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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 표절 사건’은 ‘신경숙’이라는 유명 작가가 표절했다는 사실만큼이나 신경숙이라는 ‘유명 작가’를 옹호하기 위해 작동하는 출판계의 문학 권력이 파문을 일으켰다. 여러 비판자들이 이 사건에서 문학 권력의 구조적 개입이 끼친 악영향을 성토했다. 그런데 파문이 잠잠해지자 다른 목소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신경숙 표절 사건에 대한 여론이 “여론재판이라는 ‘광풍’의 성격을 띠었”으며 “신경숙은 혐의에 비해 과도한 징벌을 받았”다는 반론이 나왔다. “‘전설’의 표절 혐의 자체도 문학적 논의에 부쳐져야 할 일”이라고도 했다. 비판자들을 비판하는 글도 나왔다. 비판자들을 두고 “스스로 뭘 해보겠다는 강력한 신생(新生)의 의지를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 문제”라고 비판하는 글이었다.

 

메르스 파동이 한창일 때도 비슷한 반응이 있었다. 감염병에 대처하는 보건 의료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많은 이들이 공포에 떨었다. 그러면서 대형병원을 중심으로 영리를 보전해줄 수 있는 환경 조성에만 집중한 채 공공의료 체계 구축에는 소홀했던 구조적 문제에 대한 비판이 나왔다. 이 목소리는 그러나 “지금 당장 급한 일이 그런 게 아니다”라거나 “의사들이 현장에서 얼마나 애쓰고 있는데 구조 같은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느냐”는 비판을 받았다. 당장 닥친 현실의 위기를 해결할 생각은 하지 않고 위기를 이용해 평소 자기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하려는 욕구만 드러내고 있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이렇게 본다면 최근 한국 사회에서 호응을 얻는 유일한 비판은 ‘비판에 대한 비판’ 아닐까 싶다. 어떤 사회 현상에 대해 근원적인 관점을 담아 비평하거나 특권적 행태 혹은 비윤리성의 문제를 두고 그 문제를 낳은 구조를 비판하면, 그 비판이 “비생산적”이라거나 “동어반복이라 지겹다”는 비판이 곧바로 따라온다. 이런 반응은 빠르게 공유되며 비평과 비판을 무화하고 비평가와 비판자에 대한 냉소를 한층 강화한다.

 

신경숙은 여론의 비판을 받았을 뿐, 아무런 징벌도 받지 않았다. 문학에 표절에 따른 징계 제도같은 건 없다. 그러니 “문학적 논의에 부쳐져야 할 일”이라는 말도 그런 면에서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다. 신경숙에 대한 비판은 ‘여론 재판’이라기 보단 공적 토론의 일환이었다. “문학적 논의에 부쳐져야 할 일”이라는 말은 이런 공적 담론이 여는 민주 정치의 공간을 부정한다. 이런 주장에 의하면, 사회의 공적 영역에 존재하는 것들을 결정하는 주체는 전문가들에 국한된다. ‘전문가’들의 문화 권력이 신경숙이라는 작가를 어떻게 옹호해왔는지 살핀다면, 이런 주장이 얼마나 폐쇄적이고 독백적인지 알 수 있다.

 

비판의 비생산성을 염두에 두고 비판자들을 비판하는 지적들 역시 공적 담론이 여는 민주 정치의 공간을 부정하는 메커니즘을 똑같이 적용하고 있다. 이들은 비판이 여는 공론화의 장을 효율성이라는 잣대로 평가한다. 어떤 담론을 두고 끊임없이 논쟁하는 어떤 문화는, 이제 한국 사회에서 아무런 가치가 없는 일로 폄훼되고 있다. “구조같은 한가한 소리”는 그런 시선이 무용하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메르스 파동에서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지적에 냉소하는 목소리는 역시 그런 목소리가 눈 앞의 감염병을 해결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시선에서 기인했다.

 

효율성은 한국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된 지 오래다. 어떤 문제가 생기면 구조적 원인보다 개인의 책임에 대한 강조가 우선하게 된 사회 분위기도 그런 현상의 일단이다. 개인의 책임에 대한 추궁은 효율적 배제의 유혹에서 기인한다. 개인의 책임에 대해 강조하면, 문제적 개인이 사라짐으로써 문제 역시 함께 사라질 수 있다는 착각을 안긴다. 심지어 문제를 일으킨 개인을 재빨리 배제하면, 기존 질서의 부당 이득자라는 양심의 가책마저 도덕적으로 해소할 수 있다고 믿는다. 손쉬운 배제와 상대적 이익의 도덕적 결합이다.

 

하지만 개인과 구조는 분리될 수 없다. 개인은 구조에 종속되어 있고, 구조는 개인이 직조한다. 행위는 개인의 판단과 구조의 개입으로 구성된다. 하지만 개인의 책임에 대한 강조는 온전한 개인의 능력으로 이 행위를 제어하고 통제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전제에서 기인한다. 과연 그런가. 표절을 두고 신경숙이라는 개인의 비윤리성과 함께 표절 사실을 묵인해 온 문학 권력의 구조적 개입에도 책임을 물어야 하지 않을까. 의사나 관료들의 전문적이면서도 헌신적 능력에만 기대면 공공 의료 시스템을 구축하지 않고도 감염병을 원천 봉쇄할 수 있을까. 개인의 헌신이 부재한 구조도 문제를 푸는 열쇠가 되기에 불완전하지만, 개인의 완벽함에만 기대는 시스템 역시 불완전하긴 마찬가지다. 개인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경쟁력 있는 소수만 살아남는 사회에서 온전한 개인으로 홀로 설 수 있다는 건 특권 같은 일이다. 그럼에도 모든 개인이 개인의 능력에 따라 온전히 홀로 설 수 있다고 믿는 판타지를 끊임없이 거론하는 이들이 ‘온전한 개인’을 지원하는 구조적 특권에 대한 한 줌도 되지 않는 비판을 비생산적이고 비효율적이라며 냉소한다. 가끔은 그들이 우려하는 것처럼 특권에 대한 비판이 주류가 될 만큼 과잉이 된 세상이 와줬으면 싶기도 하다. 하지만 아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비판이 마주해야 하는 것은 ‘이런 시점에서 꼭 그렇게 삐딱하게 봐야겠느냐’는 순수하면서도 절박한 눈빛이다. 한국 사회의 냉소가 모순적이게도 뜨거운 냉소라고 명명될 수 있는 까닭이다. 이런 사회가 마주하는 것은, 개인과 개인이 불행을 경쟁하며 서로를 '충'이라고 낙인 찍는, 혐오 사회의 도래다.

 

*방송대학보 기고를 보충해서 파벨라에 게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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