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순 글래머’는 한국 남성이 욕망하는 전형적인 여성상이다. 몸은 빵빵하고 얼굴은 예쁘되 남성을 압도하지 못하는 수동성을 지닌 여성. 그런 한국 사회에서 ‘당당하다’는 평을 호평으로 듣는 여성은 흔치 않다. 가수 이효리는 그런 흔치 않은 여성 중 하나다. 이효리는 섹시함과 당당함을 공유한 스타임에도 팬층의 지지는 젠더를 막론한다. 정치적 발언을 서슴지 않는 여성 역시 한국 사회에서 환대받기 어렵다. 대부분의 사회적 약자가 그렇듯, 여성 역시 권리를 요구하는 주체로 나서는 순간 배척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가수 이효리에게는 정치적 발언마저 트렌드로 만드는 힘이 있다. 채식을 하고 동물권을 외치는 이효리의 행동은 채식의 철학과 동물 보호의 정치 위에 세련된 스타일을 입힌다. 심지어 직접 기른 작물을 먹고사는..
평지 기온이 영하 9도였던 13일 새벽, 쌍용차 해고 노동자 2명이 평택공장 굴뚝에 올랐다. 2009년 대규모 정리해고 뒤 5년을 싸웠다. 26명의 동료와 가족이 세상을 떠났다. 사법부와 행정부, 국회는 그들을 돌아보지 않는다. 벼랑 끝에 몰려 밟고선 곳이 칼바람에 ‘증기선처럼’ 흔들리는 폭 1m 도넛형 굴뚝 위다. 하지만 그들은 “함께 살자”며 여전히 희망을 말한다. 그들의 희망은 “공장 안 동료들”과 굴뚝 위를 바라봐줄 사람들의 반응이고 연대다.지배적인 반응은 희망을 말하지 않았다. 어떤 이는 “독한 사람들”이라고 했다. “우리의 강함을 증명하기 위해 70미터 굴뚝에 오르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약하고 나약한 존재이고 무서움 또한 많고 여린 인간인지를 알리기 위해 올랐습니다”라는 해고자 이창근의..
12일 오후 늦게 전화가 걸려왔다. 이창근 실장이었다. 평소 답지않게 잔뜩 흥분된 목소리였다. “공장 안 굴뚝에 올라갈 예정”이라고 했다. “눈도 오고 날씨가 이렇게 추우니 딱 이날이다 싶다”고도 했다. 나는 얼어붙었다. 아무런 대꾸를 하지 못했다. “이 추운 날 어딜 올라간단 말이냐”라는 말조차 할 수 없었다. 상투적라는 생각이 들었다. 굳은 결의같은 것으로 아드레날린을 분비시켜 잔뜩 부풀어오른 듯한 그의 목소리에서 숭고함이 느껴져서였을까. 섣부른 말로 하는 제지는 이미 통할 것 같지 않았다. 13일 새벽 2시52분. 전화가 걸려왔다. 공장 진입에 성공했고, 굴뚝에 절반 정도 올라왔다고 했다. 정상에 도착하면 다시 연락하겠다고도 했다. 묻지도 않았는데 “공장에 들어온 경로는 말할 수 없고요.” 그는 여..
공지영이 쓴 는 발행 두 달 남짓 만에 10만 부가 넘게 팔리며,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의 절박한 상황을 널리 알리고 있다. 이 책은 7년이 넘도록 복잡하게 이어져온 쌍용차 사태의 맥락과 사실 관계를 어느 정도 충실히 담은 한 권짜리 텍스트다. 그렇기에 줄지어 숨을 거두는 쌍용차 노동자들에 대해 단순한 동정의 시선이 아니라, 어떤 지점에서 함께 분노해야 할지 그 팩트를 알려주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도 풀리기 어려워 보이는 굴레도 안고 있다. 쌍용차 사태와 관련해 하종강과 이선옥이 이미 매체에 게재한 글을, 공지영이 에 인용된 여러 글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인용’했다는 논란이다. 다른 인용 글과 달리 본문에 인용 표기가 전혀 없다. 책 뒷부분 ‘출처 및 참고자료’에 하종..
지난 11일 경기 평택시 군문동 평택장례문화원 특 3호. 검은 소복을 입은 김정희씨는 아들 김철강(35)씨의 영정 앞에서 입술을 거의 열지 않은 채 몇 마디 말을 중얼대고 있었다. 메마른 입에서 조금씩 밖으로 세어나오는 그의 말은 드문드문 들렸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 하고 싶은 거 다 해주면서 왕자처럼 키웠는데…. 해주고 싶은 게 더 많았는데 저렇게 한순간에…. 내가...” 빈소 밖에서 김철강씨를 추모하기 위해 기다리던 조문객들은 차마 그런 김정희씨를 말리지 못했다. 어머니 외엔 가족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상주 자리에 앉은 김철강씨의 이종 사촌도 그런 김정희씨를 건드리지 못했다. 아무도 김정희씨의 긴 조사에 개입할 수 없었다. 하루 전인 10일 오후 3시께 경기 평택시 비전1동 ㅈ아파트. 김정희씨는 식..
*쌍용자동차 투쟁 다큐 영화에 대한 두 번째 보고서 지난 22일 1년 만에 다시 만난 신동기(34)씨의 얼굴은 까맣게 그을려 있었다. 소주잔을 기울이며 그에게 물었다. “요즘 정육점 일은 어떠신가요?” 하지만 그는 쓰게 웃으며 “그만둔 지 오래 됐습니다”라고 말했다. 2009년 여름, 해고 대상자가 아니면서도 77일 동안의 뜨거웠던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반대’ 옥쇄파업에 동참했던 그는 같은 해 11월 회사에서 파업 참가를 이유로 해고 통보를 받았다. 일자리는 쉽게 구해지지 않았다. 그에겐 이미 ‘강성’ 쌍용자동차 노동조합의 해고 노동자라는 ‘낙인’이 찍혀 있었다. 아무도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아이 셋을 키워야 했다. 학교 선배의 도움으로 월급 130만원을 받고 정육점에서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20km..
그날도 여느 날과 다르지 않은 오후였다. 그즈음 나의 머리는 미디어에 하루가 멀다 하고 등장하는 온갖 죽음과 그 죽음의 서사들이 복잡하게 얽혀 한없이 무거웠다. ‘해고 트라우마’, ‘업무 스트레스’, ‘생활고’, ‘성적 비관’ 등의 범주들로 어쩌면 단순하게 분류된 죽음들은 때론 뜨거운 한탄과 함께, 때론 차갑도록 묵묵히 하나의 인간사로 미디어에 기록됐다. 한명의 인간으로 제대로 눈길조차 받지 못하던 인간들이, 마침내 죽음에 이르고 난 뒤에야 한명의 인간으로 기록되는 지독한 역설 앞에서 나는 그저 무기력했다. 그 죽음 뒤에 가려진 서사들은 오롯이 개별적일테지만, 어느덧 하나의 보편으로 묶인 채 나를 오래 짓눌렀다. 하지만 나는 그 보편성을 어떤 언어로 규합해야 할지 선뜻 떠올리지 못했다. 그러던 내게 가슴..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정리해고에 반대하며 옥쇄파업을 했다가 77일만에 파업을 푼 지 어제 밤으로 정확히 1년이 됐다. 그 날도 이렇게 비가 흩뿌렸다. 생각이 많아져 잠을 자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1년 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기고했던 르포르타주를 다시 한 번 읽어봤다. 그들은 지금 어디에서 뭘하며 살고 있을까. 고동석(38·가명)씨는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워물고 있었다. 50m 옆 언덕 위, 수원 경기경찰청 앞에선 쌍용차 옥쇄파업에 함께했던 동료 60여 명이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고 있었다. 그는 정리해고 대상자 976명에 포함되지 않은, 비해고 대상자였다. ‘산 자’로 불렸다. 16년 동안 쌍용차에서 일했다. 그동안 쌍용, 대우, 상하이차, 그리고 다시 쌍용으로 경영 주체만 세 차례 바뀌었..
쌍용자동차 투쟁 다큐 영화에 대한 작은 보고서 2008년 초여름은 광우병 쇠고기를 반대하는 촛불로 뜨거웠다. 10대부터 노년층까지 시민들은 광화문에 꾸역꾸역 모였다. 21년 만에 100만명이 군집했다. 그러자 곳곳에서 분석과 해석이 난무했다. '저들의 군집화를 이끈 동력이 과연 무엇일까'가 관건이었다. '1980년대 민주화 운동과 달리 이번 촛불은 군사정권과 같은 명확한 투쟁의 대상이 없지 않느냐'가 고민의 시작점이었다. 하지만 정부는 그리 오랜 시간을 들이지 않고도 분석의 틀을 금세 찾아내 공격 대상을 정하고 탄착점을 포착했다. '분명 저들을 이끈 배후가 어디엔가 있을 것'이라는 게 정부의 판단이었다. 대통령은 "저 양초들은 누구 돈으로 샀고 누가 주도하는지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경찰은 집회를 '주도..
혜원이는 초록 풍선을 거머쥔 손을 꼬물거렸다. 세상에 난 지 28개월됐다. 막 ‘아빠’란 말을 조그만 입으로 오물거릴 때다. 하지만 아이는 “아빠, 보고 싶어”라고 또박또박 발음했다. 20여 일째 아빠를 보지 못했다. 그래서 철조망과 폐 트레일러로 가로막힌 공장 밖에서 풍선을 띄웠다. 아빠는 하늘을 볼 여유가 있었을까. 그 시각 아빠 박일규(40)씨는 온갖 살인무기가 오가는 경찰과의 격렬한 충돌 현장에 서 있었다. “전기가 끊겨 충전이 어려운지 짧게 통화했어요. 위험하니 아기 데리고 집에 가라더군요. 더 위험하면서…” 엄마 김향금(27)씨는 메마른 날숨을 길게 내뱉었다. 아무도 그를 달랠 수 없었다. 악다구니가 벌어졌다. 사측 직원들과 진압을 위해 고용한 용역들이 ‘정상조업’이라 적힌 주홍 완장을 차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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