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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업언론인 시국선언문’이 신문에 실렸다. 세월호 참사 발생 38일째 되는 날이었다. 63개 언론사 5592명의 언론인이 이름을 올렸다. 유례없는 이 선언문은 그러나, 세월호 참사로 인해 드러난 한국 언론의 문제점을 제대로 짚지 못했다.

우선 “‘전원 구조’라는 언론 역사상 최악의 대형 오보”라는 토로에 나는 동의할 수 없다. ‘전원 구조’ 보도가 오보였고, 이 오보가 많은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렸다는 점은 분명하다. 문제는 언론이 “취재를 통한 사실 확인보다 정부의 발표를 받아쓰기에 급급”해서 오보가 났다고 보는 시각이다. 재난이 발생하면 언론은 일단 정부가 발표하는 정보를 신뢰하고 이를 기본 텍스트로 삼아야 한다. 재난에 따른 구조가 우선인 상황에서 언론이 현장을 헤집고 다니며 전원 구조가 됐는지 구조자가 몇 명인지 일일이 확인하면 현장은 혼란에 빠진다. 이로 인한 2차 피해도 발생한다.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때 수많은 기자들이 붕괴 현장을 헤집고 다니는 바람에 가이드라인이 무너지고, 구조는 더 어려워진 참혹한 경험이 있었다. 그때로 돌아가자는 말인가.

‘전원 구조’ 오보의 1차 책임은 충격에 휩싸인 대중의 겁박에 떠밀려 현장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카더라’식으로 발표한 해경과 단원고, 경기도교육청에 있다. 정부 기관은 재난이 발생했을 때 사망자나 구조자 수 등을 최대한 보수적으로 발표해야 한다. 정부 기관이 앞서 나가면 언론 역시 부정확한 정보로 앞서 나간다. 그렇게 되면 이번 세월호 참사처럼 서로 간의 신뢰가 무너지고, 시스템에 대한 신뢰도 붕괴한다. 역시 사람들의 겁박에 떠밀려 그저 고개만 숙이는 포즈로 상황을 빨리 무마하려 한 시국선언문은 정부의 이런 문제점들을 가린다. ‘언론 역사상 최악의 대형 오보’라는 레토릭에 동의할 수 없는 까닭이다.

물론 세월호 참사에서 정부는 수많은 거짓말을 했다. 그래서 시민들은 언론이 강력하게 정부를 견제해 정부가 구조에 모든 것을 투입할 수 있도록 압박하길 바랐다. 일부 언론인들도 이 바람에 편승해 설익은 ‘팩트’로 비판을 쏟아냈다. 재난 상황에서 언론이 실시간으로 정부를 견제하면 구조 상황에서 더 좋은 성과가 나오리라는 믿음은 판타지다. 언론은 이미 발생한 문제를 즉자적으로 해결하지 못한다. 그래서도 안 된다. 참사는 어떤 사회의 시스템 내부에서 오랫동안 문제가 곪아왔기 때문에 발생한다. 그런 문제가 압박으로 섣불리 봉합되면 문제의 근원은 뿌리 뽑히지 않는다. 언론의 책무는, 이 참사의 구조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꼼꼼히 기록하고 분석해서 다시는 참사가 재발하지 않도록 잊지 않고 반복해서 지적하는 일이다.

언론은 “슬픔에 바진 유가족들과 실종자 가족들에게 위로”도 될 수 없다. 언론이 어떻게 위로의 도구가 될 수 있을까. 사람들의 바람을 전하는 건 뉴스가 아니다. 차라리 “슬픔과 절망에 빠져 있는 유가족들과 실종자 가족들에게 무분별하게 접촉해 2차 피해를 가했다. 앞으로 유가족의 슬픔을 미학화하는 취재와 보도는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건 어땠을까. “대한민국 언론은 죽었다”는 식으로 언론이 모두 잘못했다는 식의 일반화도 문제다. 이런 포즈는 어떤 언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구체적인 책임 소재를 흐린다.

지금 이 시점에서 언론인들이 정작 해야 할 일은 어설픈 사과의 포즈가 아니다. 이번 세월호 참사를 통해 쏟아졌던 언론의 보도가 어땠는지 분류하고, 장단을 꼼꼼하게 짚어서 그 안에서 구체적인 문제와 총체적인 문제를 정확히 구분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그런 작업을 거친다면, 한국 언론의 문제는 ‘전원 구조’ 오보 따위가 아니라 세월호 참사를 낳은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들여다보지 않은 지점에 닿아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더 이상 개인을 지켜주지 않고 시장에 개인을 내맡긴 국가, 인명 구조마저 매매와 거래의 대상으로 전락시킨 시스템의 물화, 능력주의 판타지의 뒤안길에서 출세주의자들만 가득한 관료주의의 착종과 같은 시스템의 문제는 외면한 채 재난을 스펙타클화하는 데 급급했던 언론의 모습 역시 외설적으로 드러날 것이다. 성찰은 그런 곳에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방송대신문에 실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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