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대개는 조밀한 인간사에서 벗어나 세상을 조망하거나 관망하고 싶을 때, 사람들은 높은 곳에 오른다. 그러나 오히려 세상의 주목과 관심을 받으려고 높은 곳에 오르는 경우도 뜻밖에 많다. 특히 쉽게 알릴 수 없는 절실함을 표현하기 위해, 어떤 이들은 그 절실함만큼의 공포를 무릅쓰고 더 높은 곳으로 향한다. 그리고 어떻게든 타인의 무뎌진 공감을 얻어내려고 그 위에서 극한의 고난을 감내한다.

하지만 자극에 익숙해지면 더는 자극이 아닌 것처럼, 사람들은 이제 고공 농성이라는 공포와 고난을 택하는 이들을 익숙한 눈길로만 바라본다. 그들이 왜 그곳까지 올라갔는지에 대해서는 어느덧 관심을 갖지 않게 되었다. 그들이 올라가 있다는 현상만 희미하게 감지할 뿐이다. <나·들>은 그들이 공포와 고난을 택한 이유, 공포와 고난을 택할 수밖에 없게 만든 역사, 그리고 그것을 옆에서 함께 나눴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과거와 현재의 아픔들을 찬찬히 살펴봤다.

 

---------------------------------------------------------------------------------

 

내미는 손이 거슬거슬했다. 머리칼 곳곳에서 한두 가닥씩 흰머리가 보였고, 거뭇한 수염에도 하얀 털이 드문드문했다. 토요일 오후 5시까지 이어진 노동의 뒤끝이어선지 아니면 52년 동안의 지난한 삶에 무겁게 짓눌렸는지, 푹 꺼진 눈동자엔 생기가 없었고 지방이 두툼하게 돋은 눈 밑은 그늘이 자욱했으며 눈꺼풀은 다섯 겹인지 여섯 겹인지 셀 수 없을 만큼 층이 져 있었고 뺨이 움푹 들어가 광대가 도드라져 보였다. 콧잔등 위에는 밴드가 붙어 있었는데, 밴드 속 붕대에 차마 마르지 못한 피가 배 있었다. 어찌된 상처냐고 묻자, 파리한 식물 같은 그가 씩 웃으며 “일하다 맞았어요”라고 한다. 그 나름의 유머 같았지만, 재미는 없었다. 진짜 맞은 거예요? 그게 아니라 부딪힌 거죠? 재차 묻자, 조용히 턱을 내리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는 경남의 한 대형 조선소에서 하청업체 소속으로 일하고 있다. 하청업체는 요즘 ‘협력업체’라고 불린다. 원청회사인 대형 조선소와 하도급 계약을 맺고 공사비를 받아 소속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지급하는 시스템은 변함 없는데, 명칭만 어느덧 바뀌어 있다. 그가 다니는 조선소는 7천 명이 넘는 노동자 가운데 3천 명 정도만 조선소 소속 정규직이다. 나머지 4천여 명은 70개 정도의 협력업체에 소속되어 있다. 그는 소속 협력업체와 1년에 한 번씩 계약한다. 하지만 계약은 형식일 뿐, 자동 갱신됐다. 그렇게 14년 동안 임금에 대한 별다른 협의 없이 일해왔다.

 

그도 정규직 노동자였던 적이 있다. 쇳물을 끓여서 제품을 만드는 주강 공장에서 오래 일했다. 그러나 한참 전 일이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금융위기 직후 공장은 부도가 났고, 서너 달 동안 월급이 나오지 않았다. 명예퇴직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전혀 다른 업종으로 와서, 계약직이 됐다. 그 뒤로 신분은 내내 그대로다. “처음에는 적응도 안 되고 해서 그만둘까 했는데, 생계도 있고 하니까 쉽지가 않대요.”

 

임금은 세금 빼고 월 200만 원 남짓 된다. 3년 전, 세계적인 경제위기로 조선업계의 심각한 불황이라면서 회사는 일방적으로 임금 20%를 삭감했다. 그 뒤로도 배는 쉴 새 없이 건조되는데 임금은 다시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아마 삭감된 금액을 회복하려면 15~20년은 지나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 상황으로 봐선 그것도 안 되지 싶어요.” 오전 7시에 출근해 평일은 오후 7시, 토요일은 오후 5시에 일을 마친다. 그는 배의 배관 만드는 일을 맡고 있다. 그는 “배관은 사람의 핏줄과 같아요”라고 했다. 여전히 나직한 목소리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단호했다.

 

협력업체 소속 노동자나 원청회사인 조선소 소속 노동자나 같은 공장에서 비슷한 일을 한다. 하지만 처우는 크게 다르다. 지난 늦여름 정규직 노조와 조선소 사이에 임금·단체협약이 타결됐다. 협력업체 노동자들은 협약이 어떻게 체결됐는지조차 알기 어렵다. 회사든 노조든 협약 내용을 잘 공개하려 들지 않는다. 그는 올해 우연찮게 그 내용을 알게 됐다. “정규직은 월 평균 400만~500만 원의 임금을 받아요. 여기에 1년 동안 통상 상여금 800%(3200만~4천만 원)가 지급됩니다. 그런데 이번엔 ‘특별상여금’을 추가로 협약했더군요. 통상 임금의 500%(2천만~2500만 원)에 340만 원을 더 얹은 금액이에요.” 협력업체 노동자들에겐 특별상여금 명목으로 25만 원이 지급됐다. 정규직 특별상여금의 1%도 채 안 되는 금액이다. 그런데도 원청회사는 “돈이 없지만 20억 원을 대출받아서 주는 것”이라고 생색을 냈다.

 

요즘 기업들은 임금 협상을 할 때 기본급이 아니라 상여급으로 임금 총액을 조절한다. ‘국제 경제 상황에 맞춰 탄력적으로 적용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 표면적인 까닭이다. 하지만 속내는 정규직 노조와 계약직·비정규직을 분리해 격차를 벌이는 도구로 쓰기 위함인지도 모른다. 정규직에 특별상여금으로 거액을 안겨주고, 계약직과 비정규직, 하청업체 노동자에겐 생색만 내거나 아예 모른 척한다. 정규직 노동자들은 그런 ‘추가 임금’을 고된 투쟁 끝에 얻어낸 결실이라 여길 수밖에 없고, 그 밖의 노동자들은 차별에 맞설 힘이 없다. 그가 다니는 조선소에는 오랜 역사를 가진 정규직 노조가 있지만, 협력업체 노동자들에겐 노조가 없다. 노조를 왜 만들지 않느냐고 묻자, 말똥히 뜬 눈으로 억양 없이 대답한다. “만들 수가 없어요.” 공사비 계약권을 틀어쥔 원청회사 눈치를 보는 사 쪽이 아래로 눈을 부라리면서 소문만 들리면 노조를 없애려 하고, 정규직 노조도 협력업체 노조를 그다지 반기는 분위기가 아니라고 했다. 이 조선소의 정규직 노동자들은 맞춤 작업복을 입고, 협력업체 노동자들은 대량생산된 기성복을 사 입는다. 모양과 색깔은 같다. 하지만 천의 재질이 다르다. 재질이 다른 작업복을 입고, 그는 배의 혈관을 만든다.


막 썬 회가 아직 몇 점 남았는데, 그는 가방을 둘러메고 “고맙다”는 인사를 남긴 채 어둠 속으로 총총 사라졌다.


 

“올해 초 저에게 안 좋은 일이 있었어요.” 돼지국밥에 첫 숟가락을 담그면서 그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고개를 숙인다. 인터뷰 요청을 몇 차례 거절한 이유를 말하는 건가 싶어, 무슨 일인지 묻지 않았다. 그러자 잠시 침묵하던 그가 “마누라가 죽었어요” 했다.

 

평소 건강에 전혀 문제가 없던 아내였다. 젊을 때 중소업체 여러 곳을 전전하던 아내는, 몇 년 전부터 어르신들이 모여 사는 요양원에서 요양보호사 일을 했다. 급여는 많지 않았지만 거동이 불편한 분들을 돌보며 봉사하는 마음으로 하는 일이라, 아내는 늘 “일은 고되어도 마음은 고되지 않다”고 했다. 지난해 12월 중순쯤, 어느 날엔 “컨디션이 안 좋다”고 하고, 어느 날엔 “감기 몸살 초기인 것 같다”고 하더니 뒤늦게 가까운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머리를 갸웃하며 혈액검사를 했고, 백혈구에 이상 징후가 보인다고 했다. 지난 1월 초 대학병원으로 옮겨 골수 검사를 했더니, 급성 백혈병 진단이 나왔다. 1차 항암 치료를 받았다. 의사는 ‘회복기’라고 말했지만, 아내의 몸은 회복되지 않았다. 설 명절을 쇤 지 이틀 만에, 아내는 끝내 세상을 등졌다. “그렇게 급하게 가니까… 감당이 안 되더라고요.”

 

그에겐 자녀가 셋 있다. 큰아들은 대학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군에 갔다가 지난 7월 제대했다. 바로 복학하지 않고, 아비의 벌이를 돕겠다며 1년 휴학계를 낸 뒤 대형 마케팅 업체에서 포장과 배송 일을 하고 있다. 월 110만 원 정도 번다. 큰아들은 한 학기 등록금이 200만 원가량으로 사립대보다 상대적으로 싼 국립대를 선택했다. 계약직 노동자인 아비와 달리, 안정적인 공무원이 되겠다며 법학과에 진학했다. 큰아들은 아비를 닮아 유난히 말수가 적다. 그래서 큰아들의 그런 선택이 정말 등록금이 싸기 때문이고, 그런 진학이 정말 남루한 노동자인 아비의 삶을 부인하기 위함인지 그는 알 수가 없다.

 

딸은 부산의 한 전문대에서 유아특수교육을 전공하고 있다. 친구들과 함께 자취를 한다. 등록금은 한 학기 300만 원 정도다. 딸은 엄마를 닮아 어릴 때부터 봉사에 관심이 많았다. 남의 아이 돌보는 일이 힘들 텐데, 더군다나 장애가 있는 아이들을 돕겠다고 나서는 딸을, 그는 말리지 못했다. 이제 고1인 막내아들은 그가 직접 아침밥을 해 먹인다. 학원은 보내지 못하고 있다. 큰아들과 딸의 대학 등록금이 버겁지만, 아내가 남긴 보험금이 3년 동안 월 50만 원씩 지급되고, 국민연금도 월 16만 원씩 나와 그 돈으로 겨우 충당하고 있다.

 

그는 ‘안 좋은 일’이 9년 전에도 있었다. 3살 아래 동생을 먼저 보냈다. “일하고 있다가 연락을 받았거든요. 아침에 출근했는데, 아내한테 전화가 왔어요. ‘부산에서 이상한 소문이 들린다. 큰일 생긴 거 아이가. 빨리 가 봐라’ 해요. 이상하게 그전부터 신경이 쓰여서 ‘가봐야지 가봐야지’ 생각은 했는데 선뜻 걸음이 안 가지더라고요. 동생이 다니는 회사의 파란 작업복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주변에 왔다 갔다 해도, 선뜻 입도 안 떨어지고….”

 

그는 담배를 달라고 하더니 한 대 피워 물었다. 길게 내뿜는 담배 연기 속에서 4분 동안 긴 침묵이 이어졌다. 그의 눈자위에 언뜻 눈물이 고이는가 싶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놈 보내기 사흘 전인가 꿈을 꿨거든요. 이상하게 하늘의 별들이 엄청나게 많더라고요. 손에 잡힐 듯이 별이 나지막하게 앉아서… 그게 무슨 꿈인가 했는데, 결국 그놈 갈 꿈이었더라고요.”

 

동생은 그처럼 배를 짓는 노동자였다. 버스로 40분이면 달려갈 거리지만, 동생이 그 높은 곳에 혼자 129일 동안 올라가 있었는지 그는 알지 못했다. 무뚝뚝한 동생은 평소에 안부 전화를 걸어도 늘 “괜찮다, 잘 지낸다”는 말만 했다. 2003년 설 명절 때 차례를 지내기 위해 집을 찾은 동생을 마지막으로 본 그날에도 “괜찮다, 잘 지낸다”는 말은 변함없었다. 동생이 거리에 있든, 35m 높이의 크레인에 있든, 유난히도 거셌던 태풍 매미가 와서 그 무거운 크레인이 바람개비처럼 흔들리며 180도 회전을 했든, 그는 언제나 전화기 너머로 “괜찮다, 잘 지낸다”는 목소리를 듣고 동생에게 별일이 없다 생각하며 안도할 수밖에 없었다. 129일 동안 언론 매체에서는 단 한 줄도 동생이 크레인에서 고공농성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몰랐다.

 

부산 영도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그리고 129일의 사투가 목을 맨 자살로 끝을 맺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부들부들 떨며 ‘85호’라고 적힌 크레인에 올라갔다. 동생은 담요 위에 누워 있었다. 검사가 와서 시신을 검안하고 갔다고 했다. 늦가을 35m 위에서 부는 찬바람을, 동생은 눈을 감은 채 새파란 알몸으로 맞고 있었다. 크레인에서 내려다본 공장 풍경은 그가 일하는 공장 풍경과 별다르지 않았다. “참, 억장이 무너지대요. 크레인 주변엔 아무것도 없고, 책만 11권 있었어요. <로마인 이야기>라고. 동생이 마지막에 뭘 보고 있었는지 궁금해서 제가 들고 와서 봤어요. 그런데 뭐, 지하고는 사실 아무런 상관없는 이야기가 담긴 책이죠.”

 

유서는 읽어봤느냐는 물음에,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읽어봤지요. ‘마지막으로 가면서까지 노조 걱정을 하는구나’, ‘가족보다 노조가 먼저냐’는 생각부터 들더라고요. 지 나름대로는 같이 일하는 동료들 살려보려고 가긴 했지만, 그게 지 생각대로 되지도 않았고. 지 나름대로 돌파구를 찾으려고 했는데 그게 마지막 선택이었겠죠. 형 처지에선 사실 노조도 싫고 회사도 싫고 그렇더라고요.”

 

하지만 그는 그날, 2003년 10월 17일부터 그 회사 노조 천막에서 노조원들과 함께 한 달 동안 농성했다. “처음에는 그 사람들(노조원들)이 이해가 안 됐어요. 그런데 같이 지내다보니까, ‘아, 이쪽 사람들도 참 힘들구나’ 싶대요. 제가 따로 도움을 줄 건 없고 하니까 같이 한번 지내보자 싶었어요.” 그러면서 노조를 무던히 싫어하는 한진중공업에 대해 알게 됐고, ‘회사가 정규직 노조를 없애버리고, 협력업체만으로 운영하려는구나’라는 생각도 하게 됐다.

 

그해 동생만이 아니라 많은 노동자들이 죽었다. 2003년 1월 9일에는 경남 창원 두산중공업 회사 안 ‘노동자 광장’에서 보일러 공장 노동자 배달호(당시 50살)씨가 분신했다. 그는 노동조합을 무력화하려고 노조 간부 89명을 징계해고하고 65억 원의 손해배상 가압류를 단행한 회사에 목숨을 던져 항의했다. 동생이 숨진 지 엿새가 지난 10월 23일에는 금속노조 세원테크 이해남 지회장이 역시 사 쪽의 손해배상 가압류와 노조탄압에 항거하며 분신해 결국 숨졌다. 사흘 뒤 10월 26일에는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노조 이용석 광주본부장이 “비정규직 차별 철폐하라”고 외치며 분신해 숨졌다. 그리고 10월 30일, 동생과 함께 싸우던 곽재규(당시 48살)씨가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 근처 4도크(야외 작업장)에 투신해 숨졌다. 하지만 정권의 수장인 노무현 전 대통령은 그들의 연쇄 죽음 직후인 11월 4일 국무회의에서 “지금과 같이 민주화된 시대에 노동자들의 분신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투쟁수단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남겼다. 노 전 대통령은 한때 동생의 고문 변호사였다.

 

“그때가 노무현 대통령 초기였어요. 한 해 노조위원장만 3명이 목숨을 끊고, 노동자 2명이 또 자살한 건 아마 전무후무할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노무현 대통령 참 좋아하대요. 저는 싫어요.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조금만 신경을 썼으면 동생이나 그분들이 살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렇다보니 더욱 더 싫더라고요.”

 

하지만 그 대통령도 결국 2009년 스스로 목숨을 끊어 이 세상에 더 이상 없는 존재가 됐다.

 

“19만3천 원. 한 정치인에게는 한 끼 식사값도 안 되는 터무니없이 적은 돈입니다. 하지만 막걸리 한 사발에 김치 한 보시기로 고단한 하루를 마무리하는 사람에게는 며칠을 버티게 하는 힘이 되는 큰돈입니다. 그리고 한 아버지에게는요.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길에서조차 마음에서 내려놓지 못한, 짐이었습니다.

 

2003년 11월 18일 새벽 2시. MBC 라디오에서 한 여성 아나운서는 이 말로 방송을 열었다. 아나운서는 “아이들에게 힐리스를 사주기로 했는데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해 정말 미안하다. (중략) 35m 상공에서 100여 일도 혼자 꿋꿋하게 버텼지만 세 아이들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에는 아픈 마음을 숨기지 못한 아버지. 그 아버지를 대신해서 남겨진 아이들에게 인라인스케이트를 사준 사람이 있습니다. 부자도, 정치인도 아니고요, 그저 평범한, 한 일하는 어머니였습니다. 유서 속에 그 힐리스 대목에 목이 멘 이분은요, 동료 노동자들과 함께 주머니를 털었습니다. 그리고 힐리스보다 덜 위험한 인라인스케이트를 사서, 아버지를 잃은, 이 위험한 세상에 남겨진 아이들에게 건넸습니다. 2003년 늦가을, (주류 언론들이 말하는) 대한민국의 노동 귀족들이 사는 모습입니다.”[각주:1]

 

동생은 큰아들 준엽(당시 12살), 딸 혜민(당시 10살), 막내아들 준하(당시 7살) 등 아이를 셋 남겼다. 동생에게 “아빠, 힘들면 내가 일자리 구해줄 테니 빨리 돌아와요”라고 편지를 썼던 혜민양은 올해 19살이 됐고, ‘죽음이 뭔지도 모르는 7살에 아빠의 장례식을 치르고 이유도 없이 시름시름 앓았다’는 준하군은 올해 16살이 됐다. 하지만 그는 동생의 죽음 이후 조카들을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제수는 올해 초 아내가 세상을 뜨기 전까지는 1년에 두어 차례 아내와 통화하며 서로 안부를 묻곤 했다. 하지만 왠지 제수는 조카들과 어떻게 살고 있는지 말하는 걸 꺼렸다. ‘정리되면 연락드릴게요’라고만 했다. “그러다가 아내가 죽고, 더 이상 연락이 없어요. 울산에 제수씨 오빠가 살고 있어서, 그리 이사 갔다는 얘기만 전해 들었습니다. 속내까지는 모르겠지만, 부산 지역에서는 소문이 다 나 있었으니까, 다른 지역에 가서 전혀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고 싶었겠지요.”

 

“21년 된 노동자의 임금이 105만 원, 세금 떼면 80만 원, 그마저도 가압류로 12만 원. 129일을 크레인에 매달려 절규해도, 늙은 노동자들이 88일을 애원해도, 청와대·노동부·국회의원 누구 하나 코빼기 내미는 놈이 없었습니다. 동지 여러분, 죄송합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민주노조하지 말 걸 그랬습니다. (중략) 비자금으로, 탈세로 감방을 살고도, 징계는커녕 여전히 회장님인 그들이 보기에, 동료들 정리해고 막겠다고 직장에 맞서다 해고된 노동자가 징계 철회를 주장하는 게 얼마나 가소로웠겠습니까? 100만 원 주던 노동자 잘라내면 70만 원만 줘도 하청으로 줄줄이 들어오는 게 얼마나 신통했겠습니까? 철의 노동자를 외치며 수백 명이 달려들다가도 고작 해야 석 달만 버티면 한결 순해져서 다시 그들 품으로 돌아오는데, 그게 또 얼마나 같잖았겠습니까? ‘조선강국’을 위해 한 해 수십 명의 노동자가 골반 압착으로, 두부 협착으로 죽어가는 나라. (중략) 전 자본주의가 정말 싫습니다. 이제 정말 소름 끼치게 무섭습니다.” [각주:2] 

 

그는 기자가 내민 <소금꽃나무>를 한참 손에서 내려놓지 못했다.



“이 추모사… 아, 생각나네요. 내내 울면서 읽더라고요. 가슴이 참 찡하대요.”

그는 기자가 내민 <소금꽃나무>를 펼쳐 들고 한참을 손에서 내려놓지 못했다. 2003년의 첫 추모사를 읽고, 2006년 경남 양산에서 열린 동생의 3주기 추모사까지 읽었지만, 그는 앞과 뒤를 뒤적이고 표지를 들여다보고 283쪽을 한 장 한 장 세듯이 책을 둘러봤다. “참, 이거 읽어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바뀐 게 없네요. 똑같네요. 이게 다 남의 일이 아닌데, 많은 사람들은 대체로 나와는 상관없다 그렇게 생각하겠죠. 사람이라는 게 참 망각의 동물이라서, 그 순간만 지나면 내 일이 아니니까, 다 이자뿌리고, 당사자 몇 명만 기억하고 있으니까요.”


소주잔을 대여섯 번쯤 기울였을까. 막 썬 회가 아직 몇 점 남았는데, 그가 가방을 둘러멨다. “9년이 지났는데 잊지 않고 멀리 시골까지 찾아와줘서 고마워요”라며 악수를 청하고 어둠 속으로 총총 사라졌다. 그는, 2002년 한진중공업에서 회사 쪽이 일방적으로 임금을 동결하고 650명의 노동자를 해고하면서 시작한 파업에서, 노조 간부에 대한 사 쪽의 손해배상 가압류와 정리해고에 항의해 2003년 6월 11일부터 10월 17일까지 129일 동안 35m 높이의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에서 홀로 고공농성을 벌이다 끝내 목을 매 숨진, 고 김주익(사진·당시 40살) 전 금속노조 한진중공업 지회장의 형이다.



 *<나-들> 2호(2012년 12월호)에 실렸음.


*관련 글 : 한진중공업 25년 타임머신

 

  1. MBC 라디오 <정은임의 FM 영화음악>. 정은임 아나운서는 이듬해인 2004년 7월 22일 한강대교 남단에서 차량이 전복되는 교통사고를 당해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8월 4일 숨을 거뒀다. [본문으로]
  2. 2003년 10월 22일 부산역 광장에서 열린 ‘노동 탄압 규탄 전국대회’에서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이 읽은 김주익 열사 추모사. 출처 <소금꽃나무>. [본문으로]
댓글
댓글쓰기 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