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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참 팍팍합니다.우리는 점점 나이가 들수록 내가 하고싶어하고 내가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일보다,남이 내게 해주길 바라는 일을 해야하는 비중이 더 커지는 삶을 살게 되는 것 같습니다.그와 비례해 우리가 점점 더 의존의 비중을 키워가는 건 바로 ‘관계의 힘’인 것 같습니다.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면서도,그나마 콱 막힌 가슴을 주물러주는 주변 사람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삶을 버텨나가는 힘을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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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체 스포츠에서 가장 짜릿한 순간은 하나의 플레이를 성공시킨 뒤 그걸 인정해주는 동료와 손바닥을 마주치거나 주먹을 툭 치는 것으로 화이팅할 때입니다.팀 안에 내가 존재함을 느끼게 되는 순간이죠.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우생순)’은 스포츠 영화입니다.처음엔 반목하고 갈등하던 팀원들이 시간이 흐를수록 서로에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되고 결국 그 믿음을 바탕으로 예상치 못한 결과를 가져오는,어찌보면 뻔한 스포츠 영화의 스토리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습니다.평생 자신이 운동해온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새로운 시도를 하려는 젊은 감독과 갈등하지만 결국 결정적인 순간에 제몫을 해내는 '노장'들의 이야기가 다뤄진 것도 별반 특이할 건 없는 플롯입니다.

하지만 우생순은 다릅니다.우생순의 주인공들은 우리 주위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아줌마들’입니다.세계 최고의 핸드볼 스타지만 어리숙하게 사기당해 빚쟁이에 쫓겨다니는 남편 탓에 비정규직 마트점원 노동을 하며 육아를 홀로 책임지는 아줌마 한미숙(문소리), 역시 세계적인 선수로 일본팀의 존경받는 감독이 됐지만 이혼 경력을 구실삼아 국가대표 감독직을 박탈당하는 아줌마 김혜경(김정은),둘과는 달리 애정이 넘치는 남편과 마냥 행복해하지만 젊은 시절 경기를 뛰기위해 생리주기를 조절하는 호르몬제를 복용했다 불임이 된 아픔을 지낸 아줌마 송정란(김지영).

하지만 이들은 남들이 보기에도 참 퍽퍽하다 싶은 삶 속에서 그저 주저앉아 울고있지만은 않습니다.핸드볼큰잔치에서 우승한 뒤 열린 회식자리에서 팀이 해체되고 마트에서 일해야한다는 소식을 듣고도 “직원이면 정직원이겠죠?계약직 아니겠죠?”라고 묻는 미숙,감독직에서 하루 아침에 선수 자리로 내몰린 뒤에도 “그런 얼굴로 보지 마.여기서 물러날 거면 애초에 돌아오지도 않았어.이제 자존심이고 뭐고 다 버렸다,나.”라고 말하는 혜경의 모습에서 우리는 삶의 고난을 꿋꿋하게 이겨가는 아줌마들의 힘을 봅니다.

게다가 우생순은 관계를 가꿔가는 데 있어 여자들이 남자보다 훨씬 더 우수함을 보여주기도 합니다.오자마자 팀원들의 훈련 방식 따윈 들어보려 하지 않고 '유럽식'이라며 권위로 자신의 방식을 밀어붙이는 감독 안승필(엄태웅)에게서 우리는 남자들이 얼마나 관계의 형성과 유지에 서투른 지 볼 수 있습니다.그는 자신의 팀원이 생리 주기임에도 단지 엔트리에서 밀려나지 않기위해 이를 악물고 경기를 뛰었던 건 고려조차 않고,경기에 졌다는 사실에 화만 내는 단순함을 보여줍니다."전임 감독은 생일이며 집안 대소사까지 다 챙겨줬다.",“감독은 선수 사정을 이해해주고 누구보다 아껴줘야하는 것”이라는 미숙의 충고에도 “내가 왜 그런 걸 챙겨야하는데?”라며 고깝게 되묻기도 하죠.남자는 관계를 맺음에 있어 자주 상대와 나 사이를 수직적 관계로 생각하는 실수를 범합니다.누구를 만나든 저 사람을 나보다 위에 둘 것인가,아래에 둘 것인가부터 따지죠.관계의 성질이 꼭 지배와 종속으로만 대변되지 않을진데,안승필은 그런 남자들의 관계 습속을 대변하는 캐릭터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줌마들은 다릅니다.단지 같은 여자라서 느끼는 게 아니라 동료의 컨디션이 좋지 않아 보이면 몸에 뭔가 문제가 있음을 알아챕니다. “너 생리인 거 왜 말 안했어.”라고 묻는 질문에는 그런 배려가 담겨있습니다.미숙이 무단이탈하자 엔트리에서 제외하겠다는 승필에게 산악달리기 시합을 제안하고 발목을 삐었어도 끝까지 산길을 완주해 결국 승필의 두 손을 들게 만드는 혜경의 모습에서 우리는 자신을 어느 정도 희생하면서 전체적인 관계를 보살필 줄 아는 여성들의 힘을 보게 됩니다.결국 우리가 보통의 스포츠 영화와 크게 다를 바없는 스토리 라인을 가진 우생순을 보고 눈물을 흘리고 열광하는 이유는, 극적인 경기 장면과 함께 그 극적 순간을 이끌어낸 여성들이 가진 '관계의 힘'을 그려낸 임순례 감독의 디테일한 묘사력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우생순을 보고 나오면서 떠오른 영화가 하나 있었습니다.덴젤 워싱턴이 강력한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고등학교 미식축구 팀을 전국 2위로 이끌며 흑백 인종 갈등을 무마하는 모습을 그린 스포츠 영화 ‘리멤버 타이탄’이죠.역시 단순한 스포츠에서의 승리만 담은 게 아니라 그 뒤에 철학을 감추고 있어서 진한 감동을 줬던 영화였습니다.하지만 리멤버 타이탄은 강력한 지배력을 구사해 조직을 이끈 남자의 영화,우생순은 관계의 힘으로 팀을 이끌어간 여러 명의 여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여자의 영화라는 점이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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