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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지 기온이 영하 9도였던 13일 새벽, 쌍용차 해고 노동자 2명이 평택공장 굴뚝에 올랐다. 2009년 대규모 정리해고 뒤 5년을 싸웠다. 26명의 동료와 가족이 세상을 떠났다. 사법부와 행정부, 국회는 그들을 돌아보지 않는다. 벼랑 끝에 몰려 밟고선 곳이 칼바람에 ‘증기선처럼’ 흔들리는 폭 1m 도넛형 굴뚝 위다. 하지만 그들은 “함께 살자”며 여전히 희망을 말한다. 그들의 희망은 “공장 안 동료들”과 굴뚝 위를 바라봐줄 사람들의 반응이고 연대다.

지배적인 반응은 희망을 말하지 않았다. 어떤 이는 “독한 사람들”이라고 했다. “우리의 강함을 증명하기 위해 70미터 굴뚝에 오르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약하고 나약한 존재이고 무서움 또한 많고 여린 인간인지를 알리기 위해 올랐습니다”라는 해고자 이창근의 말은 저 말 한 마디로 무력해졌다. 나아가 “안타까운 일이다만 대법원 판결까지 난 상황에서 뭘 어쩌자는 건지. 차라리 저 열정으로 다른 일을 찾아본다면 쌍용차 재입사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라는 반응은 쌍용차 해고자를 대하는 한국 사회의 어떤 전형이다. 한국 사회에서 드라마 ‘미생’의 장그래같은 고졸 비정규직 노동자나 최저임금도 받지 못하는 간접고용 경비 노동자와 쌍용차 해고자는 전혀 다른 존재다. 전자는 응원과 위무의 대상이지만, 후자는 공격과 냉소의 대상이다.

나보다 ‘불쌍한’ 사람들에게 보내는 응원과 위무는 편리하다. 중간계급의 처지에선 어차피 그 정도의 응원과 위무로 얻는 그들의 이익이 나의 이익과 당장 상충하는 일이 없다. 하층계급의 처지에선 중간계급에 진입하기 위한 경쟁에 그들은 별다른 위협이 되지 못한다. 정규직으로 돌아가려는 대공장 노동자들에게 보내는 공격과 냉소 역시 개별적 이해관계에 종속된 결과다. 중간계급에게 그들은 법이 보장하는 것 이상을 요구하며 내가 겨우 자리잡은 체제를 뒤흔들어 그나마의 내 이익을 해치려는 사람들이기에 공격의 대상이다. 하층계급에게 저들은 대공장에 다니던 시절 자신들에게 아무런 관심을 주지 않던 정규직일 뿐이기에 냉소의 대상이 된다.

이런 반응은 두 가지를 말한다. 끊임없이 분노해도 내가 원하는 세상으로 가는 길이 쉽게 보이지 않을 때, 사람들은 선제적 냉소로 분노 이후에 올 상실감에 대해 미리 방어막을 친다. 사람들은 이제까지의 정치가 자신들의 존재 양식을 변화시켜주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새로운 정치를 상상하기보다 ‘이제는 냉소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냉소는 개별적 이해관계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시대가 낳은 무력감의 결과다. 무력감의 시대에 사람들은 체제가 무의미하거나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체제를 굳이 비판하거나 뒤집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게 냉소는 분노를 상쇄하고 희망을 거세한다.

분노마저 중간계급의 전유감정이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도 드러난다. 한국 사회에서 분노는 어느덧, 경제적으로나 사회문화적으로 어느 정도 자산을 가진 이들이 체제 안에서 안전하고 합법적인 방법으로 지배 계급을 비판하고 ‘나름 합리적인 사람’으로 인증받는 장치로 기능하고 있다. 그러니 분노는 대체로 사건과 연계된 특정 인물에 대해 감정을 배설하는 정도에 머물 뿐 구조의 문제까지 나아가지 않는다. 벽을 무너뜨리지 않는 합리적인 사람들의 이런 ‘착한 분노’는 분노 뒤에 오는 무변화를 낳는다. 무변화는 체제가 존속하는 한 늘 그 자리일 하층계급 주변 사람들의 냉소를 조장한다. 착한 분노와 조장된 냉소는 그렇게 공존하며 분노를 중간계급만의 것으로 고립시킨다.

분노와 주로 조응하는 행위는 냉소가 아니라 저항이다. 저항은 체제에 대한 전복적 행위라고만 알려져 있지만, 실은 당대의 합리, 당대의 제도, 당대의 도덕이 어떻게 가진 자의 지배를 정당화하는가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물음의 과정이다. 물음 끝에 합리와 제도와 도덕을 뒤흔드는 탈주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질문이 배제된 저항은 저항 이후 무엇을 건설할 것인가 사유할 수 없다. 그러니 지금 필요한 건 굴뚝 위의 저들이 우리에게 던지는 희망을 받아 안고 저들을 배제한 체제에 던지는 질문일 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하나의 연대 아닐까.

*<방송대학보>에 실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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