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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문트 바우만 할배



법률상의 개인의 여건과 실제 개인이 될 수 있는 기회, 즉 자신의 운명에 대한 통제권을 쥐고 진정 바라는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 사이에는 엄청나게 넓은 간극이 자리하고 있다. 현재의 개인들의 삶을 더럽히는 가장 유해한 악취가 뿜어나오는 곳도 바로 이 깊게 드리운 간극의 심연에서이다. 그러나 이 간극은 개인의 노력, 개개인이 스스로 꾸려가는 생활정치 안에서 얻는 수단과 자원을 통해서는 메워질 수 없다. 그 간극을 메우는 일은 공적 개념으로서의 대문자 '정치'의 문제이다. 문제의 간극이 발생하고 커지는 것은 엄밀히 말해 공적 공간, 그 중에서도 '아고라', 즉 일상의 정치가 공적 개념으로서의 대문자 '정치'와 만나 사적인 문제들이 공적인 이슈들을 다루는 언어로 새롭게 해석되고 사적인 곤란들에 대하여 공공의 해결책들이 모색되고 조정되며 합의되는 매개가 되는 공적/사적 장소가 텅 비었다는 데서 연유한 것이다. 말하자면 판이 뒤집힌 것이다.

 

비판이론의 과제는 전도되었다. 과거의 비판이론의 과제는 전지전능하고 비인격적인 국가와 그러한 국가의 수많은 관료주의적 촉수들, 또는 그보다 규모가 작은 복제물들의 압제적인 규칙 아래에서 괴로워하는 사적인 자율성을 '공공영역'의 전진 부대로부터 수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비판이론의 임무는 사라져가는 공공영역을 수호하는 것, 아니 그보다는 빠르게 비어가는 -민주적 제도들이 성취할 수 있는 그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관심 있는 시민'의 출구와 실제적인 힘이 빠져나갈 곳이 유기된 탓에- 공적 공간을 정비하여 사람을 채워 넣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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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는 '좋은 사회' 혹은 어떤 식으로 규정되든 '정의롭고 올바른 사회'를 목표로 삼고, 부적절하거나 나쁜 대안들과 거리를 두려고 힘들게 노력을 기울이는 세계의 부산물이자 필수적인 보충물이었다. 그러나 '액체 근대'의 세계는 두 가지 모두 하지 않는다. 마가렛 대처의 악명 높은 구호인 '사회 같은 것은 없다"는 말은 변화하는 자본주의의 성격에 대한 기민한 통찰인 동시에 그러한 의도의 선언이자 자시 실현적인 예언이다. 이를 뒤쫓아서 규범적이고 보호적인 네트워크가 해체되었고, 이러한 상황은 대처의 말에 생명을 부여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사회가 없다'는 것은 유토피아도 없고 디스토피아도 없음을 의미한다. 가벼운 자본주의의 구루인 피터 드러커가 말한 대로, "더 이상의 사회적 구제는 없다." 이 말은 함의상 파멸에 대한 책임이 사회의 문 앞에 놓여서는 안 되며 구원이나 파멸이 모두 너 자신이 할 탓이고 오로지 너 자신만의 관심사-자유로운 주체인 네가 자신의 삶에서 자유롭게 행동해온 것의 결과인-라는 것을 시사(명령보다는 생략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한다.

 

물론 내막을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그리고 그들 중 꽤 많은 수가 기꺼이 동의할 준비가 되어 있는 지지자들을 거느리고 있다. 그러나 '내막에 밝은' 그런 사람들, 그들이 갖춘 지식이 공개적으로 의심받아본 적이 없는 그런 사람들조차도 지도자는 아니다. 그들은 기껏해야 상담자일 뿐이다. 지도자와 상담자의 중대한 차이점은 지도자는 추종을 받게 되어 있고 상담자는 고용 및 해고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지도자들은 훈육을 강요하고 기대하지만, 상담자는 고작해야 기꺼이 귀 기울이고 주의를 쏟아부으려는 자발성에 의존한다. 그러한 자발적인 태도들은 먼저 미래의 청자들의 환심을 사서 반드시 얻어내야만 하는 것이다. 지도자와 상담자 간의 또 다른 중대한 차이점은 지도자는 개인적 이익과 '우리 모두의 이익' 혹은 사적인 근심과 공적인 이슈 사이의 쌍방 통역 노릇을 한다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상담자들은 사적인 폐쇄 영역 밖으로 혹시라도 발을 내디디게 될까봐 늘 주의를 기울인다. 질병은 개인적인 것이고 그 치료 역시 그러하다. 근심은 사적이며 그 근심을 싸워 물리치는 수단 역시 그러하다. 상담자들이 제공하는 상담은 대문자로 시작하는 정치가 아니라, 생활정치를 거론한다. 그들은 상담 받는 사람들이 그들 혼자서 혹은 혼자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을 거론하며, 그들 혹은 그녀들 각각에게 이야기한다. 그들 모두가 힘을 합치지만 하면 서로를 위해 함께 이뤄낼 수 있는 것들은 거론하지 않는다.

 

과도한 인기를 누린 '자기 계발서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성공을 거둔 책 중 하나에서, 멜로디 비티는 자신의 독자들에게 경고/충고한다. "우리 자신을 미치게 만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다른 사람들 일에 휘말리는 것이고, 제정신으로 행복하게 살게끔 만드는 가장 빠른 길은 우리 자신의 일을 잘 돌보는 것이다." 이 책의 즉각적 성공은 시선을 잡아끄는 제목('더 이상 서로 얽매이지 말자') 덕택으로 이는 책의 내용을 아주 잘 요약해주고 있다. 다른 사람들의 문제를 바로잡으려다 보면 당신도 그러한 문제에 좌우되게 되고, 그렇게 된다는 것은 운명의 볼모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좀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당신이 정복할 수 없는 문제나 통제할 수 없는 사람들의 볼모가 되는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분명한 양심을 가지고 네 일만, 오직 그것만 신경써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 하는 일에서는 별로 얻을 게 없고, 다른 이도 아닌 오직 당신만이 해낼 수 있는 일에 오히려 소홀해질 수가 있다. 이런 내용들은 더 나은 판단에 양신을 찔려 하면서 따르거나 저항해야 했던 모든 외톨이들의 귀에는 달콤한 메시지 -그토록 필요했던 확신, 면죄, 하나의 청신호로서- 가 된다. "결국 쾌락이 권리나 의무보다 더 안전한 보호 수단"이라는 새뮤얼 버틀러의 권고처럼.

 

지도자들이 가장 빈번하게 사용하는 인칭대명사는 '우리'이다. 상담자에게는 이 말이 별 소용이 없다. '우리'는 그저 여러 개의 '나'를 총합한 것이 지나지 않으며, 그 총하은 에밀 뒤르켕의 '집단'과는 달리 부분들을 합친 것보다 크지 않다. 상담이 끝나고 나면 상담받은 사람들은 그 상담이 자신의 시작될 때나 매한가지로 혼자이다. 달라진 게 있다면 혼자임이 일층 배가된다는 점이다. 자기가 만든 덫에 걸려 버림받을 것이라는 본능적 직감은 자꾸만 강해지다가 나중에는 거의 확신에 가까워진다. 어떠한 충고를 들었든지 간에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상담받은 사람 혼자의 몫이다. 즉, 그 충고를 알맞게 실천해야 할 전적인 책임을 져야 하며, 안 좋은 결과가 나온다 해도 이는 오직 잘못과 태만 때문이므로 남을 탓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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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중대한 결과는 우리가 알고 있던 식의 '정치', 대문자로 시작되는 정치, 사적 문제들을 공적 현안으로(혹은 그 역으로) 해석하는 소임을 짊어진 행위의 죽음일 것이다. 오늘날 그러한 해석의 노력은 서서히 멈추게 되었다. 사적 문제들은 공개석상에서 표출되더라도 공적 현안이 되지 못한다. 대중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서도 그 문제들은 여전히 사적인 문제로 남아 있으며, 그것들이 공개석상으로 자리를 옮겨서 이루는 바는, 공공의 의제에서 '사적이지 않은' 다른 모든 문제들을 밀어내는 것이다. 근자 들어 '공적 현안'으로 부쩍 많이 인식되는 것은 공적인 인물들의 사적 문제들이다. 민주정치에서의 유서깊은 그 질문 -공적인 인물들이 자신들의 공적 의무를 행하는 방식이 그들의 국민이나 유권자들의 복지와 안녕에 얼마나 유용한지 혹은 해로운지- 은 의사일정에서 누락되어 버렸고, 살기 좋은 사회, 공공의 정의, 혹은 개인의 복지에 대한 집단적 책임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망각으로 몰아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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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만 할배, 탁월하다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바우만 할배가 12년 전 사유한 것들이 고스란히 현재의 한국 사회를 해석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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