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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그람시


다원화한 사회에서 다양한 정체성의 대항 헤게모니화는 어찌 보면 필연이다. 세상은 더 이상 ‘노동자 계급’만의 정체성으로 전복할 수 있을 정도로 일원화한 세계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세력은 다양한 정체성을 바탕으로 분산되어 있다. 노동 운동 외에 여성 등과 같은 성적 소수자 운동, 이주노동자와 인종 차별 반대 운동, 녹색 운동, 장애인 운동 등 다양한 영역에서 각자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는 고정되지 않은 이들이 각자의 불평등 관계를 타파하기 위해 투쟁하면서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과정, 그것이 바로 대항 헤게모니를 구축하는 과정이다.

여기서 문제는 이 정체성들 사이의 관계는 과연 수평적이어야 하는 것인가, 이다. 정체성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불평등을 타파하는 것만으로 해방은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복수의 정체성을 가진 주체도 존재한다. 하나의 정체성에서 불평등을 타파해도, 다른 정체성에선 여전히 불평등 관계에 종속되어 있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다시 이들 정체성 중에서 보편성의 중심이 될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중심이 될 수 있는 보편성은 어떤 것일까. 그런 정체성은 과연 존재하는 것인가.

여기서 어떤 이는 노동 운동이나 페미니즘 운동, 성소수자 운동과 인종 차별 반대운동, 녹색 운동이나 장애인 운동 그 어떤 것도 보편성을 가질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계급은? 계급은 과연 보편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인가. 여기서 이슈는 불평등 구조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하층 계급이 홀로 중간계급과 상층계급을 타파할 수 있을 것인가, 이다. 그러면 하층계급은 보편성을 확보하기 어려운 것 아닌가, 그렇다면 중간계급과 느슨하게나마 연대해 함께 나서야하는 것 아닐까. ‘칙한 분노’ 혹은 ‘허위 분노’로 분노 아닌 분노를 하는 냉소 집단인 오늘날의 중간계급은 과연 하층 계급과 같은 정체성을 공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최근 모든 사안을 젠더로 환원하고 있는 어떤 이들을 보면서 오늘은 종일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결론이 쉽게 나지 않을 것 같다.


라는 글을 페이스북에 남겼는데, 임윤희 선배가 이런 댓글을 남겨주셔서 갈무리. 페북은 검색이 안 되니까;


"개인적으로 아주 관심이 많은 주제입니다. 사실 이 논의의 시발은 90년대의, 이미 사라진 용어인 '부문계열운동'이 시초일 겁니다. 그리고 90년대 후반까지 나름의 영역에서 마이너리티 운동들이 성장세를 만들어냈는데, 말씀하신 통합적 관점에서의 논의들은 거의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사실 당시에는 이론가들의 무책임 혹은 무능력이라고 봤어요. 당시는 그나마 이론가들이 발언하고 설 자리가 있었던 시대니까요.

이주노동 운동을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계속 생각했던 구호 중 하나는 "We are one!"이란 구호였어요. 한국 노동자와 이주 노동자가 하나인지에 대해 온갖 의문이 다 들지만, 그럼에도 그 one의 정체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되는 절박한 질문이 담긴 구호였달까요. "약자 마음은 약자가 안다"는 나이브한 동일성의 논리가 마이너리티 판에서 너무 오래 통용된 부분도 없지 않아 이런 고민에 장애가 되었을 듯하고요.

이 외에도 해보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다음 기회를 노립니다. ㅎㅎㅎ

재훈씨 고민의 맥락을 따라가자면, 90년대 마이너리티 운동을 포섭하고 있었던 문화운동이 '압구정'을 타격 지점으로 내세웠던 것도 성패와 무관하게 나름 계산된 전략이었지요. 이건 아마도 87년 승리의 에너지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싶고요. 그리고 90년대의 마이너리티 운동은 제 판단으론 '차이의 현시', 즉 각자 운동의 아이덴티티를 드러내는 데까지는 나아갔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후 운동이 쇠하면서 그다음 진도를 못 뺀 거지요. 90년대 문화운동의 이론들은, 지금으로 따지자면 미국의 다원화된 생태운동 진영을 두고서 지금 우리의 생태운동 진영을 논한 듯한, 당대의 현실과는 어느 정도 괴리된 지점이 분명 있었고요. 물론 결론은 공부입니다. 열공! ^^

기왕 갈무리해두신다니 하나 더 생각을 덧붙이자면, 제가 이주운동에 관심을 가졌던 큰 이유 중 하나는 마이너리티 운동의 정체성 중 거의 대부분이 이 운동 안에 실타래가 꼬이듯 복합적으로 내재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단일한 정체성이 아니라 노동, 여성을 비롯한 섹슈얼리티, 인종, 언어, 시민권/영주권, 국적, 종교, 디아스포라(난민), 장애(산재) 등등의 이슈를 모두 안고 있던 집단이었던 게지요. 각종 정체성의 도가니장이었다고나 할까요. ㅎㅎ 반면에 전부라고 할 순 없지만 이 운동에 결합한 한국인 활동가들 중 상당수가 ‘노동운동’으로서만 이주 문제를 바라봤던 건 아직도 상당히 아쉬운 지점입니다.

이주자 주체들이 성장해서 다수가 남아 있었더라면 또다른 지평이 열렸을 수도 있겠지만, 이주 운동에서 주체의 맹점은 항상 난제로 남습니다. 주체의 역량 부족이라기보다는, 주체로 성장하는 데 한국어라는 언어 장벽이 분명 큰 문제가 되었고요. 또 하나는 샤말이나 미쉘처럼 성장한 주체들이 강제추방의 형식으로 타의로 한국을 떠났던 데서 비롯됩니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건, 이주노동자를 비롯한 여러 마이너리티 집단들에 대한 자본의 공습 문제입니다. 이주자들이 한국인 일자리를 빼앗고 있다는 담론은, 결국 하위 계급 혹은 마이너리티 간의 이전투구로 판을 읽게 만들지요. 이건 바꿔 말하자면 공통의 대항 헤게모니를 만들어내지 못한 진영의 뼈 아픈 실책들일 텐데요. 재훈씨의 고민처럼 보편성의 중심을 만들지 못하는 한 계속 이 공습에 시달릴 수밖에 없을 겁니다.

아마 이 정도가 자의 반 타의 반 90년대 부문계열운동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으로서 2000년대 이주 운동으로까지 넘어왔을 때 느낀 소회일 겁니다. 이상 진짜 끝입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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