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윤석열의 폭로로 여러 지점에서 국면이 전환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박근혜 정부의 정치적 정당성에 상당한 위기가 찾아왔다는 것은 이제 분명해 보인다. 이택광 선생의 말처럼 이제 필요한 건 ‘혁명적 주체’일 텐데, 과연 그 주체들이 생생하게 현현할 것인가. 나는 다소 부정적인 감정을 담으면서도 끝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다른 대화를 하다가 뜬금없이, 2년 전 대구에서 발생했던 학교 폭력 사건의 유서가 떠올랐다. 이 생경한 연결고리로 이어진 까닭은, 그 사건과 윤석열의 폭로에서 공히 떠올릴 수 있는 하나의 고리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론에 의해 밝혀진 사실이 세상을 지배한다고 생각하지만, 의외로 밝혀진 사실은 세상을 지배하는 수많은 사실들의 파편에 불과하다는 점 말이다. 스스로 목..
장정일 선생 글에 대한 이 트윗을 보고 몇 분이 '웃을 일만은 아니다'라거나 심지어 '니가 감히 장정일을 냉소하냐'란 반응을 보이시는데.. 나는 장 선생의 판단에 의문을 가지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장 선생은 ''적대적 공생관계'라니?' 와 '진보의 '가면'' 에서 지속적으로 '탈이데올로기적 좌파'를 대상으로 비판의 날을 세운다. 이 비판 논거는 대단히 폭력적인데, 그가 말하는 '좌파'가 '탈'하는 '이데올로기' 대상은 이 글만 그대로 해석하자면 '스탈린주의 or 자본주의'라는 이분법적 대상일 뿐이다. 이데올로기가 과연 그 두 개의 '숭고한' 선택지 뿐인가. 게다가 장 선생은 줄기차게 혁명 그 자체를 목적으로 보는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혁명은 수단 아닌가. 어떤 혁명, 그리고 어떤 ..
대개는 조밀한 인간사에서 벗어나 세상을 조망하거나 관망하고 싶을 때, 사람들은 높은 곳에 오른다. 그러나 오히려 세상의 주목과 관심을 받으려고 높은 곳에 오르는 경우도 뜻밖에 많다. 특히 쉽게 알릴 수 없는 절실함을 표현하기 위해, 어떤 이들은 그 절실함만큼의 공포를 무릅쓰고 더 높은 곳으로 향한다. 그리고 어떻게든 타인의 무뎌진 공감을 얻어내려고 그 위에서 극한의 고난을 감내한다. 하지만 자극에 익숙해지면 더는 자극이 아닌 것처럼, 사람들은 이제 고공 농성이라는 공포와 고난을 택하는 이들을 익숙한 눈길로만 바라본다. 그들이 왜 그곳까지 올라갔는지에 대해서는 어느덧 관심을 갖지 않게 되었다. 그들이 올라가 있다는 현상만 희미하게 감지할 뿐이다. 은 그들이 공포와 고난을 택한 이유, 공포와 고난을 택할 수..
“나는 모르는 사람이라예.” 사진을 보자마자 얼굴을 흔들고 고개를 숙였다. 단호한 말투였다. 필요 이상으로 단호했다. 하얀 야구모자 아래 숨은 눈빛은, 사진을 보고 “모르는 사람”이라고 똑같이 답한 수십 명의 시장 상인들이 내비쳤던 의아함과 달랐다. 당혹감이었다. 곧 두 눈이 촉촉해졌고,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그러자 호기심에 사진을 보기 위해 모인 상인들이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흩어졌다. 이제 그녀만의 시간이 남았다. 상인들은 개입할 수 없었다. ★ 2007년 12월 2일 한국방송 TV에 한 청년이 출연했다. “진짜로, 살려주이소”라고 말을 꺼냈다. 17분 동안 연설했다. 그는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이명박 대통령 후보를 지지한다고 했다. “2002년 치른 16대 대선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찍은 어..
아비는 목에 턱받이 손수건을 둘렀다. 어미는 두어 개 남은 아비의 치아에 아래 위 틀니를 끼워 넣었다. 아들은 밥을 국에 말았다. 아비는 덜덜 떨며 입을 벌렸고, 아들은 수저에 뜬 밥을 아비의 입에 밀어 넣었다. 아비가 입을 오므릴 때마다, 입가엔 잔뜩 주름이 어렸다. 움푹 팬 뺨이 밥을 씹을 때마다 더 우물졌다. 아들은 힘겹게 밥을 넘기는 아비를 보며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아비도 밥을 씹으며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인상을 쓴 아비와 아들은 미간의 똑같은 자리에 비슷한 모양의 세로 주름을 그렸다. 주름의 깊이가 달랐다. 아들의 찌푸림에 짜증이 섞여 있었다면, 아비의 찌푸림엔 아무런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는 점도 달랐다. 병원 식당가의 다른 자리엔 다섯 가족이 둘러앉았다. 일흔은 훨씬 넘어 보이는 여성..
한국일보 투쟁 현장에 다녀왔다. 서울 남대문로 한진빌딩 15층에 있는 한국일보 편집국은 6월 16일부터 '짝퉁 한국일보'를 만들고 있는 예닐곱명의 부장단과 사측이 동원한 용역들이 '셀프 감금'을 하고 있는 상태였다. 한국일보 기자들은 조를 나눠 교대해가며 통로에서 이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순번이 아닌 기자들은 여전히 자신이 맡은 출입처나 취재 현장에서 브리핑 등에 참여하거나, 1층 로비 혹은 3층 노조 사무실에서 향후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 신문 제작 프로그램에 로그인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서의 브리핑 참여는, 기자들이 여전히 노동을 하고 있다는 하나의 증빙이다. 사측의 입장에 따라 짝퉁 한국일보를 만들고 있는 부장들은 며칠째 집에도 가지 않고 화장실에서 샤워를 하며 연합뉴스 기사를 베끼고 있다고 한다..
사람들은 5년 동안 무엇을 필요로 할 것인가 18대 대통령 선거가 박근혜 후보의 당선으로 끝났다. 선거 직후 며칠 동안 잠잠하다 싶더니 곧 민주진영의 패배에 대한 다양한 분석 혹은 힐난이 쏟아졌다. 분석은 주로 ‘50대의 보수화’에 방점이 찍혔고, 힐난은 2008년의 ‘20대 개새끼론’에 짝지은 ‘50대 개새끼론’으로 집중됐다. 그리고 ‘반 박근혜’와 ‘반 새누리당’에만 전략을 집중한 채 선과 악의 단순 구도로 나눠 ‘성전’에 나서듯 선거를 치른 민주당의 우매함에 대해서도 비판이 쏟아졌다. 이번 선거를 통해 우려되는 일단은 로 대표되는 ‘닥치고 (반 새누리당) 정치’를 통해 분출된 집단적이면서도 일면 종교적인 열광의 에너지가 결국 차가운 패배라는 결과로 남게 됐다는 점이다. 집단적이고 종교적인 열광 뒤에..
신념이 자유의 언어라면, 책임은 공유의 언어다. 자유는 오롯이 나의 것이다. 나의 신념을 외부에 의해 간섭받지 않는다. 만약 외부의 간섭이 있다해도, 그 간섭은 나의 사유를 거쳐 나의 윤리로 정립되면서 나의 신념으로 다시 변증한다. 반면 책임은 나만의 것이 될 수 없다. 책임은 관계 속에서 이뤄진 행동이나 관계를 규정짓는 권력의 작동으로 인해 파생된 어떤 결과를 짊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책임은 나와 너의 관계 위에 걸친 채 공유된다. 유시민이 지난 19일 정계 은퇴를 선언하며 트위터(@u_simin)에 쓴 표현은 “‘직업으로서의 정치’를 떠난다”였다. 는 독일의 사회학자 맑스 베버가 펴낸 책 이름이다. 베버는 책에서 정치인이 갖춰야 할 덕목으로 신념윤리와 책임윤리의 조화를 거론하면서, 신념윤리보다는 책임..
내 어린 시절을 강력하게 호출하는 냄새는 비린내다. 아버지의 벌이만으로 먹고 살 수가 없었던 어머니는 내가 여섯 살 때 5평 남짓한 크기의 아파트 상가에 사글세를 얻어 횟집을 열었다. 뭍밖에 없는 대구에서 회 장사를 하려면, 매일 아침 시외버스를 타고 왕복 세 시간 거리의 포항 죽도시장을 다녀와야 했다. 어머니는 한 순간도 검게 찌든 바닷물이 마르지 않는 어시장 바닥을 휘젓고 다니며 싱싱하면서도 싼 횟감을 찾았다. 그런 어머니의 몸에선 늘 시큼하고 짠 바닷물, 그리고 썩은 생선 냄새가 났다. 어쩌다 어머니의 허벅지를 베고 누우면, 그 비린내가 자욱하게 내 코를 찔렀다. 그리고 가끔은 그 냄새에 피비린내가 섞이기도 했다. 몸쓰는 일을 하던 아버지는 갓난 아기 때 어미를 잃었다. 계모에게 핍박받고 네 명의 ..
1년 전 이맘 때 나는 경북 구미에 사흘 동안 머물며 20대와 30대 노동자 5명을 인터뷰했다. 5명은 모두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했고, 대부분 생산직이었으며 중소 공장에서 일했다. 구미는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 지지율이 80.3%나 됐지만, 당시 인터뷰이 5명 가운데 박 후보를 적극 지지하는 이는 1명뿐이었다. 그 1명마저 파업을 ‘노조 이기주의’로 보는 시선에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들은 ‘일요일만큼은 쉬게 해달라’는 말을 사회에 던지고 싶지만, 주변에 그런 얘기를 할 수 있는 토대가 없다. 진보정당은 그들과 접점이 없거나, 아예 없는 존재였다. 진보정당을 알고 있는 20대도 “그들은 노동권 문제를 개선할 힘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들은 정치에 무감한 듯했으나, 적어도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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