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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의 인앤아웃 no.12



드라마 <아이리스>의 몰입도가 점점 차오른다. 헝가리와 일본, 중국을 오가는 해외 로케, '불친절한 작가들'이라고 불릴 정도로 빠른 감정전개 속도가 숨막힌다. 이병헌과 김태희, 김소연과 김승우라는 주목도 높은 배우들이 보여주는 연기의 변화 혹은 진화도 눈길을 끈다. 영화 <본 시리즈>의 원작자 로버트 러들럼을 당당하게 오마주했다고 밝히는 작가들의 말처럼 현준(이병헌)의 모습에서 내내 제이슨 본(맷 데이먼)을 떠올릴 수 있었다. <레옹>의 플롯도, <쉬리>의 냄새도 스토리에 드러내놓고 녹아있다.

무엇보다 <아이리스>에서 눈길이 가는 건 현준의 캐릭터다. <007시리즈>와 같은 한바탕 영웅주의 첩보액션을 기대했던 이들에게 현준은 "요원으로서의 충성심이나 투철한 애국심, 그런 거 잘 모른다"며 뒤통수친다. 자신을 죽이러 왔다 포로가 된 북한 호위부 공작원 선화(김소연)가 "날 죽여. 나한테 이러는 이유가 뭐야"라고 묻자 "넌 이유가 뭐야. 뭘 위해서 이래야 돼"라고 되묻는다. 이 지점에서 이데올로기의 대립, 그리고 그 구조 속에서 인물들의 암살과 폭력 등을 당연한 듯 호위하던 이념적 당위성은 와르르 무너진다.

제이슨 본 역시 마찬가지였다. 본은 '국민 보호와 국가를 위한다'는 명분 아래 명령을 받은 대상을 무조건 암살하는 CIA 특수요원이다. 하지만 첫 임무를 마친 뒤 명령 체계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토해내고, 기억조차 잃는다. CIA가 이념적 명령 체계에서 이탈한 그를 숙청하려하자 본은 홀로 맞서며 훈련 프로그램으로 상실됐던 본질적 자아, 즉 제이슨 본 이전의 '데이비드 웹'을 찾아낸다. 그리고 그 어떤 이데올로기적 체제로부터도 벗어난 채 어디론가 잠적해 표표히 살아간다.

김훈은 소설 '공무도하'의 작가후기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나와 이 세계 사이에 얽힌 모든 관계를 혐오한다. 나는 그 관계의 윤리성과 필연성을 불신한다. 나는 맑게 소외된 자리로 가서, 거기서 새로 태어나든지 망하든지 해야 한다." 현준이 던진 두 마디 말과 제이슨 본의 선택, 김훈의 고뇌에 찬 일갈은 자신을 둘러싼 온갖 도덕적 당위와 이념들을 객체화하고 그 밖에서 한 번 자신의 본질을 바닥까지 해체해보자는 청유로 읽힌다. 우리 주변을 감싸고 있는, 늘 우리가 옳다고 믿고 있는 것들에서 벗어나 선제적 사고와 편견을 덜어내고 오롯한 벌거숭이가 되어보자는 말이다. 그렇게 벌거벗으면 과연 어떤 ‘윤리성과 필연성’도 개입되지 않은 본질적 자아, 순수한 나 그 자체가 보이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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