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훈의 인앤아웃 no.16 올해 총학 선거는 운동권과 비운동권의 구분이 한층 더 흐릿해졌다. 어느 쪽이나 내놓은 공약은 등록금 문제와 학생 복지가 주를 이뤘다. 운동권이든 비권이든 '정치적' 구호를 내세우길 꺼렸다. 그들에게 좌와 우 혹은 민족해방(NL)과 민중민주(PD) 식의 진영 구분은 더 이상 무의미해보였다. 아르바이트로 등록금을 스스로 마련해야하거나, 기업이 요구하는 각종 스펙 쌓기에 허덕이는 그들에게 거시적인 정치 담론에 대한 사유는 사치인 것 같았다. 대신 거친 현실 속에서 스스로 생존하는 법에 대한 생활 속 고민들의 교류가 그들의 공약에 하나씩 묻어 있었다. 총학생회 선거에 출마한 후보들에게 선본을 어떻게 꾸리느냐고 물었더니, 답이 살짝 당황스러웠다. 진영이 비슷한 학생회 집행부들을 규합하..
이재훈의 인앤아웃 no.15 출장 차 간 타이베이의 ‘명동’ 시먼띵은 젊은이들로 북적댔다. 같은 아시아계 인종이니 별다른 존재감이 없겠지 싶었는데, 힐끔힐끔 쳐다보는 그들의 눈길에선 이질감을 느낀 표정이 묻어났다. 비슷한 옷매무새와 머리 모양을 공유하는 집단에 속해있는 그들에게 한국에선 평범할 법한 차림새가 생소한 느낌을 줄 수도 있구나, 싶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집단에서 개별적으로 분리된 ‘나’를 느낄 수 있었다. 그들만의 문화적 준거집단에서 이탈된 나에 대한 자각은 고립감도 줬지만, 역설적이게도 나란 개인의 존재감을 공고히 확인하는 계기도 만들어줬다. “제가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건, 전 키가 176밖에 안 되는 루저라… 사실 저희 반에도 180 넘는 애가 둘 뿐이기 때문이에요.” 이 공간에 쓴..
이재훈의 인앤아웃 no.14 비정규직 연구원인 친구 곽모(28·여)씨는 다가오는 연말이 막막하다. 올 4월 취업한 뒤 3개월 단위로 고용 계약을 갱신해왔는데, 이번엔 연장이 어렵기 때문이다. 서른이 다가오는 나이를 감안하면 육체적인 위험이 적을 때 아이를 낳아야겠다, 싶다. 석사까지 마친 공부도 더 하고 싶다. 둘 모두를 하려면, 우선 돈을 벌어야하고 환경을 만들어야한다. 하지만 지위는 불안하고, 그에 따라 욕망하는 것들은 모두 언감생심이다. "내가 안정돼야 애도 낳지, 내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든데 어떻게 아이를 낳겠어." 뜨거워야할 날숨엔 왠지 바짝 날이 서 있다. 대통령 직속 미래기획위원회가 25일 저출산 대응 정책방향을 제시했다. 미래기획위원회는 '초등학교 취학연령 1년 단축', '해외 우수인력 이..
이재훈의 인앤아웃 no.13 지난 금요일 오랜만에 찾은 대학 캠퍼스는 스산했다. 05학번 졸업반 여성 후배(22)는 지난주 4개 회사의 면접에서 줄줄이 떨어졌다. "의지가 부족한 제 탓일까요"라며 자괴하고 있었다. 한숨을 내쉬는 후배에게 뚜렷한 말을 건넬 수 없었다. 군 휴학 탓에 아직 여유가 있는 같은 학번 남자 후배(25)는 "여자 동기들 중에 취업됐다는 애가 하나도 없어요"라고 했다. 캠퍼스를 나오는 길에 본 도서관 불빛은 그저 공허했다. 취업포털 인크루트가 지난해 상장기업 350개사의 채용인원을 분석한 결과, 1만3799명 가운데 여성은 20.1%인 2770명뿐이었다. 경기불황이 여전한 올해도 별반 다르지 않을 듯싶다. 여성 법조인과 여성 교사들이 늘어나고, 대입 시험과 대학 학과 성적에서도 여성..
*스포일러 많음 영화 를 본 이들은 주로 두 가지 반응을 보였다. 먼저 속았다는 생각이 든다고들 했다. 에서 여성의 시각을 바탕으로 수컷의 욕망을 계보학적으로 밟아 올라갔던 박찬옥 감독이 7년 만에 나타나 형부와 처제의 금기된 사랑을 다룬다! 그것도 '탐나는 도다'에서 싱그러우면서도 섹시한 매력을 잔뜩 뿜어냈던 서우가 출연한다! 커다란 눈망울을 물끄러미 뜬 서우가 "이 사람 사랑하면 안 돼요?"라고 말하지 않는 듯 말하는 포스터까지! 영화가 극단적인 욕망의 소구점을 한껏 파고들어가 줄 줄 알았는데… "낚였다"며 허탈해 했다. 영화에서 시종일관 등장하는 안개처럼 그저 뿌옇다고도 했다. 인물 간의 감정 교차가 명확지 않았고, 오가는 대화조차 겹치지 않고 따로 논다는 푸념이었다. 영화평론가 남다은은 "를 치밀..
이재훈의 인앤아웃 no.12 드라마 의 몰입도가 점점 차오른다. 헝가리와 일본, 중국을 오가는 해외 로케, '불친절한 작가들'이라고 불릴 정도로 빠른 감정전개 속도가 숨막힌다. 이병헌과 김태희, 김소연과 김승우라는 주목도 높은 배우들이 보여주는 연기의 변화 혹은 진화도 눈길을 끈다. 영화 의 원작자 로버트 러들럼을 당당하게 오마주했다고 밝히는 작가들의 말처럼 현준(이병헌)의 모습에서 내내 제이슨 본(맷 데이먼)을 떠올릴 수 있었다. 의 플롯도, 의 냄새도 스토리에 드러내놓고 녹아있다. 무엇보다 에서 눈길이 가는 건 현준의 캐릭터다. 와 같은 한바탕 영웅주의 첩보액션을 기대했던 이들에게 현준은 "요원으로서의 충성심이나 투철한 애국심, 그런 거 잘 모른다"며 뒤통수친다. 자신을 죽이러 왔다 포로가 된 북한 ..
이재훈의 인앤아웃 no.11 한국 현대사는 질곡이었다. 좌와 우의 대립은 동등한 지위에서 충돌한 적이 없다. 우는 주로 권력을 잡았고, 좌는 그 권력을 견제하는 세력으로 기능했다. 이론과 사유를 바탕으로 한 신념이 정반합을 거치며 발전하는 과정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인간은 누구나 사유를 바탕으로 개별적인 정치적 견해를 가질 수 있다는 명제는 통하지 않았다. 권력을 잡은 자에게 굴종하느냐, 그렇지 않으냐는 폭력적 관계 기제만 작동했다. 분단의 비극과 이를 활용한 국가 권력에 의해 말 한마디 ‘잘못’했다 어디론가 끌려가거나 혹은 밥그릇을 뺏기는 이곳에서 정치적 신념에 충실한 선택과 소신은 표현되기 어려웠다. 그리고 문득 한국 사회에서의 ‘정치적 선택’이란 개념은 사유나 신념에 근거한 이념 그 자체가 아니라,..
이재훈의 인앤아웃 no.10 길로 폰테코르보 감독의 영화 는 프랑스 제국주의의 식민지배를 받았던 알제리의 민족해방전쟁을 그리고 있다. 네이팜탄 폭격에 의해 무고한 민간인이던 친인척을 잃어야했고 자기 삶의 터전에서 프랑스인들에게 "더러운 아랍놈"이란 말을 듣고 살아야했던 알제리인들은, 시대의 야만과 무너진 자존감에 대한 분노를 알제리민족해방전선(FNL)에 대한 지지로 해소한다. FNL은 저항의 첫 수단으로 테러를 선택한다. 이에 프랑스는 1957년 공수부대를 투입해 알제리인 거주지역을 게토로 만들고 무차별로 거주민을 검거한 뒤 고문이란 극단적 수단까지 동원해 FNL 조직을 붕괴시킨다. 그러나 민중은 사라진 FNL의 저항정신을 잊지 않았다. 3년 뒤의 민중 봉기와 그에 따른 2년 뒤의 독립 쟁취는 그 저항정..
이재훈의 인앤아웃 no.9 2008년 6월 밤. 경찰청사 지하 강당에선 머리를 바투 깎은 전·의경들이 진압복을 입고 칼잠을 잤다. '광우병 쇠고기 반대 촛불집회'를 막기 위해 지방에서 동원된 그들에겐 숙소가 없었다. 초여름 밤 열기와 습기는 지하에서도 뜨거웠다. 모기가 진압복을 파고들어가도 그들은 침낭 하나만 깔고 금세 잠들었다. 며칠 제대로 씻지 못한 얼굴엔 땟국물이 묻어났다. 장민철(22·가명)씨는 지난해 8월 의무경찰 복무를 마쳤다. 제대 전까지 그는 뜨거웠던 2달 동안의 촛불을 바라보며 매일 광화문에 섰다. 시위대가 '명박산성'을 넘고 청와대로 가서 졸속협상에 대해 캐물으려 할 때, 그는 시위대와 경찰 지도부 사이에서 방패를 들었다. 시위대는 장씨에게 정부의 잘못을 질타했고, 경찰 지도부는 그에게..
아동 성폭력을 말할 때 우리의 방점은 ‘성’에 찍힌다. 그 다음은 ‘아동’이다. 어떻게 그렇게 어린 ‘아이’에게 그런 ‘성’적인 행동을 하느냐가 첫 반응이다. 이때 가장 중심이 돼야 할 ‘폭력’이란 개념은 어느덧 가려진다. 아동 성폭력에서 외부적 상처는 일부에 불과하다. 폭력에 의해 덧난 정신적 상처는, 씻기 어려운 평생의 굴레다. 8일 아동 성폭력 상담과 치료, 법률지원을 맡고 있는 서울 마포구 해바라기아동센터 김태경 임상심리전문가를 만나 우리의 선입견에 따끔한 죽비를 맞아봤다. 김태경 임상심리전문가는 해바라기아동센터 개소 때부터 상담과 치료, 법률과 수사지원을 맡아왔다. 카톨릭대 심리학과 대학원 박사과정에 있으면서 성폭력 피해 아동에 대한 여러 건의 논문을 썼다. 올 초엔 '진술조사의 맥락에서 본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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