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훈의 영화사회학] 와 ※ 영화 내용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 대한 고찰이다. 영화의 주인공은 6살 아들이 태어난 병원에서 다른 아이와 바뀌었다는 소식을 듣고 혼란에 빠지는 료타(후쿠야마 마사하루)다.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료타의 관점에서 카메라를 움직인다. 료타는 6살 아들 케이타(니노미야 케이타)가 친아들이 아니라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추스르자마자, 자신의 핏줄을 이어받은 친아들 류세이(황쇼겐)를 궁금해 한다. ‘대기업에 다니는 엘리트’로 세상의 평가를 받아온 자신과 달리 여러 가지 면에서 뒤처진 모습을 보였던 케이타에게 실망감을 느끼며 살아온 료타는 결국 케이타와 류세이를 교환하는 선택을 내린다. 하지만 사실 이 영화의 결정적 화자는 료타가 ..
소년은 알고 있었다. “엄마에게 나는 모든 것”이었다. 아빠는 언제나 집에 없었다. 아빠는 소년이 태어날 때부터 자주 집 밖을 겉돌았고, 5년 전부터는 아예 따로 살았다. 그럴수록 엄마는 소년에게 집착했다. 소년이 7살 때 엄마는 이미 소년을 ‘교육’하기 위해 매를 들었다. 오랜만에 집을 찾은 아빠가 여름에도 긴 바지를 입고 있는 소년의 모습을 의아해하면서 씻겨주려 옷을 벗겼을 때, 소년의 종아리와 엉덩이에는 피멍이 맺혀 있었다. 소년은 “괜찮아, 아빠”라고, 담담하고도 짧게 말했다. 엄마는 “아이를 왜 때리느냐”고 묻는 아빠에게 “애는 매로 다스려야 한다”고 말했다. 엄마가 사용한 폭력의 도구는 다양했다. 홍두깨로도 때리고, 야구 방망이로도 때리고, 골프채로도 때렸다. 그래도 소년은 자신이 엄마에게 “..
인간이 한 사람으로서 온전히 자유롭기 위해선, 모든 관계를 단절한 채 지낼 수 밖에 없다. 관계에 개입하는 이상, 나의 완벽한 자유는 타자로부터 틈입을 당해 나와 타자의 간극 속으로 유리된다. 자폐적 개인이 되지 않는 이상,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나는 끊임없이 목소리를 곤두세울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때론 나의 것이지만, 때론 타자의 것이기도 하고, 때론 나와 타자의 것이 뒤섞인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철저히 개별적인 1대1 관계에서 나는 가끔 타자를 배제하고 나만을 위한 목소리를 내려는 나를 발견하고, 움찔 뒤로 물러선다. 그리고 한참을 웅크리고 있다가, 나만을 위한 목소리를 내려는 나의 욕망이 어느 정도 수그러들었을 때 다시 앞으로 한 발짝 다가선다. 그런 나를 보는 1대1 관계에..
홍상수의 영화 가운데 나를 가장 불편하게 만들었던 건 였다. 헌준(김태우)이 강제로 성폭행을 당한 선화(성현아)의 몸을 손수 씻겨준 뒤 “내가 섹스해서 깨끗하게 되는 거야”라고 내뱉는 장면을 봤을 때, 나는 참기 힘든 불편함에 눈을 질끈 감았다. 홍상수의 위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장면이 위악이 아니고 비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성폭행을 당한 여자친구를 앞에 두고 인자한 자세로 “오빠는 괜찮아”라고 얘기하는 수컷들이 우리 주변에 산재해있지 않던가. 성폭력이 남성과 여성의 이데올로기적 권력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폭력이라는 사실은 수컷들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내가 '소유한' 성이 침범당했느냐 여부일 뿐이다. 그래서 수컷에겐 폭력에 의해 상처받은 여성이 겪을 고통은 ..
관계가 진정성을 가질 때 언어는 한없이 무거워진다 ※스포일러 많습니다. 매일 아침 포털 사이트에서 뉴스를 보며 하루를 시작한다. 왼손은 턱에 괴고 오른손은 클릭질하는 자세로 심드렁하게 창을 연다. 정치뉴스엔 별다른 관심을 쏟지 않고 곧 신경줄을 놓는다. 대체로 분노할 힘도 없이 썩소만 짓게 되기 때문이다. 경제뉴스에선 잘 알지도 못하는 숫자 놀음에 수십조 원이 요동친다. 클릭하면 그저 스스로가 얼마나 비경제적인, 그래서 2009년 대한민국 사회에선 얼마나 무식하기 짝이 없는 동물로 규정되는지 확인하는 거울 같아 슬쩍 외면한다. 물론 냉소와 외면만 있는 건 아니다. 각종 연예 뉴스에 검지가 빠르게 경련하기도 한다. 이런 뉴스는 자극적인 제목으로 사람들의 클릭질을 ‘낚기만’ 원할 뿐이야, 혹은 ‘…’로 끝맺..
*스포일러 있음 수컷의 관계맺음은 지배 혹은 굴종의 아비투스로 점철된다. 원시의 정글에서 수컷은 먹이 사냥에 더해 다른 수컷으로부터 사냥한 먹이를 빼앗거나 지킬 궁리도 해야 했다. 이때 수컷은 먼저 온전히 근육의 부딪힘으로 우위를 겨룬다. 힘이 센 수컷은 당연히 약자의 사냥감을 빼앗지만, 그렇다고 모두 빼앗진 않는다. 약자가 굶어 죽으면 결국 강자가 누릴 사냥감의 절대량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 틈을 이용해 약자인 수컷은 나름의 처절한 생존법을 배운다. 강자에게 “받들어총!”으로 굴종하면, 승산이 없는 힘겨루기를 했을 때보다 더 많은 비율의 먹이를 얻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결국 수컷들은 생태계의 먹이사슬 마냥 지배 또는 굴종했다. 현대의 수컷들도 진화하지 않았다. 게다가 근대의 가..
‘잘했군 잘했어’ 정애리를 통해 본 집착의 모성 인간은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서 해석된다. 내가 존재하고 내가 욕망하고 내가 살아가는 방식은 모두 너, 인간관계에서 체득했다는 걸 의미한다. 즉 나는 너다. 인간은 관계 속에 존재하지 않으면 해석될 의미가 없다. 아니 해석 자체가 불가능하다. 유태인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나와 너’에서 “‘나와 너’는 오직 온 존재를 기울여서만 말해질 수 있다. 온 존재로 모아지고 녹아지는 것은 결코 나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너’로 인하여 ‘나’가 된다. ‘나’가 되면서 ‘나’는 ‘너’라고 말한다. 모든 참된 삶은 만남이다”라고 했다. 인간은 타인의 존재 방식을 고려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그러면서 인간은 자신의 존재 의미를 비로소 깨닫게 된다. 여기 ..
아이들이 희희덕거린다. 모르는 아이들이 비웃는 건 꾹 참으면 된다. 하지만 매일 집에 같이 가는 ‘영희’가 나를 외면한 채, 반 아이들과 함께 웃는 모습은 견디기 힘들다. 배신감이 든다. 교탁 앞에서 엄마 대신 일일교사로 온 이모가 온갖 천을 덧댄 우스꽝스런 옷을 입고, 남들보다 굵은 특유의 목소리로 내 친구들에게 친한 척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친구들은 보편적인 모양새의 엄마나 이모를 원할 뿐, 독특함과 특별함, 그리고 다름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다들 어리니까. 세상을 다르게 보는 법보단, 세상이 어떻게 생겼는지 파악하는 법을 배우는 데 급급한 그저 아이들일 뿐이니까. 그래서 조금이라도 자신과, 아니 자신이 속해있는 집단과 다르다손 싶으면, 집단에 기댄 채 그 다른 존재를 비웃고..
그는 소리없이 오열했다. 5년 동안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눈물이었다. 따뜻한 봄볕조차 미치지 않는 차가운 땅 속으로, 삼베천으로 꽁꽁 싸인 그의 어머니가 무명천을 지지대 삼아 천천히 들렸다가 조금씩 내려졌다. 몸 크기에 맞게 파낸 줄 알았던 홈이 작아 몸이 다시 들렸다. 인척들은 혀를 차며 인부들을 나무랐다. 손에 박인 굳은살보다 더 무뚝뚝하던 인부들의 표정이 새파랗게 변하며 연방 "죄송합니다"를 되뇐다. 아래쪽을 삽으로 더 파내고서야 인척들의 표정이 풀린다. 횟가루가 섞인 차가운 흙이 그 위에 흩뿌려졌다. 160cm가 채 될 것 같지 않은 몸은 그렇게 부분 부분 세상과 이별했다. 관 뚜껑을 5등분한 듯한 나무판자가 홈 안에 몸을 봉인했다. 사고로만 남아있던 죽음이 땅밑으로 내려가는 순간 몸으로 느껴..
삶은 참 팍팍합니다.우리는 점점 나이가 들수록 내가 하고싶어하고 내가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일보다,남이 내게 해주길 바라는 일을 해야하는 비중이 더 커지는 삶을 살게 되는 것 같습니다.그와 비례해 우리가 점점 더 의존의 비중을 키워가는 건 바로 ‘관계의 힘’인 것 같습니다.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면서도,그나마 콱 막힌 가슴을 주물러주는 주변 사람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삶을 버텨나가는 힘을 얻습니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우생순)’은 스포츠 영화입니다.처음엔 반목하고 갈등하던 팀원들이 시간이 흐를수록 서로에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되고 결국 그 믿음을 바탕으로 예상치 못한 결과를 가져오는,어찌보면 뻔한 스포츠 영화의 스토리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습니다.평생 자신이 운동해온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새로운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