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도 여느 날과 다르지 않은 오후였다. 그즈음 나의 머리는 미디어에 하루가 멀다 하고 등장하는 온갖 죽음과 그 죽음의 서사들이 복잡하게 얽혀 한없이 무거웠다. ‘해고 트라우마’, ‘업무 스트레스’, ‘생활고’, ‘성적 비관’ 등의 범주들로 어쩌면 단순하게 분류된 죽음들은 때론 뜨거운 한탄과 함께, 때론 차갑도록 묵묵히 하나의 인간사로 미디어에 기록됐다. 한명의 인간으로 제대로 눈길조차 받지 못하던 인간들이, 마침내 죽음에 이르고 난 뒤에야 한명의 인간으로 기록되는 지독한 역설 앞에서 나는 그저 무기력했다. 그 죽음 뒤에 가려진 서사들은 오롯이 개별적일테지만, 어느덧 하나의 보편으로 묶인 채 나를 오래 짓눌렀다. 하지만 나는 그 보편성을 어떤 언어로 규합해야 할지 선뜻 떠올리지 못했다. 그러던 내게 가슴..
이숙정 민주노동당 성남시의원이 성남 판교주민센터 비정규직 직원을 폭행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설 연휴 첫날 고향으로 가는 기차를 타고 있던 나는 온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이 의원은 주민센터 직원에게 고성을 지르며 신발과 서류뭉치를 던졌고, 직원의 머리채를 잡으려 하는 등의 폭행을 저질렀다. 뉴스 동영상에는 민주주의의 제도적 절차를 통해 정당성을 부여받은 권력이, 자신의 권력을 활용해 보호해야 할 대상을 향해 되레 위계적 폭력을 행사하는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내가 경직됐던 건, 이 의원이 저지른 폭력에 이 의원이 부여받은 제도적 권력, 그리고 이 의원 개인의 권위의식이 겹겹이 착종돼 있기에 사안이 가볍지 않다고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어진 소식은 더 참담했다. 이 의원은 주민센터에서 보내..
둘은 최근 가장 많은 눈길을 끌었다. 한 명은 영화를 만들어 개봉 한 달을 며칠 앞두고 누적 관객 수 237만여명을 모았다. 첫 주 127만여명을 모았던 기세는 어느덧 수그러든 모양새지만, 실패로 불리기엔 아직 이르다. 다른 한 명은 국외 원정도박으로 넉 달 남짓 ‘도피’ 생활을 하다 귀국하면서 언론과 대중으로부터 십자포화를 받고 있다. 입은 옷이 ‘명품’이라며 “겸손하지 못하다”고 비판받고, 쓴 모자가 도깨비 모양을 하고 있다고 “국민을 놀리고 있다”고 야단맞았다. 이미 예상했겠지만 앞은 심형래, 뒤는 신정환이다. 둘은 애매한 위치에 서 있다. 심형래는 평론가들에게 평가 대상조차 되지 못하는 수모를 당했다. 문화평론가 이동연은 “는 별 하나 주기도 아까운 영화”라고 혹평했고, 진중권은 심형래와 ‘심빠’..
오세훈 서울시장이 2010년 12월21일로 '친환경 전면 무상급식' 반대를 주장하는 자신의 모든 밑천을 남김없이 드러냈다. 지난 18일 예정돼 있던 무상급식 관련 TV 토론을 12시간 정도 앞두고 배옥병 친환경 무상급식 풀뿌리 국민연대 상임운영위원장이 토론 상대라서 출연을 거부하겠다고 밝힌 지 사흘만이다. (사실 특정인의 출연을 전제로 그가 토론을 거부한 건 세 번째다. 조국 서울대 교수가 토론의 사회를 본다고 거절했고, 노회찬 진보신당 전 대표가 서울시장 후보 TV토론에 출연한다고 거절하기도 했다.) 그는 이틀 동안 3억8000여만원의 서울시 세금을 들여 일간지에 광고를 게재했다. 오늘은 그의 행위의 배경이나 목적, 그리고 무상급식을 둔 전반적인 철학의 차이에 대한 사유같은 건 저리 던지고, 그가 주장..
#1. 리영희 선생은 휠체어에 몸을 싣고 있었다. 무릎 위에는 담요가 올려져 있었고, 말을 하는 입술은 한쪽의 입꼬리가 다른 쪽의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균형이 무너져 있었다. 하지만 선생은 불편한 몸을 이끌고 파주까지 찾아와, 막 ‘기자’라는 호명을 안고 연수를 받으러 온 후배들 앞에서 ‘쓰는 자’의 책무에 대해 조곤조곤 역설했다. 이른 함박눈이 거세게 쏟아진 2003년 12월의 어느 날이었다. 그날 선생은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의 일례로 서해북방한계선(NLL)을 거론했다. “남북한 사이에 영토와 군사분계선에 대한 협정은 1953년 정전협정과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뿐입니다. 두 문서에선 오로지 쌍방이 인정한 영토와 군사분계선만 인정하고 있습니다. 정전협정에는 군사분계선을 연장할 수 ..
최근 방송이 끝난 드라마 '동이'에서 대중에 가장 많이 회자된 인물은 '동이' 역을 맡은 한효주도, '숙종' 역을 맡은 지진희도 아니었다. 단역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보조 출연자로 드라마에 등장해 시종일관 무표정한 얼굴로 연기 아닌 연기를 한 '티벳궁녀' 최나경이 의외의 인기를 끌며 '미친 존재감'이란 조어를 대중에게 각인시켰다. 최나경의 연기는 역설이기에 눈길을 끌었던 것 같다. 최고상궁 역을 맡은 임성민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연기력을 한껏 발산할 때, 최나경이 한 연기라곤 전혀 감정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임성민을 물끄러미 바라본 것뿐이었다. 하지만 대중은 그 무표정의 '발연기'에 열광했다. 역설은 일반의 인식을 뒤집은 것에서 비롯됐다. 일반적 인식대로라면, 보조 출연자는 어떤 식으로든 과잉된 연기를..
초등학교 시절 학교가 갑자기 난리법석을 치를 때가 있었다. 커터 칼로 왁스를 긁어내 흩어놓은 뒤 헝겊으로 목재 마루를 닦고, 화장실은 호스로 물을 뿌려 머리카락 한 올까지 하수구로 보낸 뒤 물기를 모두 닦아냈다. 교문에서 학교 건물까지 늘어선 화분의 오와 열을 맞추고, 운동장에는 과자 봉지의 조각 비닐까지 모두 주워담았다. 창문은 물로 깨끗이 닦고 신문지를 구겼다 편 뒤 남은 물기를 닦아냈다. 선생은 평소 문제아로 낙인찍어 책상 밑으로 몸을 숨길 때까지 매질을 해대던 아이에게 갑자기 친절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사나흘 청소를 하고 '문제아'를 대하는 선생의 태도가 남다를라 치면, 며칠 뒤 어김없이 교육청에서 장학사가 찾아왔다. 장학사는 잔뜩 고개를 치켜들고 교문에 들어섰고, 아이들에게 폭력적인 언사..
예전에 써놓은 글을 참고하기 위해 뒤지다, 2005년 3월에 쓴 글을 발견했다. 그들은 지금 어디에서 뭘하고 있을까... 치밀어오르는 분노나 표출할 수없는 답답함으로 폭발하기 직전일 때 우리는 종종 높은 곳을 찾곤 한다. 확 트인 곳에 올라가면 저 아래 삶의 현장을 잠시나마 하찮게 볼 수 있는 높이의 힘 탓에 가끔 분노나 답답함을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의 활로를 찾을 때 땀흘리며 산을 오르고, 드라마에서는 답답한 사람들마다 빌딩 옥상을 찾아가는 모습이 대명사처럼 묘사되는 건지 모르겠다. 2005년 3월21일 오전 7시30분 서울 서대문네거리 도심 한복판. 평소 그 자리에 있는 지도 몰랐던 21m 높이의 교통관제센터에 3명의 젊은 여성들이 올라섰다. 안전장구 하나없이, 1∼2m 간..
아무 것도 모르던 대학 시절과 어설픈 초년 기자 시절, 나는 수많은 ‘허기사’를 만나, 뭘 할 수 없음에 좌절했다. 뭘 할 수 없음에도 살갑게 대하는 것만으로 체면치레를 하려하는 나 자신의 비루함에 화가 나고, 그 와중에 한 것도 없으면서 뭔가 대단한 걸 한 듯 의기양양한 선배들이 꼴사납고, 그런 선배들에게 욕지거리 한 번 내뱉지 못한 나의 소심함에 욕이 나왔다. ‘이상한 모자’의 홈페이지 ‘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에서 개인적으로 ‘쩜셋(정확히는 ... 이다)’에게 바치는 글을 훔쳐보다, ‘아 씨발’ 욕이 불쑥 튀어나왔던 건 그래서였다. 그의 홈피가 원인을 알 수 없는(아마 그는 아는 듯 하지만) 버그에 걸려 잘 열리지 않는 바람에, 나의 블로그에 처음으로 남의 글을 퍼온다. .................
남북의 분단은 역시나 한국 사회의 뜨거운 감자다. 등장할 때마다 많은 이슈들을 초토화하고, 오로지 그 논란에만 눈길을 집중시킨다. 이번에는 북한의 3대 세습체제 구축에 대한 비판 여부를 두고 '진보 진영'이 둘로 갈려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다. 휴전선 위에 있는 체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말들의 성찬이 당면한 주변 민중의 삶과는 상당 부분 괴리돼 있다는 점, 그리고 그 말들의 성찬이 한쪽의 비상식적인 신실성과 다른 쪽이 그에 대해 내뱉는 '극도의 부정' 혹은 비아냥으로 점철돼 있다는 점에서 논쟁은 상당히 폭력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도착적 언어와 배제적 언어만 난무할 뿐, 이 논쟁이 도대체 왜 이렇게 뜨거운 감자여야만 하는지에 대한 성찰과 회의는 그다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다지'라고 단서를 단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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