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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창극과 정성근을 통해 한국 사회의 비판 영역에서 가장 자유롭던 언론인들의 치부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세월호 참사에서 언론에 대한 비판 -그것이 비록 다분히 소비자 중심주의적 시각을 담고 있다 하더라도- 역시 기존의 어떤 참사나 사고 때보다 수위가 높았다.

 

이 자리에서 언론인의 도덕적 반성 따위를 바랄 생각은 없다. 게다가 문제는 언론인의 도덕성 같은 것이 아니다. 문창극과 정성근같은 이의 출현은 언론 시스템의 모순에 대한 근원적 성찰 속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그들은 갑자기 툭 튀어나온 사람들이 아니라 지극히 ‘상식적인’ 언론인 주변에 있는 일상적 인물이다.

 

그런 관점에서 무엇보다 언론인의 취재 윤리부터 근원적으로 되짚어야 한다. 기자가 취재하는 팩트란 무엇인지, 반대로 그 팩트를 수집하는 취재란 무엇인지, 객관화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현장과 동화되는 기자와 현장과 거리 두는 기자의 주체성은 어떻게 조화시켜야 하는지, 중립과 객관주의의 탈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현장과 직면하고 그것을 전달하는 것 그 자체로 저널리즘의 역할을 다 했다 생각하는 태도와 체계는 어떤 왜곡을 부르는지, 시스템 내부의 기관 발표와 현장의 확인 취재는 어떻게 조화시켜야 할지 등등. 사실은 세월호 참사 이전부터 사회가 끊임없이 신호를 보내왔던 이 체계의 문제점이 세월호 참사를 통해 극대화됐다고 할 수 있겠다. ‘가나다’부터 체계를 다시 세워야 한다.

 

나아가 언론인의 과도한 시스템 동화도 성찰해야 할 문제다. 시스템 동화란, 언론인이 한 사회의 시스템을 이끄는 핵심 주체로 스스로를 투사하는 행위다. 예를 들어, 교육부 기자는 한국 교육의 모든 문제를 전 국가적 교육 수준의 차원에서 고민한다. 경제부 기자 역시 한국 경제의 모든 문제에 대해 국가 경제를 움직이는 일원의 자격으로 기사를 쓴다. 이럴 때 모든 예외성은 시스템의 작동에 부차적인 문제로 취급되고 외면당한다. 언론인은 누구보다 이 예외성에 주목해야 하지만, 스스로 시스템 내부자의 논리를 들먹이며 예외성을 타자화하고 폭력적으로 짓밟는다.

 

예외성을 타자화하고 짓밟을 때 가장 쉽게 등장하는 언어가 바로 ‘상식’ 혹은 ‘대중의 인식’이다. 예외성은 그 ‘상식’에 어긋나는 존재이고, ‘대중의 인식’과도 괴리되어 있는 이들이며, 시스템이 나아가는 데 있어 걸림돌일 뿐이다. 그러면서 언론인은 ‘5천만 분의 1’에 불과함에도 마치 ‘1 of 5천만’인 것처럼 행동하고 판단한다. 국가 역시 언론인을 시스템의 준 일원으로 취급하며 언론인의 이런 과도한 동화를 십분 활용해 기득권의 재생산을 추동한다.

 

문제는 그렇다고 해서 언론인이 완전히 시스템 외부에 존재해야 하느냐, 라고 생각한다면 그것 역시 확실하게 답할 수 없다. 언론은 분명 사적 자본의 영역에 속하지만, 언론이 하는 일과 해야 할 일은 공적 영역에 속한다. 이 존재론적 모순 속에 언론인이 처한 경계인의 비극이 숨어 있다. 언론인은 이 사이에서 끊임없이 줄타기하며 스스로를 채찍질해야 한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언론인은 경계인의 지위를 참지 못하고 시스템 내부의 논리를 되뇌는 데 주력한다. 그것이 보다 안전하고 다수의 지지를 받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 경계에 대한 성찰 없이 언론의 변화를 강조하는 대표적인 예가 ‘공급자 마인드를 버리고 수익자(소비자) 중심으로 사고하라’는 명제의 끊임없는 강조다. ‘공급자 마인드’는 앞에서 얘기했던 ‘언론인과 시스템의 과도한 동화’를 비판할 때도 거론되고, ‘언론인 스스로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는 콘텐츠’를 꼬집을 때도 등장한다. 이때 두 가지는 매우 낡은 것으로 취급된다. 그런데 과연 이 두 가지는 낡은 것인가? ‘언론인과 시스템의 과도한 동화’는 나도 역시 앞에서 문제라고 말했지만, 역시 함께 얘기했듯 이는 완전히 버려야 하는 낡은 가치가 아니다. 언론인은 경계에 서 있을 뿐, 시스템을 완전히 외면하고 버려선 안 된다. 마찬가지로 ‘언론인 스스로 보여주고 싶은 것을 보여주는’ 것은 왜 문제가 되는가. 사실 ‘언론인 스스로 보여주고 싶은 것을 보여준’ 것이 아니라, 언론이 과도하게 많은 것을 대표하려 했던 것 혹은 언론이 주체성을 상실하고 객관주의로 모든 것을 포장하려 했던 것이 문제 아니었던가.

 

그런 관점에서 ‘수익자(소비자) 중심주의’는 함정을 가지고 있다. ‘수익자 중심주의’의 문제는 그곳에 주체가 없다는 점이다. 그곳엔 오롯이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뉴스로 요구하는 소비자, 모호한 가면을 쓰고 모든 것을 대표하는 듯 포장하는 공급자만 존재할 뿐이다. 언론이 ‘수익자 중심주의’로 나아갈 때, 언론의 모순은 또다시 과대표의 문제로 환원될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나의 것을 얼마나 정교하게 보여주느냐다. 다시 말해, 관점이고 가치 지향이다. 그것을 위해 다시 쌓아야 하는 것은 팩트와 취재를 어떻게 개념화할 것인가, 에 대한 기초적이고 근원적인 고민이 될 것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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