육을 온전한 시장의 상품으로 포장하겠다는 국가적 의지의 발현이다. 그 의지는 1995년 학생과 학부모를 ‘교육 소비자’로 호명하고, 학교라는 교육 상품을 선택하게 만들겠다는 ‘5·31 교육개혁’ 이후 16년 동안(지난 10년 동안의 민주정부도 당연히 이 범주에 포함된다) 한국 사회를 지배해왔다. 국제적 대학 평가 순위로 재현되는 대학의 ‘글로벌 경쟁력 강화’ 구호는 대학 교육이라는 ‘상품’을 전세계 시장에 공급해 장사를 해보겠다는 국가와 시장의 또 다른 의지다. 대학들이 앞다퉈 외국인 학생을 유치하겠다며 벌이는 경쟁, 그리고 지하철과 라디오 방송을 뒤덮은 대학들의 ‘세계 대학 평가 100위권 진입 목표’ 등의 광고는 그런 의지의 현시다.  

▲ <농부와 아내>, 1902-케테 콜비츠

 

 

그런 점에서 김예슬의 ‘대학은 죽었다’는 선언적 규정은 여전히, 그리고 당당하게 유효하다. 대학 교육이라는 ‘서비스 상품’을 소비해, 그것을 바탕으로 마치 ‘명품 가방’을 어깨에 멘 듯 노동시장에서 비교우위의 신분 지위를 획득하겠다는 욕망이 지배하는 대학에서 이미 ‘대학’(大學)도 죽었고, 교육도 죽었다. 그런 점에서 ‘반값 등록금’으로 고지서상 명목 등록금 액수를 절반으로 줄여달라는 요구는, 거칠게 드러난 현상에만 집중했을 때, 그런 서비스 상품을 좀더 부담 없이 소비하게 해달라는 요구와 다를 바 없다. 소비자의 처지에서 ‘50% 할인’을 외치는 목소리로만 비친 ‘반값 등록금’이 보수언론과 이명박 정부에 의해 부실 대학을 구조조정하겠다는 조처로 변질하고, 진보 진영 역시 별다른 저항 없이 ‘국가 재정 투자로 등록금을 낮추기 위해 대학 구조조정은 필요 불가결’하다는 인식에 매몰된 것은, 그 누구도 “부실 대학 구조조정으로 소비자인 학생과 학부모의 선택권 피해를 방지한다”는 논리에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구조조정은 ‘부실 대학’으로 분류되는 서열 하위권 대학 학생들의 피해를 분명히 전제하고 있지만, 그들의 선택권은 선택권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부실(사립) 대학 구조조정’ 논리가 ‘국공립대 정원 감축과 통폐합’으로까지 확대재생산[각주:3]된 건 그래서 어찌 보면 자연스런 과정이었다.

 

대학은 상상의 공간이고, 인문의 공간이다. 하지만 대학이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대학은 태생적으로 국가와 종교 권력의 도구로 기능했다. 고부응 중앙대 교수(영문학)는 설명한다. “성직자 양성이 주목적이던 중세의 대학에서는 운영비를 주로 교회가 부담했다. 왕권국가가 성립한 16세기 이후 대학은 공직자 양성이 주목적이었기에 왕실에서 운영비를 부담했다. 19세기 이후 나타난 현대의 대학은 학문의 발전이 곧 국가의 발전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했기에 정부가 운영비를 부담한다.”[각주:4] 하지만 프랑스에서 68혁명이 일어나면서, 층층이 서열화한 대학 교육의 모순과 그에 따른 인간 소외에 대해 문화적 공유가 이뤄진 뒤, 대학은 인간이 대학(大學)을 통해 주체성을 자각하는 공간으로 서서히 재인식됐다.

 

소비자 복지 논리로서의 한계

 

하지만 한국의 대학은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중·고등학교처럼 취업을 준비하는 ‘사관학교’가 된 지 오래다. ‘스펙 관리’의 핵심인 학점은 내신성적이 됐고, 기업 공모전은 경시대회가 됐으며, 외국어 점수와 자격증은 필수 성적표가 됐다. 기업은 대학을 노동력 공급처로만 보고 있고,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원하는 이들 가운데 정규직 취업자는 55%[각주:5]만 뽑으면서 드러내놓고 무한 ‘스펙 경쟁’을 조장한다. 그래서 취업이 되지 않아 ‘졸업 유예’ 등으로 장기 학적을 보유하는 학생이 100만 명[각주:6]이 넘고, 이들은 어떻게든 ‘정규직’ 자리를 얻기 위해 재수와 삼수를 거듭한다. 그들 중 다수는 몇 년 뒤 고등학생이 전문대를 선택하는 심정으로 비정규 일자리를 찾고, 곧 그 격차에 절망한다.

 

종종 ‘한국의 68혁명’으로 일컫는 1987년 민주화운동은 이 지점에서 치명적인 한계를 보였다. 대학생이라는 ‘엘리트’ 계급이 주도해 시민 대중에게 확대됐던 민주화운동 어디에도, 그 ‘엘리트’ 계급을 해체하고 대학을 시민 대중에게 되돌려주며 공공화하자는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1987년 체제는 국립 서울대를 정점으로 오롯한 대학 서열 어느 한 곳도 건드리지 않았고, ‘봉건왕국’으로 존재하는 비리 사학을 발본적으로 해체하는 데도 종국에는 실패했다.

 

보편적 무상급식과 보편적 ‘반값 등록금’의 간극은 여기에서 발생한다. 의무교육 과정인 초등학교와 중학교 학생들에게 급식은 복지가 아니라 교육이다. 학생들은 같은 재료로 만든 음식을 함께 먹으면서, 그 음식을 받아들이는 나의 욕구와 타자의 욕구, 재료를 생산하는 타자와 그것을 음식으로 가공하는 타자의 사회적 존재를 주체적으로 인식하며 ‘서로 주체성’을 자각한다.[각주:7] 그러나 적어도 현재까지 지배적으로 통용된 ‘반값 등록금’ 담론은 보편적 교육에 대한 목소리라기보다는 보편적 복지를 통한 보편적 소비 요구로 작동했다. 그 담론에 교육은 부재한다. 소비재 상품이 된 대학의 공공화를 통해 대학 교육의 본질을 회복하자는 목소리가 포함되지 않은 ‘액수 반값’의 보편성은, 그래서 교육이 배제된 채 복지에만 매몰된 요구로 호명될 가능성을 충분히 내포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대학 교육에 대한 요구는 노동시장의 ‘정상성’ 회복에 대한 근원적 문제제기와 함께 표출돼야 한다. 학력과 학벌이 임금과 노동시간 등 노동조건에서 상대적 우위를 보장해주는 사회에서, ‘학력 과잉’ 사회에 대한 비판은 대학을 산업구조 안에 편입해 인식하려는 이데올로기를 포장하기 위한 정치적 수사다. ‘학력 과잉’은 학력을 산업구조의 도구로만 보고, 고학력자를 산업 수요에 걸맞게 재편하려는 시장의 욕망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문제가 되어야 할 건 ‘학력 과잉’을 낳는 ‘구조의 과잉’이고, 그 구조가 배출한 ‘욕망의 과잉’이다.

 

패권과 서열, 배제 재생산하는 대학

대졸 이상의 학력을 지닌 자는 고졸 학력자보다 10% 이상 짧게 일하면서도 최대 2.2배의 임금을 받아간다. 20대 초반 대학 입학 여부로 결정되는 취업 초기의 학력별 임금 격차는 중장년이 되면서 더 벌어져 삶 전체의 기반을 결정하고 만다.[각주:8] 여기에 ‘학벌 프리미엄’까지 더해진다. 2008년을 기준으로 최상위 13개 대학 출신 취업자들은 14~50위 대학 졸업자보다 14.2%, 51위 이하 대학 졸업자보다 23.2%, 전문대 졸업자보다 42%나 임금을 더 받고 있다. 1999년 최상위 13개 대학과 14~50위 대학 졸업자의 임금 격차가 1%에 불과했던 데 견주면, 9년 사이에 ‘학벌 프리미엄’이 주는 노동조건의 상대적 우위는 훨씬 커졌다.[각주:9]


이런 현실에서 대학 교육에 대한 ‘보편적 소비’를 요구하는 건 자연스레 80% 계층의 ‘학력 프리미엄’과 극소수 계층의 ‘학벌 프리미엄’을 소비하도록 하고, 나아가 그 프리미엄을 더욱 공고히 하는 도구로 환원하는 일이다. 사립대보다 지방의 국공립대 중심으로 등록금을 무상으로 낮추면서 국공립대 비율을 확대하고, 대학 서열을 점진적으로 해체하면서 대학의 공공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견해가 대중의 요구와 궁극적으로 접합해야 하는 건 그 때문이다.
 

‘공동체 이해’ 실현하는 개혁으로 가야
 

적어도 한국 사회에서 교육은 노동과 분리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교육이 학력과 학벌에 의한 ‘신분사회’를 구성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인식하면서도, 학력과 학벌이 궁극적으로 노동조건의 우위를 지향한다는 사실은 어느덧 은폐됐다. 기를 쓰고 자녀를 좋은 대학에 보내려는 건, 자녀가 대학 졸업장이란 ‘신분증’을 바탕으로 좋은 노동조건에서 일하게 하려는 것 아닌가. 하지만 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노동은 소외되고, 교육은 모조리 ‘나의 문제’, 노동은 모조리 ‘너의 문제’로 취급된다. 교육이든 노동이든 ‘공동체의 이해관계’보다 ‘내 자식의 이해관계’에 매몰돼 있는 건 똑같지만, 교육은 ‘신분’을 얻기 위한 각개전투의 도구로 보는 반면 노동은 교육을 도구로 ‘신분’을 확보한 뒤에 남는 결과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이런 인식을 해체하려면 교육에서는 ‘공동체의 이해관계’를 넘어 주체적 인간화를 위한 본질적 기능의 회복, 노동에서는 ‘공동체의 이해관계’라는 기본적 연대의식의 공유라는 지점까지 인식이 진화해야 하지 않을까. ‘나의 문제’와 ‘너의 문제’는 그래서 개별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반값 등록금’의 청계광장과 ‘김진숙’의 부산 영도 역시 그래서 멀지 않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7월호에 실렸음.

 

  1. <한겨레> 2011년 6월 2일자 12면. [본문으로]
  2. OECD 2010 교육지표. [본문으로]
  3. <한겨레> 2011년 7월 6일자 12면. [본문으로]
  4. <한겨레> 2011년 4월 7일자 31면. [본문으로]
  5. 교육과학기술부 대학정보공시 2010년 6월. [본문으로]
  6. 한국노동연구원 2011년 4월 보고서 ‘학력별 노동시장 미스매치 분석과 교육제도 개선 과제’. [본문으로]
  7.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1년 1월호 ‘무상급식을 뛰어넘는 정치적 상상’ 재인용. [본문으로]
  8. <한겨레> 2011년 7월 5일자 6면. [본문으로]
  9. 한국노동경제학회 논문집 <노동경제논집> 2011년 4월호 ‘1999~2008 한국의 대졸자 간 임금격차 변화’.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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