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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정리해고에 반대하며 옥쇄파업을 했다가 77일만에 파업을 푼 지 어제 밤으로 정확히 1년이 됐다. 그 날도 이렇게 비가 흩뿌렸다. 생각이 많아져 잠을 자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1년 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기고했던 르포르타주를 다시 한 번 읽어봤다. 그들은 지금 어디에서 뭘하며 살고 있을까.


고동석(38·가명)씨는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워물고 있었다. 50m 옆 언덕 위, 수원 경기경찰청 앞에선 쌍용차 옥쇄파업에 함께했던 동료 60여 명이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고 있었다. 그는 정리해고 대상자 976명에 포함되지 않은, 비해고 대상자였다. ‘산 자’로 불렸다.

 

16년 동안 쌍용차에서 일했다. 그동안 쌍용, 대우, 상하이차, 그리고 다시 쌍용으로 경영 주체만 세 차례 바뀌었다. 다른 차 회사들이 첨단기술을 동원할 때, 쌍용차는 그런 의지를 보여줄 주체가 없었다. 상하이차 땐 한국에 와 있는 중국인 재정 담당 상무가 기술개발 건을 결재해주지 않았다. 임원들은 눈치만 볼 뿐, 아무런 대응도 못했다. 결국 하청업체보다 장비 수준이 더 낙후됐다. 회사 동료와 나누는 얘기는 매번 회사의 어두운 미래였다.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그 희망이 회사를 위한 희망인지, 나 자신을 위한 희망인지도 명확하지 않았다.

 

5월 정리해고 명단이 나왔다. 매년 여름 가족과 함께 여행을 다녔던 동료 2명이 해고 대상이 됐다. 누구나 일 잘한다고 엄지를 추키던 그들의 해고는, 정리해고가 과연 회사를 위한 것인지 의심케 했다. 그리고 곧, 언젠가 저런 ‘기준 없는 기준’이 나를 옭아매지 않을까, 걱정됐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구분은 일시적인 나뉨일 뿐, 언젠가 나도 ‘죽은 자’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회사의 미래가 걱정되는 건지, 나의 미래가 걱정되는 건지, 그는 가늠할 수 없었다. 하지만 혼란과 절망만 탓하며 앉아 있을 순 없었다. 옥쇄파업 동참은 그렇게 시작됐다.

 

장인과 장모, 매형이 매일 회사 앞에 찾아와 “네가 왜 거기 있느냐”고 말렸다. 하지만 “나가면 잠시 편할지 몰라도 평생 가슴에 부채를 안고 살아야 한다”며 고개를 저었다. 옥쇄파업 38일째인 6월27일, 관제데모가 열리고 노노 갈등이 폭발하기 시작한 그날, 그는 용역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뒷목을 맞고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떠보니 병원이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끝날 줄 몰랐다. 2006년 산별 금속노조가 출범했지만, 쌍용차는 큰 사업장에 밀려 그 안에서도 ‘군소’ 단위에 불과했다. 지금도 그는 금속노조원들이 절반만 연대했으면 투쟁의 방향이 이렇게 흘러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현대·기아·대우차 지회원들은 끝내 총파업으로 연대해주지 않았다. 원망보단, 아쉬움이 든다고 했다. 그는 이날 구속자 석방 요구 집회에 동참하지 않았다. 공중에 붕 뜬 기분이 든다고 했다. 그런 혼란을 집회하고 있는 동료들에게 털어놓을 순 없었다. 그래서 스스로 소외됐다.

 

서상우(32·가명)씨는 삭발한 머리가 여전히 파릇했다. 경찰이 뿌린 최루액이 들어가는 바람에 염증이 생긴 왼쪽 눈은 수술을 받고도 벌겋게 충혈돼 있었다. 하지만 눈이 충혈된 건 비단 최루액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그의 열변은 점점 무게를 더해갔다.

 

그도 역시 ‘산 자’였다. 하지만 77일 동안 끝까지 옥쇄파업 현장을 지켰다. 그저 눈 한 번 질끈 감으면,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이해해주지 않을까, 라는 자위는 그에게 통용되지 않았다. “사람이라면 그럴 수 없죠. 인간적인 도리까지 저버리면서 돈을 벌라면, 차라리 도둑질을 하고 맙니다. 내가 똥을 푸더라도 당당하게 돈 벌어서 애들 키우고 싶었어요. 쇠고기 먹고 싶으면 돼지고기 먹으면 되고, 그게 안 되면 닭고기 먹으면 됩니다. 단계를 낮춰가며 살면 되는데, 내가 나 하나라고 쉽게 외면하면, 곧 전체가 그렇게 외면하고 말잖아요.”

 

그도 흔들리지 않았던 건 아니다. 더운 여름 공장에서 칼잠을 자는데 누군가의 코고는 소리에 잠을 설칠 때, 불침 근무 조금 늦게 나왔다며 바짝 날선 신경으로 누군가 타박 줄 때, 별로 남아 있지 않은 식량에 누가 밥을 많이 먹었네 견주며 승강이 벌일 때, 누군가 눈치 보면서 “밖에서 연락 왔는데 나오면 잘해준다더라”고 한숨 내뱉을 때…. 투쟁의 대상은 밖에 있는데, 또 다른 나와의 싸움에서 흔들리며 주변에서 내부의 적을 찾고 있는 나와 우리의 모습은 그 자체로 고통이었다.

 

하루는 해고 대상자가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앞다퉈 싸워야 하는 사람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저 사람도 어쩔 수 없겠지 싶기도 했다. 갑자기, 밖에서 애들 셋을 키우며 버티고 있는 아내가 생각났다. 아내는 먼 친척들에게까지 “왜 상우가 들어가 있느냐”는 전화에 내내 시달리고 있었다.

 

나와서도 공황 상태는 인이 빠지지 않았다. 아파트에서 작업복 입고 출근하는 동료를 만나면 눈이 저절로 치켜떠졌다. 부서의 차장은 “전화할 때까지 회사에 나오지 마라”고 했다. 대기발령이었다. 지인이 시간당 6천원짜리 아르바이트라도 해볼래, 라고 조심스레 물었다. 이 나라를 떠나야 하나 싶은 생각마저 자꾸만 든다.

 

그들은 ‘산 자’의 이름표를 달고 ‘죽은 자’와 함께 연대했다. 끝내 옥쇄파업 현장을 지켰던 500여 명 중 72명이 그랬다. 연대의 이유에는 희망 없는 회사에 대한 걱정도, 불투명한 자신의 미래에 대한 막막함도, 옆에 스러진 동료를 보는 분노도 교차했다. 다만 그들에게 ‘산 자’의 이름표는, 비해고 대상자로서 나만은 살아남았다고 안심할 수 있는 보증서가 아니었던 것만은 분명했다. ‘산 자’로서의 그들은, 안도보다 먼저 옆에 있는 ‘죽은 자’들을 돌아봤다. 그들은 나와 너를 구분하지 않았다. 내 것이 내 것일 수 있을 때, 나의 밥벌이가 유지되고, 그게 바탕이 되어야 비로소 너의 삶을 돌아볼 여유를 가질 수 있다는 우리의 일반론을, 그들은 온몸으로 거부했다.

 

그들에게 너는 미래의 나였다. 너의 현재적 죽음은, 내일 나에게 일어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는 미래였다. 그들에게 ‘죽은 자’는 또 다른 나였고, 연대를 거부했던 ‘산 자’도 결국 미래의 ‘죽은 자’일 수 있는, 제3의 나였다. 이 때문에 그들은 ‘산 자’로서의 개별적 지위를 버리고, 옥쇄파업 현장에서 연대해, 너를 위한 싸움을 곧 나를 위한 싸움으로 구현했다.

 

하지만 그들의 상식은 자본과 공권력엔 비상식이었다. 이타적 연대에 가해진 자본과 공권력의 체벌은 그래서 혹독했다. 자본과 공권력에 스스로의 이익을 저버리는 이타적 연대는, 이해할 수 없는, 그저 ‘빨간색’으로 덧칠해 시야에서 거둔 채 해석할 가치조차 없는, 타자의 행위 방식이었다. 일반론을 부인한 대가는 컸다. 하지만 내몰린 그들을, 그 어떤 연대도 돌보려 하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부유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내몰렸다.

 

한울노동문제연구소 하종강 소장에 따르면, ‘정의로운 이타적 개인’은 연대 조직이 끌어안아야 할 대상이다. 노동 선진국에선 이타적 연대에 나섰다 자본에 의해 ‘체벌’당한 개인을 내버려두지 않는다. 유럽의 경우, 산별노조 전체 노조원이 몇만분의 1씩 월급을 쪼개서 해고 노동자들을 책임지는 ‘파업수당’ 제도가 공고화해 있다. 산별노조는 기업별 단위가 아니라 지역별 단위로서, 정규직과 비정규직, 게다가 퇴직 노동자까지 규합해 고통 분담을 위한 규모의 경제를 발동한다. 이런 사회적 합의 틀 안에서 연대의 존재는 한 사업장의 투쟁에 다른 사업장 노동자가 거리낌없이 참가할 수 있는 길을 터준다.

 

하지만 한국은 산별노조 전환 과정에서 이런 제도를 정립하지 못했다. 일본과 함께 전세계 유이한 기업별 노조를 가진 한국에 유럽형 산별노조 방식은 여전히, 진통이다. 산별노조 산하 대기업 단위 지회는 사업장별 조직을 지역별 단위로 전환하기를 꺼렸다. 연대의 틀은 상대적으로 범위가 좁아졌다.

 

식민지 40년과 분단 60년 동안 유례없이 파행적으로 진행된 한국의 천민자본주의 속에서 연대의 가치를 설득력 있게 학습해내지 못한 점이 문제였다. 노동 선진국에선 제도권 교육에서 ‘미래에 소수의 몇을 제외하면, 현장 노동자가 될 수밖에 없는’ 아이들을 위해 노조와 그 안에서의 연대 필요성을 학습시킨다. 하지만 쌍용차의 경우, 5천 명이 노동시간을 단축해 인건비를 절감하는 방식이 지역경제를 위한 공존의 길이라는 안목조차 공유하지 못했다. 되레 1천 명을 내쫓아야 회사가 산다는 자본의 논리가 그대로, 사측에 부합한 노동자의 논리로 대체됐다. 이명박 정부가 노동운동 탄압의 강도를 높이는 만큼, 한 사업장의 투쟁에 다른 사업장 노조원들이 동참하려면 “남은 인생을 포기해야” 하는 처지에 이르러도 아무런 안전장치가 없게 됐다.

 

과연 노동 현장에선 이런 ‘악마의 맷돌’(1)을 밀어낼 ‘나눔의 연대’가 가능하다고 생각할까. 현장 노동이론가인 민주노총 하부영 전 울산지부장에게는 긍정과 부정이 양가적으로 교차한다. 전화를 받은 하 전 지부장은 대뜸 “쌍용차에 대해 제가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여기 가만 앉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그저 미안함밖에 없어요”라고 했다.

 

그는 연대의 틀거리를 짜는 데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점에서부터 이야기를 풀어갔다. “한국형 산별노조는 유럽형 산별노조를 기계적으로 모방했지만,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이를 희생적으로 감수할 틀거리를 공감시키는 데 실패했다. 내전과 혁명, 계급전쟁을 치르며 노동계급의 힘을 공고화해온 유럽과 달리 한국엔 동류의 경험이 없다는 현실이 쉽게 깨기 힘든 벽이었다. 사회적 안전망 구축 등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요구에 대해 무작정 ‘정치파업’이라는 레테르를 부여하는 척박한 천민자본주의 현실에서 노동자들에게만 정규직과 비정규직, 퇴직 노동자들을 모두 끌어안을 이타심을 주문하기도 일단은 무리”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결국 현장에서의 개인은 공허하다. 싸움은 패배했고, 남은 자들은 그저 혼란스럽다. 쌍용차 창원공장에서 올라와 77일 동안의 옥쇄파업 현장을 끝까지 지킨 또 다른 비해고 대상자 김홍식(36·가명)씨는 경찰 수사를 받고 나오며 말했다. “솔직히 말해 비참하다는 생각이 들죠. 안 그러면 사람인가요. 잘되어서 나왔으면 좋았을 텐데, 요구했던 것도 이루지 못하고 밀려나 내팽개쳐졌으니까요. 다음에 이런 일 있으면 그냥 사표 쓰고 말자, 뭐 하려고 이 고생 하냐는 얘기도 합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렇게 약해져선 안 된다는 생각이 다시 번쩍 듭니다. 이렇게 흔들리고 그래야 사람이겠죠. 사람이 그러면서 성숙해지는 거 아닐까 싶기도 하고….”

 

급히 말을 마치고 창원으로 가는 열차를 타러 그는 종종걸음을 쳤다. 소금기 젖은 등에는 피로와 혼란, 분노와 아쉬움이 언뜻 묻어났다.



<각주>  

(1) 헝가리 출신 미국 경제학자 칼 폴라니가 저서 <거대한 전환>(1944)에서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를 인용해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 인간 본연의 공동체적 심성과 질서를 맷돌에 갈아넣어 없애버리는 시장경제의 속성을 경고하고 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9년 9월호에 실렸음.

댓글
  • 프로필사진 해지는풍경 태풍의 흔적이 지워지지 않은 흐린 하늘만큼이나 무겁네요 2010.08.12 09:58 신고
  • 프로필사진 B급 낭인 [이재훈] 요즘 이 분들 중 일부는 대리운전을 하기도 하고, 정육점에서 일하기도 하는 등으로 어디에선가들 살아가고 계시답니다. 물론 지난 번 기사가 나온 것처럼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어렵게 지내시는 분들도 있고요. 마음이 여전히 무겁습니다. 2010.08.12 11:13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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