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영화를 본 뒤 그 영화가 좋았다거나 싫었다는 평가를 잘 하지 않는 편이다. 철저히 나의 기준에만 따른다면, 영화는 재미있거나 재미없거나를 기준으로 보고 즐기는 대상으로만 존재하진 않는다. 내게 있어 영화는 생각할 거리를 던져줬거나 그렇지 않거나의 차이로도 기능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영화는, 그게 비록 플롯도 상실한 채 만들어지는 잉여 영화이거나 B급 문화를 ‘저질스럽게’ 담아낸 ‘나쁜’ 영화라 하더라도 내게 의미를 손짓한다. 그 영화를 만든 감독이 철학이 있든 없든, 그런 것도 사실 중요한 게 아니다. 영화는 감독이 만들지만, 그가 던진 텍스트는 나와 접합하는 순간 이미 나의 해석 지점으로 넘어와 나의 사유 안에서 부유한다. 그런 점에서 적어도 내겐 나와 접합했던 영화 가운데 텍스트가 유도된 객관적..
*스포일러 있음 우리는 상상력이 거세된 사회에서 살고 있다. 아니 통제된 사회라고 해야 더 적확하겠다. 직업을 가진 이들은 매일 명확하게 정해진 시간이 되면 출근해야 한다. 이메일과 포털에 실린 연예뉴스를 살피다 눈치를 보며 업무를 시작한다. 점심시간이 되면 일제히 밥을 먹으러 간다. 유일하게 정해지지 않은 건 퇴근 시간밖에 없다. 일상에서 나를 해방시킬 퇴근 시간은, 이번에는 불명확성으로 내 삶을 옥죈다. 시간의 속박에 길들여진 삶은, 일상을 언제 마무리해야할 지 모르는 상황에 이르면 아노미의 불안에 빠지고, 그로 인해 지친 몸과 마음은 어두운 그 어느 시간이 되면 자신의 위치를 인지하지 못한 채 까무룩 마무리되고 만다. 그나마 정해진 일상의 시간이 있는 사람은 나은 편이다. 일상에 구속조차 될 수 없..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정리해고에 반대하며 옥쇄파업을 했다가 77일만에 파업을 푼 지 어제 밤으로 정확히 1년이 됐다. 그 날도 이렇게 비가 흩뿌렸다. 생각이 많아져 잠을 자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1년 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기고했던 르포르타주를 다시 한 번 읽어봤다. 그들은 지금 어디에서 뭘하며 살고 있을까. 고동석(38·가명)씨는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워물고 있었다. 50m 옆 언덕 위, 수원 경기경찰청 앞에선 쌍용차 옥쇄파업에 함께했던 동료 60여 명이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고 있었다. 그는 정리해고 대상자 976명에 포함되지 않은, 비해고 대상자였다. ‘산 자’로 불렸다. 16년 동안 쌍용차에서 일했다. 그동안 쌍용, 대우, 상하이차, 그리고 다시 쌍용으로 경영 주체만 세 차례 바뀌었..
메트로신문에서 1년 남짓 글 쓰며 대중과 지근거리에서 호흡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허섭한 글 실력으로 '인앤아웃'이란 칼럼을 쓰고, 그 글에 호응하는 대중과 멀리서나마 글에 대한 글을 주고받으며 함께 사유하고 고민했다. 그런 점에서 '인앤아웃'은 나만의 글이 아니라, 공동 저작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인앤아웃'을 쓸 수 없게 됐다. 서울신문과 메트로신문을 거쳐, 이제 한겨레신문이라는 세 번째 일터에서 일하게 됐기 때문이다. 한때는 막연하게 꿈꿨던 곳이고, 같은 공간의 경쟁사에서 일하던 시절엔 막역하게 지내는 사람들이 가장 많았던 곳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부쩍 비판적 눈길로 바라보게 되는 곳이기도 하다. 나는 '그 조직을 바꾸기 위해 호랑이 굴에 들어간다' 따위의 말을 던지진 않..
자정은 일상이 소멸하는 시간이다. 팽팽하게 긴장됐던 일상은 하루가 시작되는 자정에 이르는 순간 전날의 긴장을 접고 평온한 어둠으로 사라진다. 자정에 이르러 이성과 감성은 스며들 듯 교차한다. 자정은 하루의 죽음을 알리는 시간이다. 하루의 시작이 자정인 것처럼, 삶은 죽음에서 기원해 죽음으로 돌아간다. 자정부터 아침 7시는 일상에서 소외된 시간이기도 하다. 이 소외된 시공간에 깨어있어야만 하는 사람들은 일상성에서 벗어난 지점 어딘가에 위치해야만 하는 존재들이다. 잠들 수 없거나 혹은 잠들기를 거부하거나, 팍팍한 일상이 그들을 잠들 수 없도록 강요하는 건 마찬가지다. 자정부터 아침 7시까지의 시간은 그래서, 일상에서 유리되거나 소외된 자들의 것이다. 여기 이 소외된 시간에 소외된 자들에게 문을 여는 가게가 ..
이재훈의 인앤아웃 no.43 얼마 전 트위터 팔로워들이 각자 가진 악몽과 같은 체벌의 기억을 반추하는 글을 릴레이식으로 올린 적이 있다. 글을 하나씩 읽으며 그들의 기억을 간접 체험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참담했다. 한국 사회에 속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개별적 폭력의 피해자로서 각자 트라우마를 안은 채 어딘가에서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다는 말과 크게 어긋나지 않음이 짐짓 각인되어서다. 체벌은 '말 듣지 않는 아이'를 다른 어떤 수단보다 빠르게 교사 개인의 권능에 복속시키는 수단이라는 점에서 과정을 무시한 속도전과 다르지 않고, 그것을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반의 폭력보다 더 교묘한 인권 배제 행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체벌이란 속도전으로 '교육'을 하는 교사와 학교가 엄존하고 있..
둘은 엇갈린 선택을 했다. 하지만 선택에 따른 결과는 비슷했다. 기업에서 쓰일 '부품'을 찍어내는 하청공장이 된 대학, 체제에 대한 비판적 회의와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공부하는 인문학마저 취업률 수치로 평가하는 대학에 속했던 이들 중 한 사람은 대학에 대해 거부 선언을 했고, 한 사람은 '거부' 조처를 당했다. 거부를 선언하며 대학을 박차고 나온 이는 많은 이들의 눈길을 끌었다. 언론은 앞다퉈 그를 인터뷰했고, 동조와 찬사, 반박과 냉소의 담론이 이어졌다. 붙였던 대자보와 같이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는 제목을 단 책에 대한 리뷰와 저자 인터뷰도 곳곳에 게재됐다. 반면 거부 조처를 당한 이는 별다른 눈길을 끌지 못했다. 타워크레인에 올라가 고공시위를 하고 그를 퇴학시킨 대학의 동료 ..
이재훈의 인앤아웃 no.42 방송인 김미화(46)씨가 'KBS 블랙리스트 발언'으로 곤욕을 치르고 있다. 김씨는 트위터를 통해 '출연금지 인물 리스트'의 존재 여부에 대해 물었지만, KBS는 물음에 답하지 않고 물음 자체가 명예훼손이라며 그를 고소했다. 국내 최대 방송사가 뭐가 그리 자신이 없어 하루도 지체없이 법의 힘에 기대겠다며 엄살을 떨었을까. 평소 대중의 신뢰를 자신하는 조직이라면 법에 호소할 이유가 있었을까. 한나라당은 한 술 더 떴다. "김씨는 흔히 말하는 공인이다. 재보선을 코앞에 두고 정치적 파장을 일으킬 것이 뻔한 발언을 한 건 납득하기 어렵다. 차라리 정치 일선에 뛰어들어라"고 했다. 전혀 정치적이지 않은 김씨의 발언이 한나라당에 의해 정치적으로 포장된 셈이다. 결국 이들의 시선을 통해..
이재훈의 인앤아웃 no.41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예상보다 밝았다. 그는 지난달 24일부터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서 8일째 삼보일배를 하고 있다. 그를 퇴학시킨 대학의 동료 학생들이 개교 91주년을 기념한다며 나선 국토대장정에 발맞췄지만, 속도가 느려 그들이 130km쯤 나갈 때 겨우 35km쯤 왔다고 했다. 첫날은 손바닥으로 아스팔트를 밀쳐내며 땅을 박차고 나아갔지만, 몸이 뻣뻣이 굳은 이튿날은 연거푸 앞으로 고꾸라졌다. 땅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 이라고 했다. 물집이 생겼다 터진 무릎엔 고름이 고였다. 종아리와 허벅지는 햇볕에 빨갛게 익어 화상에 따른 습진이 생겼고, 땅을 짚는 손목과 어깨는 밤이 되면 빠개질 듯 아파 잠을 설치게 했다. 나흘째인 27일 길가에서 대장정 대열과 마주쳤지만, 행렬은 그..
내가 시각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축구를 체험했던 건 군에 있을 때였다. 훈련소 특기 교육을 받던 1998년 6월 21일 새벽 4시. 폭동을 일으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지 아니면 훈련이 없던 새벽 시간인 점을 감안해선지 교관은 14인치 TV를 연병장에 꺼내놓고 수백 명의 훈련병들에게 월드컵 축구를 보여줬다. 네덜란드와 한국이 경기를 하고 있었고, 네덜란드는 5골을 몰아치며 한국을 넉다운시켰다. 한국 축구가 좌절했던 그날, 나는 내가 속한 국가의 대표 팀이 좌절하는데 온전히 동화될 수 없었다. 네덜란드 축구의 미학에 넋을 잃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라운드를 뛰는 10명의 네덜란드 선수들은 수비할 땐 톱니바퀴가 맞물리듯 쉴 새 없이 움직이며 한국 선수들을 압박해 계속 뒷걸음질 치게 만들었다. 공격할 땐 한국 수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