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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조금 있음

한국의 여자는 늘 엄마였다. 그저 여자로서 여자일 순 없었다. 남자는, 아니 아빠는 늘 외출 중이었다. 아빠들은 시대의 부름을 받고 독립투사 혹은 일제 부역꾼이 됐다. 이념 싸움에 휩쓸려 초록 군복을 입거나 빨갱이로 몰려 산으로 도망갔다. 개발 독재의 명령 아래 산업 역군이 되거나 민주화 투사로 감옥에 갔다. 늘 아빠는 제 자리에 없었고, 엄마가 그 자리를 채웠다. 국가를 되찾아오자는 외침이든, 국가를 건설하자는 선포든, 국가를 발전시키자는 구호든, 그에 상응하는 선언적 집단 동원 체제의 억압 공포를 맛본 1차 희생양은 아빠였고, 간접 체험한 사람은 엄마였다. 비단 역사 흐름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근대성이 개인을 파고들면서부터 그랬다. 국가주의는 엄마의 이름에서 여자를 앗아갔다. 여자는 국력신장의 ‘밑거름’인 인구 늘리기에 이바지할 이 나라의 ‘어머니’로 동원됐다. 여자의 욕망은 통제됐다. 성적 욕망은 방탕함으로, 지식 습득욕은 쓸데없는 짓 또는 독한 짓으로, 우정을 통한 관계욕은 가족의 생활을 챙기지 않는 이기심이란 이름으로 함몰됐다. 결국 여자는 엄마일 때만 칭송받았다. 착실한 국가 구성원, 국민의 이름으로 자라날 아이들을 길러줄 가족주의의 화신, 그거면 됐다.





‘줄줄이 빠따’를 직접 맞을 때보다 맞는 동료를 바라보며 순서를 기다릴 때가 더 무서운 것처럼, 공포는 직접 겪을 때보다 체험 예정자 자격으로 직시할 때 더욱 더 몸 깊숙이 파고든다. 아빠의 공포를 옆에서 봤던 엄마는, 그래서 늘 독했다. 내 아이가 조금이라도 제도와 집단의 명령을 거부할라치면 그 명령이 옳든 그르든 상관없이 엄마는 독한 회초리를 들었고, 아빠는 헛기침하며 담배를 피워 물고 외면했다. 엄마는 아이가 '쓰잘 데 없는' 선언적 구호에 희생되는 게 싫었던 반면, 아빠는 아이를 통해 자신이 겪은 공포를 되새김질하기를 거부했다. 해방이 되어도 독립투사가 일제 부역꾼에게 머리를 숙여야하는 삶, 단지 총부리를 겨눈 이들에게 끌려갔을 뿐인데 끌어간 이들의 군복 색깔이 가진 힘의 우위에 따라 죽임을 당해야하는 삶, 포장마차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다 무심코 푸른 기와집을 향해 내뱉은 “개새끼” 한마디로 고문 병신이 되어야하는 삶들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아빠는, 말을 아꼈다. 반면 엄마들은 눈에 불을 켜고 이런 아빠들이 재생산되는 걸 온몸으로 막으려했다.


아이가 학교 규범에 엇나가는 잘못을 저질러도 처벌의 대상은 당사자인 아이나 국가와 가족의 가부장인 아빠가 아니라 바로 엄마였다. 잘못을 저지른 아이에게 “엄마 불러와!”란 명령 한마디로 교무실에 끌려온 엄마는 신성한 교권 앞에 무릎 꿇고 ‘잘못 가르친’ 죄를 빌어야했다. 그때의 교권은 국가 혹은 군대 상관에 다름 아니었다. 국가는 암묵적으로 혹은 선언적으로 엄마에게 ‘국민’ 교육에 매진하라 지시했다. 때문에 엄마는 늘 주의를 줬다. “어디를 가든 튀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대학에 가도 이상한 선배들 꼬임에 넘어가면 안 된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너는 그저 조용히 공부만 해야 된다”고 조용히, 그러나 힘주어 강조했다. 그렇게 엄마는 국가가, 아니 정당성이란 수단을 획책한 권력이 가르치는 도덕규범을 아이에게 끊임없이 세뇌시켰다.




<마더>의 봉준호는 이 ‘엄마’들을 해방시키고자 한 것 같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김혜자를 선택했다. 김혜자는 한국 사회의 전형적 엄마상의 페르소나다. <전원일기>, <사랑이 뭐 길래>에선 전통적인 한국의 현모상을 그렸고, <엄마가 뿔났다>에선 겨우 가사노동의 ‘집장’에서 휴가를 얻어내는 선택이 가족을 내버린 ‘전복적 반란’으로 묘사될 지경인, 그런 엄마상을 맡아왔다. 그런 시각의 연장선에서 보면 <마더>의 김혜자는 그저 생소함그 자체다. 정신지체로 놀림 받는 아들 도준(원빈)에게 이 엄마는 “한 대 맞으면 가서 두 대 때리라”고 가르친다. 친구나 선생에게 주먹이나 매로 두들겨 맞고 집에 와 동정을 바라는 울음을 터뜨리면 “네가 잘못해서 맞은 거야”라는 만사형통 타자 혹은 제도의 논리로 되갚음의 감정을 꽁꽁 가둬놨던 이제까지의 우리네 엄마와는 살짝 다르다.

이 엄마는 살인 혐의를 뒤집어쓰고 있는 아들의 죄를 사해달라고, 대중에게 용서를 구하지도 않는다. 되레 아들에게 “설사 니가 죽였더라도 아니라고 해야지”라고 다그친다. 그녀에게 ‘허벅지 침’은 제도에 의해 주입된 타자의 기억을 쫓아내기 위한 주술의 상징이다. ‘엄마가 5살 때 농약을 먹여 자신을 죽이려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는 아들의 선언에 눈이 뒤집어질 만큼 기겁하면서도, 금세 아들의 기억을 잠그기 위해 “침 맞자”고 되뇌는 건 영화 말미를 위한 장치. 이 엄마는 마지막 장면에서 자신이 저지른 ‘도덕적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 죄’가 악몽으로 반추되는 순간, 결국 스스로 허벅지를 침으로 찌르면서 ‘망각’과 ‘외면’의 주술을 불러 제도가 주입한 죄의식으로부터 개별적 해방을 구현하는데 이른다. 그렇게 봉준호는 김혜자를 통해 집단의 도덕 논리로부터 해방된 최초의 대한민국 ‘마더’를 그려냈다.

여자는 개별적일 때 강하고 상황 대처에 현실적이다. 남자가 뻑하면 집단의 힘에 기대거나 위계의 권위를 빌려 상황을 주도하려한다면, 여자는 냉정하게 개인 대 개인의 논리로 상황에 대처한다. 때문에 남성적 권력의지에 함몰된 제도는 남자를 포함시킨 가족을 괴롭히는 간접 고문이라는 공포를 통해 엄마의 굴종을 끌어낸다. 그리고 엄마의 다른 이름인 여자마저 마침내 복속시키려한다. 내 남편이 사회에서 매장당하지 않기 위해, 내 아이가 학교에서 따돌림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 엄마는 불철주야 뛰어다니면서 문득, 여자라는 이름을 통제하고 부수적으로 가족 전체의 제도 복속을 유도하는 조직 논리에 녹아들게 된다. 때문에 여자의 개별성은 자기 자신이란 개인의 단위에서 가족 단위의 개별성으로 확대될 수밖에 없고, 여자의 현실성은 가족 이기주의로 환원돼 집단의 논리에 종속된다. 그런 면에서 제도의 논리 뒤에 숨어있는 남성적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의 획책은 그 견고함이 만만찮다.




봉준호는 그 집단의 논리에 전복적으로 맞서지 않는다. 그는 이 영화에서 ‘모성은 늘 희생적이어야 한다’는 ‘인류 보편적 논리’를 내밀어 이데올로기에 복속된 이들에게 급변의 불편함을 주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그도 만만찮다. 모성이라는 보편적 감성을, 엉성한 수사기관이란 제도의 부조리와 정면으로 부딪히게 하고, 아들의 생존 그 자체에만 모든 성정을 쏟아 붓고 도덕적 죄의식은 거부하게 함으로써 제도에 종속된 가족주의를 구현하라는 이데올로기의 명령을 어기게 한다. 집단의 도덕 논리로부터 해방된 엄마들, 기득권을 바라지 않고 철저히 개별적인 삶의 영위 그 자체만 추구하는 엄마들이 되어주기를, 그리고 이를 통해 엄마가 다시 여자라는 이름으로 환원되기를 그는 은근히 바란다. 그렇게 봉준호의 의뭉스런 레토릭은 한참 지나야 웃기는 고난도 개그처럼, 슬며시 파고든다.


*이 글은 미디어스에 실렸음. 사진 출처는 <마더> 공식 홈페이지.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6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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