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종 이준엽 에게. 요즘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다. 병치레를 하다보니 운동을 하지 못해서 몸이 무거웠다. 이것저것 알아보니 자전거만한 운동이 없는 것 같다. 자전거를 타고 나서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고 나면, 조금은 덜 피로하게 일주일을 버텨낼 근육이 붙은 것 같다고 생각한다. 맨날 의자에 걸터앉아 글줄이나 끄적대고 있는 내게 참으로 소중한 가욋일이다. 참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엉덩이와 허벅지, 무릎에 한껏 힘을 주고 패달을 밟아도 우리가 함께 대구 단산지 둘레길-지금 생각하면 그 길은 정말 훌륭한 둘레길이 아니었나 싶다-을 돌던, 파계사로 넘어가는 가파른 오르막을 오르던, 그때와 같은 속도로 자전거가 나아가질 않는다. 한강은 한없는 평지길인데도 말이다. 나 어릴 때 쓰던 자전거가 지금 가지고 있는 자..
다원화한 사회에서 다양한 정체성의 대항 헤게모니화는 어찌 보면 필연이다. 세상은 더 이상 ‘노동자 계급’만의 정체성으로 전복할 수 있을 정도로 일원화한 세계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세력은 다양한 정체성을 바탕으로 분산되어 있다. 노동 운동 외에 여성 등과 같은 성적 소수자 운동, 이주노동자와 인종 차별 반대 운동, 녹색 운동, 장애인 운동 등 다양한 영역에서 각자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는 고정되지 않은 이들이 각자의 불평등 관계를 타파하기 위해 투쟁하면서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과정, 그것이 바로 대항 헤게모니를 구축하는 과정이다.여기서 문제는 이 정체성들 사이의 관계는 과연 수평적이어야 하는 것인가, 이다. 정체성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불평등을 타파하는 것만으로 해방은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복..
‘백화점 모녀’ 사건에서 분노는 대체로 모녀에게 집중됐다. 상대적으로 ‘을’의 위치에 있는 서비스 노동자에게 ‘갑’의 위치에 있는 소비자가 횡포를 부렸기 때문이다.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소비자라는 정체성은 마주한 서비스 노동자에게 화폐로 교환하는 제품 이상의 무언가를 요구하면서 마음껏 권리를 누릴 수 있게 하는 권력이다. 소비는 소비자에게 권력을 쥐여주고, 화폐를 매개로 한 권력관계에서 서비스 노동자보다 우위에 있음을 거듭 확인해준다.그런데 일부에서 ‘부당함에 맞서 패기있게 저항하지 않고 무릎을 꿇은’ 백화점 주차장 알바생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갑질만 욕할 게 아니고 주체의 자성도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알바생이 소비자와 서비스 노동자 사이의 권력관계라는 구조에 무릎 꿇지 말고, 하나의 ..
김군이 학교 폭력 피해자라는 사실은 IS를 선택하게 된 중요한 원인 중 하나다. “나는 페미니스트가 싫다”는 말에서 볼 수 있듯, 여성 혐오 역시 하나의 중요한 원인일 것이다. 넉넉지 않아 보이는 가정환경도 한 원인이 됐을 것이고, 원활치 않았던 부모와의 관계도 원인이 됐을 것이다. 그 밖에도 아직 우리가 알 수 없는 수많은 사연이 18년의 삶 안에 녹아있다."내 나라와 가족들을 떠나고 싶다. 단지 새로운 삶을 살고 싶다"는 말은 한국 땅에서 김군의 삶이 그만큼 원활하지 못했음을 증명한다. PC를 리부트하듯, 새로운 사회적 공간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가지고 새로운 삶을 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가능성을 열어준 공간이 하필히면 타인에게 무차별 폭력을 가하는 테러 집단이었다는 점이 문제겠지만, IS만큼 그들..
얼마 전 올렸던 블로그 글 ‘샤를리 엡도 이후: 언론의 자유가 곧 비판으로부터의 자유는 아니다’나 각종 다른 글로만 간접적으로 샤를리 엡도를 접하는, 프랑스어를 한 줄도 읽지 못하는 나는 많은 이들이 샤를리 엡도를 일컬어 ‘모든 권위와 체제에 저항하기 때문에 좌파 잡지'라고 말하는 설명들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과연 우리는 모든 권위에 저항해야 하고 모든 체제에 저항해야 하는 것인가. 모든 권위와 체제에서 자유로운, 온전한 개인들의 아름다운 관계로 이뤄진 사회는 과연 가능한가. 권위는 권위주의와 동일한 개념인가.나는 일정한 권위는 체제를 돌리는 데 있어 필요한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체제를 배제하자는 말은 어쩌면 그냥 차별을 하자는 말과 같은 것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한다. 체제없는 온전한 개인들의 아름다..
‘갑질 모녀’에 무릎 꿇은 알바생에 “왜 저항하지 않았느냐”는 말이 틀린 이유를 쓰면서 부쩍 들었던 생각은 내가 지난 글에서 얘기했던 ‘냉소와 분노의 계급화’ 사례가 조기숙 교수와 그의 지지자들의 인식 사이에 자명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글은 => '냉소와 분노의 계급화, 그리고 굴뚝의 저항') 조 교수와의 대화에서 가장 슬펐던 것은, 조 교수의 시선에서는 백화점 주차 알바 일이 ‘앞으로 기회가 많은 젊은이’가 희생할 수 있는 통과의례 정도로 여겨진다는 점이었다. 그러니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그 자리에서 반발하고 일을 때려치는 '즉자적 저항'으로 자존심을 지키라는 명령에는, ‘너는 그 정도의 일 따위를 할 아이가 아니다’라는 시선이 담겨 있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알바생 1433명을 대상으로..
‘청순 글래머’는 한국 남성이 욕망하는 전형적인 여성상이다. 몸은 빵빵하고 얼굴은 예쁘되 남성을 압도하지 못하는 수동성을 지닌 여성. 그런 한국 사회에서 ‘당당하다’는 평을 호평으로 듣는 여성은 흔치 않다. 가수 이효리는 그런 흔치 않은 여성 중 하나다. 이효리는 섹시함과 당당함을 공유한 스타임에도 팬층의 지지는 젠더를 막론한다. 정치적 발언을 서슴지 않는 여성 역시 한국 사회에서 환대받기 어렵다. 대부분의 사회적 약자가 그렇듯, 여성 역시 권리를 요구하는 주체로 나서는 순간 배척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가수 이효리에게는 정치적 발언마저 트렌드로 만드는 힘이 있다. 채식을 하고 동물권을 외치는 이효리의 행동은 채식의 철학과 동물 보호의 정치 위에 세련된 스타일을 입힌다. 심지어 직접 기른 작물을 먹고사는..
평지 기온이 영하 9도였던 13일 새벽, 쌍용차 해고 노동자 2명이 평택공장 굴뚝에 올랐다. 2009년 대규모 정리해고 뒤 5년을 싸웠다. 26명의 동료와 가족이 세상을 떠났다. 사법부와 행정부, 국회는 그들을 돌아보지 않는다. 벼랑 끝에 몰려 밟고선 곳이 칼바람에 ‘증기선처럼’ 흔들리는 폭 1m 도넛형 굴뚝 위다. 하지만 그들은 “함께 살자”며 여전히 희망을 말한다. 그들의 희망은 “공장 안 동료들”과 굴뚝 위를 바라봐줄 사람들의 반응이고 연대다.지배적인 반응은 희망을 말하지 않았다. 어떤 이는 “독한 사람들”이라고 했다. “우리의 강함을 증명하기 위해 70미터 굴뚝에 오르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약하고 나약한 존재이고 무서움 또한 많고 여린 인간인지를 알리기 위해 올랐습니다”라는 해고자 이창근의..
12일 오후 늦게 전화가 걸려왔다. 이창근 실장이었다. 평소 답지않게 잔뜩 흥분된 목소리였다. “공장 안 굴뚝에 올라갈 예정”이라고 했다. “눈도 오고 날씨가 이렇게 추우니 딱 이날이다 싶다”고도 했다. 나는 얼어붙었다. 아무런 대꾸를 하지 못했다. “이 추운 날 어딜 올라간단 말이냐”라는 말조차 할 수 없었다. 상투적라는 생각이 들었다. 굳은 결의같은 것으로 아드레날린을 분비시켜 잔뜩 부풀어오른 듯한 그의 목소리에서 숭고함이 느껴져서였을까. 섣부른 말로 하는 제지는 이미 통할 것 같지 않았다. 13일 새벽 2시52분. 전화가 걸려왔다. 공장 진입에 성공했고, 굴뚝에 절반 정도 올라왔다고 했다. 정상에 도착하면 다시 연락하겠다고도 했다. 묻지도 않았는데 “공장에 들어온 경로는 말할 수 없고요.” 그는 여..
서북청년단 재건위에 대관을 불허한 서울청소년수련관이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인 '친구사이'에는 정기총회를 대관해줬다며 서북청년단 재건위가 ‘이중잣대’라고 비판하고 “청소년들에게 동성애를 권장할 일이라서 승인했냐”며 따졌다고 한다. 일베와 서북청년단 재건위가 같은 주체들로 구성됐다고 보긴 어렵지만, 일베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 비판 논리가 바로 이 ‘이중잣대’ 논리다. 시사인의 기사에서 묘사됐던 “자기들이 하는 박근혜 조롱은 풍자이고 우리가 하는 노무현 조롱은 패륜인가?”라고 묻는 질문들이 그 예다. 이 논리를 통해 ‘이중잣대’의 수혜자를 대척점에 두고 자신들이 상대적으로 피해를 입고 있다는 피해자 서사를 완성한다. 서북청년단 재건위가 지난 9월 서울광장에 설치된 세월호 참사 추모 리본 훼손을 시도하며 거리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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