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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십 부재의 시대가 '명량'의 흥행 돌풍을 낳았다는 분석은 온전한 진실을 담고 있지 않다. 그보다는 영웅에 대한 조력자로서 중장년 세대의 정체성이 투사돼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CJ엔터테인먼트 제공


몇 가지 질문을 해보자. 영화 <명량>은 정말 다수 언론과 평론가들이 말하는 대로 ‘리더십 부재의 시대‘에 확고한 리더십을 보여준 이순신에 대한 열망 때문에 흥행하고 있는 것인가. 개봉 12일 만이라는 역대 최단 기간 1000만 관객 돌파라는 기록과 다시 부는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 열풍, 늘어나고 있다는 <현충사> 참배객들을 보면 언뜻 그렇게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어떤 이는 정작 영화 <명량> 속에 “이순신의 리더로서의 딜레마를 질문하는 대목이 있던가… 영화 안에 백성을 위한 영웅의 면모와 진정한 리더로서의 모습은 존재하지 않는다”[각주:1]고 쓰고 있다. 분명 <명량> 속 이순신에게 새로운 어떤 '리더십의 전형'을 발견해내기는 쉽지 않다. 모든 장수들이 꽁무니를 빼고 있을 때 홀로 앞장 서 싸운 것이 리더십이라면, 모든 장수들을 함께 싸우게 만들지 못한 리더십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사실 영화가 리더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지 여부는 크게 중요한 것 같지 않다. 인용한 블로그 글의 필자도 얘기하고 있듯, 관객들이 원하는 것은 이미 머릿속에 ‘영웅’의 이미지로 자리 잡고 있는 ‘이순신’이라는 역사 속 실존 인물의 재확인이다. ‘이순신의 확고한 리더십이 그리워 <명량>이 흥행했다’는 명제가 온전한 진실을 담고 있지 못한 까닭이다.

‘리더십 부재 시대’ 탓에 이순신 열망?

그렇다면 <명량>은 평화헌법 개정으로 전쟁국가화를 추진하고 있는 일본에 반발하는 ‘국뽕(국가와 히로뽕을 합친 말로 애국주의를 조롱하는 속어)’ 때문에 흥행하고 있는 것일까. 영화에는 이순신의 적이 ‘일본 수군’이라는 역사적 사실 관계 외에는 어디에도 그런 장치가 녹아있지 않다. 특히 <명량>에서의 이순신은 국가를 위해 앞장 서 싸우는 장군이 아니다. 도입부부터 '국가'로 대변되는 왕에게 끊임없이 견제당하며 마침내 버림받는 개인으로 그려진다. <칼의 노래> 이후 부각되기 시작한 이미지다. 그래서 '조선'이나 '한국'이라는 민족국가가 이순신이라는 개인과 이미지가 포개어지지 않는다. 이순신의 적은 ‘일본 수군’이기도 하지만 넓게 봤을 때 ‘위에서 견제하는 국가 권력(선조)’과 ‘아래에서 통제되지 않는 국가 시스템(장수들)’이기도 하다.

세 번째 질문. 영화 <명량>의 이순신은 박정희의 딸이 대통령이 된 시대에 복고적으로 회고된 1970년대 ‘성웅 이순신’의 이미지로 인기를 끌고 있는가. 이 질문 역시 그렇지 않다고 답할 수밖에 없다. 만약 1970년대처럼 ‘성웅’으로 추앙됐던 이순신을 재현하려 했다면, 굳이 ‘명량대첩’을 시리즈-김한민 감독은 이순신의 3대 대첩으로 모두 영화화하고 싶다고 했고, <명량> 말미에 한산대첩 장면을 슬쩍 끼워넣어서 속편을 예고했다- 첫 작품으로 제작할 필요가 없었다. 이순신의 3대 대첩 중 역사적으로 첫 번째 순서이자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도 꼽히는 ‘한산대첩’을 우선순위로 제작하는 것이 '성웅'적 면모를 보이는데 더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명량대첩’에만 집중했다. ‘명량대첩’ 당시의 이순신이 ‘국가로부터 버림받은 개인’으로서의 이순신을 가장 극적으로 포착해낼 수 있는 영화이고, 이런 이순신은 2000년대 초반 열풍을 일으켰던 <칼의 노래>에서의 이순신 이미지를 고스란히 안고 갈 수 있다. 그러니 1970년대 '성웅 이순신'과 합일한다고 볼 수 없다. 

영화는 흥행 신기록을 이어가는데 정작 신드롬이나 담론 현상은 찾아보기 힘들다. 중장년 관객들은 트위터나 페이스북보다는 주로 카카오톡 등 폐쇄적인 SNS로 자기 이야기를 퍼 나른다. 서울 광화문광장의 이순신 장군 동상.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마지막으로 많은 이들이 쓰고 있는 것처럼 <명량>에 대해서는 정말 관객 수의 폭발적 증가에 비례하는 ‘신드롬 현상’이 부재하고, 영화를 둘러싼 담론 역시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는가. 언뜻 그런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이 관점은 몇 가지 지점을 놓치고 있다. 우선 스크린을 지배하고 있는 씨제이(CJ)의 폭력적 독점 체제에 대한 피로도가 높아졌다는 점이다. <명량>은 지난 3일 전국 1596개 관에 걸렸다. 한국의 전체 스크린 가운데 39.8%에 이르는 비율이다. 사람들은 <명량>을 소비하긴 하지만, <명량>에 대해 이야기하기보다 먼저 CJ의 스크린 독점이 선택권을 앗아갔다는 점을 토로한다.

흥행 요인은 반일도, 70년대 복고도 아니다

이 영화가 1000만 관객을 노리기 위해 타깃으로 정한 관객과 지배적 소비층이 40대 이상 중장년층이라는 점도 한몫했다. CJ CGV가 <명량> 개봉일인 지난달 30일부터 지난 7일까지 9일 동안의 예매 관객을 분석한 결과, 40대(31.1%)가 영화의 주요 소비층인 20대(30.7%)와 30대(26.8%)를 다소 많았다. 주로 20~30대가 초반 흥행을 주도하고 중장년층 관객이 더해지면서 흥행 열풍이 부는 보통의 영화들과 달리 <명량>은 초반부터 중장년층이 2030을 능가하는 수준의 적극 소비층으로 등장했다. 그런데 이들은 트위터나 페이스북보다는 주로 카카오톡 등 폐쇄적인 SNS로 자기 이야기를 퍼 나른다. ‘평론가들이 볼 수 없는 곳에서 신드롬이 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청년층에게 이 영화가 딱히 할 말이 없는 영화라는 점도 한 몫 했다. 20대와 30대에게 영화는 가장 널리 소비되고 있는 문화생활이다. 이 세대의 다수는 주말이 되면 다분히 기계적으로 영화를 본다. 그런데 어딜 가나 <명량>이 걸려 있으니, 사실 볼 수 있는 영화도 <명량>이 대부분이다. 게다가 지금의 청년들이 비장함으로 가득 찬 이순신 캐릭터를 보고 할 수 있는 말이 뭐가 있을까. 아니, 이 영화가 어릴 때부터 반복적으로 봐온 수많은 이순신 캐릭터와 다른 입체성을 제시하기라도 했던가. 청년층이 대체로 확인하고 싶은 것은 <트랜스포머>나 <퍼시픽림>처럼 과연 2014년의 한국 영화가 그 ’화려한‘ 12 대 300척의 전쟁신을 어떻게 연출해냈을까, 정도의 호기심 아닐까.

이런 대답으로 가는 하나의 단초를 보기 위해 영화 <명량>의 전투 장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영화>는 전투 장면 이전 300여척에 이르는 일본 수군의 규모 앞에서 죽음의 공포에 짓눌려 통제되지 않는 장병의 모습을 그린다. 선봉에 세울 ‘구선(거북선)’마저 잃게 되는 절망적인 상황도 보여준다. 이 장면에선 죽은 장수들을 그리며 절규하고 불타는 거북선 앞에서 오열하면서도 탈영병의 목을 단칼에 베는 냉정한 리더로서의 이순신이라는 캐릭터가 약간 입체화된 것 외에 별달리 눈에 띄는 캐릭터가 없다.

그러나 전투 장면에 이르러 <명량>은, 이전의 이순신 영화나 드라마와 달리 전투가 단순히 장군 1명의 리더십에 의해 수행되는 것이 아님을 드러내려 무던히 애쓴다. 손바닥이 까져서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노를 놓지 않는 격군들의 꿈틀거리는 팔 근육, 살생을 하지 않는다는 불가의 계율도 버리고 전쟁터에서 낫과 창을 든 승병들, 자기 한 몸을 버려서라도 ‘장군을 지키겠다’는 신념으로 끝까지 자신의 소임을 마치고 숨진 정탐꾼 임준영(진구), 폭탄을 실은 배가 장군의 배를 향하자 치맛자락과 도포 자락을 흔들어 다른 장수의 배에 그 소식을 알린 해안 백성들, 장군의 배가 울돌목 회오리로 잠기려 하자 어선을 타고 들어와 판옥선을 건져내는 어민들. 이런 장면들은 비록 역사적 허구를 담고 있다고 해도, 이전까지의 이순신 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세하게 묘사되지 않았던 각각의 역사 속 주체들이다.

이순신 리더십 부각하는 데 필요한 민초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역사 속 존재했을 저런 주체들을 영화 안에서도 주체로 배치했느냐, 라고 묻는다면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다. 어찌 보면 저들은 차라리 영화가 이순신이라는 인물을 부각시키기 위한 장치로 배치됐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영화는 전투가 변곡점을 그리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지루할 정도로 반복적으로 이순신의 명령을 고대하는 장병들의 얼굴을 슬로우모션으로 잡고 클로즈업한다. 저들 모두가 역사 속 주체라기보다는 이순신이라는 탁월한 영웅의 명령 아래 움직이는 객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영화는 끊임없이 각인시킨다. 그런 장면은 이순신의 선전을 빌며 두손을 비비며 기도하고 승전 후 일제히 고마워하며 큰절을 하는 백성들의 장면에서도 어김없이 증명된다. 영웅적 개인을 호명하는 일종의 집단적 주술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현실로 돌아와 2014년 8월의 한국 사회는 어떤가. 올 봄 한국인들은 세월호 참사로 한국 사회의 시스템이 총체적으로 몰락하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목도했다. 곳곳에서 국가 시스템을 재구성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이대로 있으면 또 다른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다는 지적도 있다. 방송과 신문 사회면은 ‘윤 일병 집단구타 사망사건’이나 ‘포천 빌라 고무통 살인사건’, ‘현직 시의원 살인 교사 의혹 사건’ 등과 같은 각종 세기말적 잔혹극이 펼쳐지고 있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함께 이룩한‘ 한국 사회를 건설한 주역들이면서 세대적으로 가장 많은 인원으로 구성된 40대와 50대에 있어 이런 일련의 총체적 몰락은 아픔과 절망이기도 했지만 일종의 수치심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 사회를 근원적으로 재구성해야 한다는 성찰은 저들에게 깊이 각인되지 않았다. 그것은 사회 담론이 저들에게 각인시키지 못한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런 근원적 성찰을 저들이 외면한 결과이기도 하다. 세월호 참사로 한국 사회는 아픔을 공유했을지는 몰라도, 시스템을 전환해야 한다는 합의는 이뤄내지 못했다. 여전히 그런 목소리를 내고 있는 사람들은 단식중인 세월호 유가족들뿐이다.

세월호 등 세기말적 잔혹극에서 느끼는 수치심

영화 <명량>의 흥행 열풍은 한국 사회의 그런 현재를 상징하는 것 아닐까. 한국 사회 다수의 중장년층들에게 한국 사회의 건설이란, 영웅적 개인들을 자신들보다 윗자리에 배치하고 자신들은 영웅들의 지도에 따라 각각의 자리에서 그들을 조력해 만든 역사로 인식되어 있지 않은가. 세월호 참사로 드러난 한국 사회의 총체적 붕괴의 뒤안길에서 부정당한 자신들의 역사와 무너진 세대적 자존감을 ‘그래도 당신들이 틀리지 않았다’며 위무해주는 일종의 마스터베이션 장치로서 <명량>은 이미 충분한 영화가 아닌가. <명량>의 상영관에 유례없이 많은 가족 관람객들이 모이고, 한 트위터에선 “아버지가 영화를 보자고 하는 말은 20년 만에 처음 듣는 것 같다”는 말까지 나오는 것은 괜한 현상이 아니다. 영화 말미에 등장하는 “우리가 이렇게 고생한 걸 후손들이 알까?”, “모르면 호로자식들이지~”라는 작위적 대사는 그런 현상을 노골적으로 추동한다. “이순신과 그 함대는 ’국민의 예비군‘으로서 ’유사시‘ 언제든 다시 동원 호출받을 것”[각주:2]이라는 지적처럼, 이번에도 그 호출의 일환으로 ’변함없는 영웅‘ 캐릭터로 재소환된 이순신과 그의 함대가 중장년층을 다독이고 있는 것 아닐까.

이런 생각에 이르고 보면, 진중권 동양대 교수가 <명량>을 보고 불편함을 다분히 담은 목소리로 “영화 ‘명량’은 솔직히 졸작이죠. 흥행은 영화의 인기라기보다 이순신 장군의 인기로 해석해야 할 듯… ‘활’은 참 괜찮았는데”라고 평가한 까닭을 짐작할 수 있다. 진 교수가 저서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나 각종 기고 글을 통해 그렇게나 계몽하려 했던 '한국 사회 산업화의 주체는 박정희가 아니라 바로 당신들이었다’, ‘영웅적 개인의 역사가 아니라 근면 성실했던 인민의 힘이었다’이라는 명제가 끝내 통용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명량>의 흥행 열풍으로 일면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붕괴된 시스템을 직시하지 않는다면…

이는 적어도 40대 이상 세대에게는 ‘당연한’ 현상이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에 따르면, 1987년 체제는 ‘민주적 자본주의’에 대한 진보와 보수의 합의체다.[각주:3] 이 합의체 아래 인민들은 정치적 주체가 아니라 보수적 양당에 정치를 맡긴 채 ‘제대로 된 자본주의’를 작동시켜 달라고 요구하는 자유주의적 개인에 다름 아니다. 특히 한국 사회의 산업화를 건설한 50대 이상 세대와 민주화를 이뤄낸 40대는 이전까지 서로 대립되는 세대로 인식됐지만, 최근에는 1987년 체제를 함께 이끌면서 자유주의적 개인으로 만나 더 이상 큰 차이를 가지지 않게 됐다. 그러니 50대의 자식들인 20대들뿐만 아니라, 40대의 자식들인 10대들에게도 <명량>은 다분히 교육적인 텍스트로 활용될 수 있는 것이다. 자유주의적 개인들에게는 언제나 그들의 정치를 대신해 줄 '영웅'이 필요하다. 그들에게 정치는 '능력있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인민의 힘이 역사를 건설했다'는 명제는 자유주의 체제에서는 형성될 수 없는 것 아닐까. 그렇기에 <명량>의 이야기가 그들의 생각과 정확하게 부합한 것 아닐까. 그런데 이런 와중에도 한국 사회의 진보 엘리트는 여전히 그 ‘자본주의’가 세월호 참사와 같은 시스템의 붕괴를 낳았다는 사실을 직시하려 하지 않는다. 영화의 질적 완성도와 상관없는 <명량> 신드롬이 얘기하는 것은 그런 것들이었다.


*<한겨레>에 실렸음

 

  1. ‘<명량>. 거기 없는 것을 말하지 말라’ http://blog.naver.com/satan_tango/220086365397 [본문으로]
  2. 천정환 성균관대 교수 페이스북 글 https://www.facebook.com/junghwan.cheon/posts/739186726137227 [본문으로]
  3. 이택광, <박근혜는 무엇의 이름인가>, 시대의 창, 2014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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