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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저히 밋밋한 지루함은 참을 수 없는 것이다. 가슴을 헤집는 감동의 목소리는 대중의 귀에 다가가는 첫 순간에만 효과적일 뿐이다. 감동도 반복적으로 강요되면 금세 외면당하고 만다. 평소 텔레비전을 통해 접하기 어려웠던 가수들의 ‘환상적인 목소리’는 사실 도구일 뿐이다. 정작 프로그램이 눈길을 줘야 할 건 누구나 ‘원칙’에 따라 탈락할 수도 있는 ‘공정한 사회’, 그 냉정한 현실 법칙의 판타지화이다. 쟁쟁한 가수들을 서바이벌 게임의 정글로 내몰고, 그들의 환호와 좌절을 컨트롤하는 것은 “바로 당신!”이라고 말하는 프로그램. 나는 손에 땀을 쥔 채 가수들을 정글로 내모는 주체가 된 양 화면에 몰입한다. 정글 같은 현실에서 허덕이던 나는 여기서, 정글을 컨트롤하는 주체가 될 수 있다는 판타지에 빠진 채 현실의 나를 잊는다.

대중은 쟁쟁한 가수들이라는 꽃놀이패를 잡고, 어떤 패를 손에 계속 쥐고 있거나 혹은 버려야 하는지를 두고 도박 같은 극적 긴장감을 즐긴다. 그러니 노래하는 화면을 끊고, 인터뷰를 삽입해도 화면으로의 몰입을 끌어내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문화방송의 <나는 가수다> 제작진은 그런 생각으로 ‘리모컨 정지’ 상태를 유발하려 했을 것이다. 제작진은 쟁쟁한 가수와 그들을 조종한다고 믿는 대중 위에서 그 둘 모두를 통제하려 했다.



‘나는 가수다’, 판타지와 원격조종


하지만 제작진이 김건모의 예상치 못했던 탈락과 그로 인한 통제 불능의 상태까지 화면에 온전히 담아 극적 긴장감을 더욱 확장하려 했던 시도에서 무언가 삐걱대기 시작했다. 대중은 ‘배신당한 원칙’과 ‘원칙 앞에서의 철없는 징징거림’에 분노했고, 문화방송은 재빨리 연출자 교체로 그 분노를 달랬다. 대중의 분노에 의한 제작진 교체가 대중과 제작진의 권력지위를 바꿔놓은 것일까. 혹시 쟁쟁한 가수들도, 또 그들을 조종한다고 믿던 대중도, 이어 그 둘을 함께 통제한다고 믿던 제작진도, 모두 ‘원칙’으로 포장된 냉정한 현실 법칙 앞에서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언제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 징후적으로 드러난 건 아닐까. 그런 점에서 <나는 가수다>에선 쟁쟁한 가수들과 대중, 그리고 제작진 그 누구도 방송 프로그램이라는 문화 상품을 주체적으로 향유하지 못했다. 그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통제당한 객체들에 불과했다.

지난달 22일 오랜만에 찾은 ‘두리반’은 여전히 곧 쓰러질 듯 위태롭게 서 있었다.(1) 두리반은 1년 넘게 칼국수를 팔지 못하고 있는 칼국수집이다. 이 일대가 철거 대상 지역이 되면서, 개발을 맡은 한국토지신탁과 GS건설이 유채림·안종려씨 부부의 생존터인 두리반 건물을 철거하겠다고 나섰다. 두리반을 제외한 인근 11세대 세입자들은 권리금은커녕 보증금도 돌려받지 못한 채 이사비용 몇 푼만 거머쥐고 서둘러 떠났다. 하지만 안씨 부부는 버텼고, 2009년 12월 26일부터 농성이 시작됐다.

지난해 5월 1일 이곳은 난장으로 뜨거웠다. 인디밴드 60여 팀이 모여 밤샘 공연을 했다. 공연을 즐기러 온 이들과 함께 벌인 그날의 난장은 ‘뉴타운컬쳐파티’라고 불렸다. 시작은 “두리반을 돕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하자”였다. ‘아마츄어증폭기’ 한받과 ‘회기동 단편선’, ‘머머스룸’ 등 인디신 세 팀은 지난해 2월 27일 ‘두리반을 위한 자립음악회’라는 이름으로 첫 공연을 열었다. 음악 공연이 안씨 부부에게 어떤 도움이 될지는 알지 못했다. 연대를 보여주기 위해 할 수 있는 행위는 그저 음악 연주였다. 철거민과 인디신은 그렇게 느슨하게 조우했다.

철거민과 인디신의 만남

하지만 그곳은 공교롭게도 한국 사회에서 인디신이 탄생한 홍대 앞이었다. 음악함을 밥 삼던 이들이 과거 홍대 앞의 허름한 건물 지하에서 노래하고, 기타를 켜고, 드럼을 치면서 매일 무규칙 난장을 벌였다. 텔레비전을 통해 일방적으로 강요된 대중문화가 버거운 이들이 홍대 앞에 모여 음악을 함께 즐겼다. 인디신들은 세상이 그들을 소외시키는 게 아니라, 그들이 세상을 소외시키겠다고 벼렀다. 이곳에 모이는 이들은 방송이 요구하는 대중문화가 대중이 욕망하는 대상의 집합체로서 대중성을 갖춘 게 아니라, 대중이 욕망하리라 믿어지는 판타지를 대중성으로 포장하고 있다는 점을 알았다. 문화는 그렇게, 때로는 일방적으로 주입되지 않는 방식으로, 때로는 주체적으로, 누릴 수 있고 가질 수 있는 대상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지금의 홍대 앞은 과거와 전혀 다른 형질의 공간이 됐다. 어느덧 자본이 스멀스멀 틈입했다. 인디신들은 하나씩 ‘아마추어리즘, 대안, 저항, 젊음’ 등의 언어로 포장돼 대중 앞에 상품화했다. 자본의 개입으로 인디신 안에서도 대중에게 경쟁력이 있다고 믿어지는 ‘주류’ 인디신과 그렇지 못한 ‘비주류’ 인디신이 분리됐다. 홍대 앞은 온갖 상품들이 가장 빠른 속도로 전시되는 공간이 됐다.

그들은 모두 ‘몫이 없는 자’

건물과 공연장 임대료가 뛰었다. ‘주류’ 인디신들이 인디신의 중흥기를 이끌 때, ‘비주류’ 인디신들은 공연료도 받지 못한 채 홍대 앞에서 밀려나기 시작했다. 두리반처럼, 홍대 앞 공연장과 클럽 역시 오늘내일 하는 처지가 됐고, 두리반 부부처럼, ‘비주류’ 인디신도 보습 댈 땅을 잃어갔다. 두리반 부부를 타자로 인식한 채 느슨하게 연대했던 ‘비주류’ 인디신은 어느덧, 비슷한 처지를 자각하며 공존함의 의미에 대해 근원적인 물음을 던지는 대자존재가 되어 갔다.

철거민과 ‘비주류’ 인디신만이 아니었다. 또 다른 장르의 예술이 결합했다. 독립영화 <뉴타운컬쳐파티>가 이런 연대에의 자각, ‘예술하지 못하는 시대에 예술하려는 사람들의 고민’에 카메라를 들이대며 두리반을 찾았다. 정용택 감독은 연출 의도에서 ‘불안의 조우’로 이 결합을 설명했다. “홍대 근처 연남동에서 아내와 아이 둘과 함께 월세 세입자로 살고 있는 나는 근래 주거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살고 있는 구역이 재개발된다는 얘기가 여기저기서 들리기 때문이다. 최근의 전세 폭등으로 현재의 보증금으로는 주변에선 방을 구하기가 힘들어, 동네가 재개발되면 철거민이 되어 8년 동안 살았던 홍대 앞을 떠나야 한다. 그러다 두리반을 접하게 됐다. 재개발과 뉴타운으로 인한 피해를 입을 내 가족의 운명에 불안해하던 나에게 두리반은 남의 일이 아닌 일로 다가왔다.”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씨의 죽음에서 보듯, 우리는 예술을 위해 노동하는 수많은 콘텐츠 생산과정 노동자들이 ‘꿈을 좇는 아름다움’이라는 이름으로 거대 배급자본의 영역에서조차 착취당하는 현실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리고 거대 배급자본의 영역에서 철저히 배제된 수많은 ‘인디’ 영화인들도, 실존을 위한 물적 토대의 지속 가능성을 담보받지 못한 채 불안해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인디 영화인들의 불안은 유채림이나 안종려, 단편선과 한받의 불안과 분리한 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불안은, 유령이 되어 한국 사회에 떠돌고 있다.

그들과 독립영화가 만났을 때


그렇기에 <뉴타운컬쳐파티>는 ‘사회적 제작’이란 실험을 들고 나왔다.(2) ‘사회적 제작’은 감독과 조연출 등 영화를 직접 생산하는 주체들, 그리고 영화 제작과 배급, 홍보에 뛰어들거나 기금 납부로 참여하는 대중 주체들이 유채림, 안종려, 단편선, 한받 등과 어우러지는 프로젝트다. 영화의 제작을 맡고 있는 이상욱 PD는 “두 가지 상충된 고민이 있다. (영화산업은) 제도적으로 투자자가 수익권을 갖고, 감독이 저작권을 갖는데, 그 안에서 자본주의적 소유관계와 권력 기제가 작동한다. 하지만 하나의 산물은 사회적인 것이다. 이것을 누구의 것 혹은 누구의 독점적 성과로 규정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서) 예술적 창작물의 저작권이 창작자 모두에게 있다는 것도 맞는 말이다. 예술 노동자들도 먹고살아야 하지 않느냐. 그래서 사회적 제작을 하고, 1년 뒤 영화 판권을 사회화하자는 합의에 이르게 됐다”고 말했다.

제작진이 말하는 ‘사회적 제작’은 작품과 제작 취지에 공감하는 개인과 단체들로 <뉴타운컬쳐파티> 제작위원회를 구성하고, 공개적으로 사회적 기금을 조성해 영화 제작비를 조달하는 것을 말한다. 기금 납부는 △완전 기부 △수익이 발생했을 때 100% 환급 △환급분 독립영화 제작지원금 출연 등 세 가지 방식으로 진행된다. 영화 수익금도 독립영화 제작지원금으로 일부 출연되고, 철거민과 인권운동, 인디신을 위한 공공기부, 제작 스태프와 업체, 음악 저작권 등의 러닝 개런티로 사용된다. 이 PD는 “사회 구성원들이 십시일반 뜻을 모아 영화를 만들면, 영화는 개인의 것이 아니라 사회의 것이 된다. 그래서 1년 동안은 배급 등으로 파생 수익을 얻어 이를 배분하되, 1년 뒤에는 공개 라이선스로 만들어 누구나 영화를 사용할 수 있게 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관찰은 그렇게 시작됐다. 민중소설가 유채림씨는 자신이 소설로 다루던 이야기가 그대로 재현된 현실과 마주한 채 자신의 실존과 투쟁하고 있다. 펜을 들고 유려한 문장과 씨름하던 그는, 처음에는 열정을 격하게 토해내는 인디신과의 만남을 부대껴 했다. 하지만 유씨 역시 ‘예술하지 못하는 시대’에 살면서, ‘그래도 예술하려는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인디신과 자신이 다른 지위에 있지 않다는 점을 자각했다. 지난해 2월 공연부터 시작해 ‘뉴타운컬쳐파티’를 거쳐, ‘자립음악생산자조합’을 만들어낸 일련의 과정에서 한받과 단편선, 그리고 유채림의 자각은 예술 그 자체로서의 예술과 노동행위로서의 예술, 상품화한 예술행위와 상품이 되길 거부하는 예술행위, 그것들이 분리되거나 결합한 지점에서 나오는 실존적이고 물적인 토대에 대한 고민과 함께 어우러진다. 그리고 <뉴타운컬쳐파티>를 사회적으로 제작하겠다며 뛰어든 모든 이들도 그들과 함께 객체적 존재이기를 거부하고 나섰다.

결국 독립영화 <뉴타운컬쳐파티> ‘사회적 제작’은 문화 생산자와 수용자의 경계가 희미해진, 종국에는 누구의 것도 아니면서 과정에서는 누구의 것도 될 수 있는 문화 생산에 대한 실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실험은 ‘원칙’으로 상징되는 ‘냉정한 현실 법칙’과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통제에서 해방된 이들이 주체적으로 문화를 향유할 수 있게 하는 자리매김을 시도하고 있다.

다함께 만들고, 누구의 것도 아닌…

방송으로 재현되는 대중문화, 그 가운데에서도 예능이 우리의 삶을 압도하고 있다. 예능이란 대중문화를 두고 “예능은 예능일 뿐 심각하지 말자”라고 말하는 행위에는, 대중문화의 향유와 자신의 실존 사이에 아무런 연결 지점이 없을 것이라는 인식이 전제돼 있다. 하지만 예능을 유도한 객관적 사회 현상은 현실의 나를 옥죄는 지독한 그 무엇에서 기인한다. 시청률을 바탕으로 다수의 상업자본에 의해 통제받는 대중문화는, 쟁쟁한 가수들에게 노래 실력뿐만 아니라 ‘원칙에 순종하는’ 인간성까지 갖추길 요구하고 있다. 대중은 일주일 내내 자본의 지독한 경쟁 시스템에 종속돼 가혹하게 통제당하는 아픔을 일요일 저녁 잠시 통제자가 된 ‘기쁨’으로 환원하며 망각을 시도한다. 그리고 문득 현실에서의 정치성도 거세당한다. 제작진은 자신들이 통제자인 양 행세하지만, 그들 역시 자본에 종속된 객체로서 언제든 구조조정 대상이 되는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다수의 상업자본 가운데 그 어떤 특정한 누구에게도 어떻게 이 구조를 통제하고 있느냐고 물을 수 없는 현실, 누구도 통제하지 않으면서 통제당하고 있는 매트릭스에 종속돼 모두가 허덕이고 있는 상태, 그것이 바로 공영방송의 서바이벌 가요 프로그램을 둘러싼 보이지 않는 그 무엇들이다. 예술하기 힘든 시대, 상품화하지 않는 예술행위로서의 지속가능성을 좇는 <뉴타운컬쳐파티>의 주체적 향유는, 그런 매트릭스를 해체하려는 구조적 상상 너머에 도저하게 자리잡고 있지 않을까.

 

글·이재훈

  

<각주>

(1) 이재훈 블로그, ‘작은 용산’ 홍대앞 ‘두리반’과 느슨한 연대의 자각, http://nomad-crime.tistory.com/79.

(2) <뉴타운컬쳐파티> 블로그 http://ntcp.tistory.com/ 참조.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4월호에 실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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