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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은 일상이 소멸하는 시간이다. 팽팽하게 긴장됐던 일상은 하루가 시작되는 자정에 이르는 순간 전날의 긴장을 접고 평온한 어둠으로 사라진다. 자정에 이르러 이성과 감성은 스며들 듯 교차한다. 자정은 하루의 죽음을 알리는 시간이다. 하루의 시작이 자정인 것처럼, 삶은 죽음에서 기원해 죽음으로 돌아간다.

자정부터 아침 7시는 일상에서 소외된 시간이기도 하다. 이 소외된 시공간에 깨어있어야만 하는 사람들은 일상성에서 벗어난 지점 어딘가에 위치해야만 하는 존재들이다. 잠들 수 없거나 혹은 잠들기를 거부하거나, 팍팍한 일상이 그들을 잠들 수 없도록 강요하는 건 마찬가지다. 자정부터 아침 7시까지의 시간은 그래서, 일상에서 유리되거나 소외된 자들의 것이다. 

여기 이 소외된 시간에 소외된 자들에게 문을 여는 가게가 있다. 이름은 그냥 밥집. 하지만 도쿄 신주쿠 골든가 구석에 위치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이 밥집을 '심야식당'이라고 부른다. '하루가 끝나고 귀가를 서두르는 사람들. 단지 뭔가 찜찜한 기분이 들어서 어디로 새고 싶은 기분이 드는 밤도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여기 모여든다. 그 중엔 야쿠자도 있고, 동성의 이 야쿠자를 사랑하는 게이도 있다. 엔카 가수가 되기 위해 매일 밤 가라오케에서 노래를 부르는 지망생, 뮤지컬 배우가 되려다 실패한 스트립퍼, 포르노에 출연한다는 이유로 고향 집에서 배척당한 AV 배우, 끝내 챔피언이 되지 못하는 복싱 선수, 어느덧 퇴물이 된 아이돌 가수 출신의 여배우, 신문 배달로 고학하는 대학생도 이 곳을 찾는다. 이들은 언제나 그 자리에 팔짱끼고 묵묵히 서서 이야기를 들어주는, 그러면서도 그들의 고민에 개입하지 않는 마스터(식당 주인)와 대면해 일상을 위로받는다.

마스터는 소외된 자들을 깊은 우물처럼 흡수하는 존재다. 첫 번째 시즌 마지막 장면에서 암시하듯 마스터에겐 얼굴에 깊이 베인 흉터만큼이나 깊숙이 가려진 과거가 있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그 과거를 털어놓지 않는다. 식당을 찾는 소외된 자들은 되레 그래서 그에게 의지하는 지도 모른다. 그들이 마스터의 과거와 상처를 알게 되면, 자신의 상처가 가진 무게감을 그의 것과 견주며 어쩌면 자신의 것을 털어놓지 못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우물같이 소외된 자들의 목을 가볍게 축여주며 위무하는 존재로 자리매김해 있다.

인간은 자신의 삶에 타인의 존재를 개입시키는 것으로 삶의 상처를 위로받을 수 없다. 상처는 끝내 개별적으로 존재할 뿐이다. 고통을 겪고 있는 타인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옆에 있어주는 것 밖에 없다. 때론 섣부른 개입과 개입 이후 발생할 수 있는 동정이 폭력이 되기도 한다. 게다가 개별적 욕망이 교차하며 혼재된 도시라는 공간 속의 인간은 끝없이 자신의 욕망 안에서 고독할 수밖에 없고, 자본주의라는 체제 안에서 이뤄지는 인간관계는 온전히 주체적으로 관계를 인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마스터는 언제나 그 자리에 서서 추억이 담긴 음식 한 그릇으로 마음을 위로하고 사람을 다독인다.

내가 이성의 부딪힘들에 지쳐 어디론가 돌아가고플 때 '심야식당'은 죽음과 같은 평온함, 유리된 일상들의 부박한 소소함, 존재 자체로 건네는 따뜻한 위무로 거기 있었다. 거대 서사에 매료된 우리의 눈으로 보기엔 사소하기 이를 데 없는, 그래서 발로 툭 건드리면 허물어질 것 같은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들은 그 자체로 거대한 톱니바퀴의 틈새를 틈입하고 들어오는 힘이 있다. 천편일률적인 연애 이야기를 다루는 한국 드라마나 거대 서사로 물든 한국의 소설, 영화에선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요소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 점에서 감성의 향유로 잠시나마 일상을 위로받고 싶을 때, 나는 자정이 지난 심야식당의 문을 열 듯 반복적으로 이 드라마를 찾았다. 가끔은 일본 문화 특유의 과도한 몸짓으로 실소를 자아내기도 하고, 사소한 것에 대한 과도한 진지함이 의아함을 낳기도 하고, 결국 돌아가는 곳이 세속적인 성공에의 꿈과 가족이라는 점에서 아쉬움도 남았다. 그래도 스스럼없이 식당의 미닫이문을 열었던 건, 삶이 직선주로 위에서 치달릴 때 인간은 때로 일상에서의 소외를 스스로 선택하기도 한다는 점을 깨달아서가 아닐까. '하루가 끝나고 사람들이 귀가 길을 서두를 무렵 나의 하루가 시작된다. 돈지루(돼지고기 된장국) 정식, 맥주, 일본 술, 소주. 메뉴는 이것 뿐. 나머지는 맘대로 주문해주면 가능하면 만든다는 게 나의 영업 방침이야. 영업시간은 밤 12시부터 아침 7시쯤까지. 사람들은 심야식당이라 부르지. 손님이 오냐고? 그게 꽤 많이 와.' 왠지 '심야식당'같은 시공간이 거기 있다는 것만으로 위로가 될 법하지 않은가.

 

*미디어스에 실렸음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5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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