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유와 제제 논란에 대해 쓴 글을 보고 선생이 전화를 해오셨다."전문가적 논리와 대중의 아마추어적 논리가 있는데, 후자가 비루해 보이겠지만 그곳에 권력 기제가 있다.""대중들이 발끈하는 지점은 무엇일까? 기획사와 대중 문화 권력에 수동적이던 개인들이 무의식 중에 강자의 논리를 체현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라는 부분을 좀 더 세밀하게 살펴봤다면 어땠을까""지금은 그런 현상학은 없이 이른바 '논객'들이 선명성 경쟁만 하고 있는 것 같다.""글을 쓰기 위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토해내기 위해 글을 써라. 글을 쓰기 위해 생각하는 양식주의는 정서적인 힘이 없다."내 속에 갇혀서 자기 객관화를 하지 못하고 있으면, 언제나 그 지점을 면도날같이 짚어주신다.갈무리를 위해 블로그에 담아둠.
박원종 이준엽 에게. 요즘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다. 병치레를 하다보니 운동을 하지 못해서 몸이 무거웠다. 이것저것 알아보니 자전거만한 운동이 없는 것 같다. 자전거를 타고 나서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고 나면, 조금은 덜 피로하게 일주일을 버텨낼 근육이 붙은 것 같다고 생각한다. 맨날 의자에 걸터앉아 글줄이나 끄적대고 있는 내게 참으로 소중한 가욋일이다. 참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엉덩이와 허벅지, 무릎에 한껏 힘을 주고 패달을 밟아도 우리가 함께 대구 단산지 둘레길-지금 생각하면 그 길은 정말 훌륭한 둘레길이 아니었나 싶다-을 돌던, 파계사로 넘어가는 가파른 오르막을 오르던, 그때와 같은 속도로 자전거가 나아가질 않는다. 한강은 한없는 평지길인데도 말이다. 나 어릴 때 쓰던 자전거가 지금 가지고 있는 자..
다원화한 사회에서 다양한 정체성의 대항 헤게모니화는 어찌 보면 필연이다. 세상은 더 이상 ‘노동자 계급’만의 정체성으로 전복할 수 있을 정도로 일원화한 세계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세력은 다양한 정체성을 바탕으로 분산되어 있다. 노동 운동 외에 여성 등과 같은 성적 소수자 운동, 이주노동자와 인종 차별 반대 운동, 녹색 운동, 장애인 운동 등 다양한 영역에서 각자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는 고정되지 않은 이들이 각자의 불평등 관계를 타파하기 위해 투쟁하면서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과정, 그것이 바로 대항 헤게모니를 구축하는 과정이다.여기서 문제는 이 정체성들 사이의 관계는 과연 수평적이어야 하는 것인가, 이다. 정체성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불평등을 타파하는 것만으로 해방은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복..
내 어린 시절을 강력하게 호출하는 냄새는 비린내다. 아버지의 벌이만으로 먹고 살 수가 없었던 어머니는 내가 여섯 살 때 5평 남짓한 크기의 아파트 상가에 사글세를 얻어 횟집을 열었다. 뭍밖에 없는 대구에서 회 장사를 하려면, 매일 아침 시외버스를 타고 왕복 세 시간 거리의 포항 죽도시장을 다녀와야 했다. 어머니는 한 순간도 검게 찌든 바닷물이 마르지 않는 어시장 바닥을 휘젓고 다니며 싱싱하면서도 싼 횟감을 찾았다. 그런 어머니의 몸에선 늘 시큼하고 짠 바닷물, 그리고 썩은 생선 냄새가 났다. 어쩌다 어머니의 허벅지를 베고 누우면, 그 비린내가 자욱하게 내 코를 찔렀다. 그리고 가끔은 그 냄새에 피비린내가 섞이기도 했다. 몸쓰는 일을 하던 아버지는 갓난 아기 때 어미를 잃었다. 계모에게 핍박받고 네 명의 ..
인간이 한 사람으로서 온전히 자유롭기 위해선, 모든 관계를 단절한 채 지낼 수 밖에 없다. 관계에 개입하는 이상, 나의 완벽한 자유는 타자로부터 틈입을 당해 나와 타자의 간극 속으로 유리된다. 자폐적 개인이 되지 않는 이상,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나는 끊임없이 목소리를 곤두세울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때론 나의 것이지만, 때론 타자의 것이기도 하고, 때론 나와 타자의 것이 뒤섞인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철저히 개별적인 1대1 관계에서 나는 가끔 타자를 배제하고 나만을 위한 목소리를 내려는 나를 발견하고, 움찔 뒤로 물러선다. 그리고 한참을 웅크리고 있다가, 나만을 위한 목소리를 내려는 나의 욕망이 어느 정도 수그러들었을 때 다시 앞으로 한 발짝 다가선다. 그런 나를 보는 1대1 관계에..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는 일요일 오전만 되면 나와 남동생을 데리고 목욕탕에 가자고 했다. 하지만 나는 이불 속에서 TV 에니메이션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과 ‘태양소년 에스테반’을 봐야한다고 몽니를 부렸고, 기어이 그것들을 모두 보고난 뒤에야 목욕 가방을 들었다. 이 에니메이션들이 내게 방랑의 꿈을 키웠고, 그 꿈의 목적지를 실재로 만드는 데 일정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방랑의 꿈은 아주 미욱하게 이뤘을지 모르나, 목적지는 아직 가닿지 못했다. 그래도 가끔은 그 시절의 그 생각들과 그 몽니가 그립다.
메트로신문에서 1년 남짓 글 쓰며 대중과 지근거리에서 호흡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허섭한 글 실력으로 '인앤아웃'이란 칼럼을 쓰고, 그 글에 호응하는 대중과 멀리서나마 글에 대한 글을 주고받으며 함께 사유하고 고민했다. 그런 점에서 '인앤아웃'은 나만의 글이 아니라, 공동 저작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인앤아웃'을 쓸 수 없게 됐다. 서울신문과 메트로신문을 거쳐, 이제 한겨레신문이라는 세 번째 일터에서 일하게 됐기 때문이다. 한때는 막연하게 꿈꿨던 곳이고, 같은 공간의 경쟁사에서 일하던 시절엔 막역하게 지내는 사람들이 가장 많았던 곳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부쩍 비판적 눈길로 바라보게 되는 곳이기도 하다. 나는 '그 조직을 바꾸기 위해 호랑이 굴에 들어간다' 따위의 말을 던지진 않..
우리는 죽을 때까지 아기다 그는 부모에게 버림받았다. 할머니와 둘이 산다. 할머니는 대화의 상대라기 보단 의식주의 의존대상일 뿐이다. 주로 게임을 하고 공포물을 보며 불에 타 죽는 꿈을 꾼다고 했다. 게임, 즉 가상의 공간은 그가 유일하게 자신감을 갖고 타인과 소통하는 창이다. 공포물은 관계 맺기에 미숙한 그가 꿈꾸는 상상 속 인간관계의 틀이다. 삶에서 우리는 늘 주변인들로부터 긍정적인 면은 인정을 받고 부정적인 면은 자극을 받으며 진로를 조정해나간다. 하지만 그는 실재적인 관계를 맺는데 서툴다. 친구가 없다. 공포물은 그런 그가 관계를 맘대로 조종하고 통제하며 관계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다고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이다. 전기톱으로 사람을 살해하는 영화 장면을 반복적으로 반추하며 떠올리는 그의 상상은, 흉..
그는 소리없이 오열했다. 5년 동안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눈물이었다. 따뜻한 봄볕조차 미치지 않는 차가운 땅 속으로, 삼베천으로 꽁꽁 싸인 그의 어머니가 무명천을 지지대 삼아 천천히 들렸다가 조금씩 내려졌다. 몸 크기에 맞게 파낸 줄 알았던 홈이 작아 몸이 다시 들렸다. 인척들은 혀를 차며 인부들을 나무랐다. 손에 박인 굳은살보다 더 무뚝뚝하던 인부들의 표정이 새파랗게 변하며 연방 "죄송합니다"를 되뇐다. 아래쪽을 삽으로 더 파내고서야 인척들의 표정이 풀린다. 횟가루가 섞인 차가운 흙이 그 위에 흩뿌려졌다. 160cm가 채 될 것 같지 않은 몸은 그렇게 부분 부분 세상과 이별했다. 관 뚜껑을 5등분한 듯한 나무판자가 홈 안에 몸을 봉인했다. 사고로만 남아있던 죽음이 땅밑으로 내려가는 순간 몸으로 느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