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는 조밀한 인간사에서 벗어나 세상을 조망하거나 관망하고 싶을 때, 사람들은 높은 곳에 오른다. 그러나 오히려 세상의 주목과 관심을 받으려고 높은 곳에 오르는 경우도 뜻밖에 많다. 특히 쉽게 알릴 수 없는 절실함을 표현하기 위해, 어떤 이들은 그 절실함만큼의 공포를 무릅쓰고 더 높은 곳으로 향한다. 그리고 어떻게든 타인의 무뎌진 공감을 얻어내려고 그 위에서 극한의 고난을 감내한다. 하지만 자극에 익숙해지면 더는 자극이 아닌 것처럼, 사람들은 이제 고공 농성이라는 공포와 고난을 택하는 이들을 익숙한 눈길로만 바라본다. 그들이 왜 그곳까지 올라갔는지에 대해서는 어느덧 관심을 갖지 않게 되었다. 그들이 올라가 있다는 현상만 희미하게 감지할 뿐이다. 은 그들이 공포와 고난을 택한 이유, 공포와 고난을 택할 수..
아비는 목에 턱받이 손수건을 둘렀다. 어미는 두어 개 남은 아비의 치아에 아래 위 틀니를 끼워 넣었다. 아들은 밥을 국에 말았다. 아비는 덜덜 떨며 입을 벌렸고, 아들은 수저에 뜬 밥을 아비의 입에 밀어 넣었다. 아비가 입을 오므릴 때마다, 입가엔 잔뜩 주름이 어렸다. 움푹 팬 뺨이 밥을 씹을 때마다 더 우물졌다. 아들은 힘겹게 밥을 넘기는 아비를 보며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아비도 밥을 씹으며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인상을 쓴 아비와 아들은 미간의 똑같은 자리에 비슷한 모양의 세로 주름을 그렸다. 주름의 깊이가 달랐다. 아들의 찌푸림에 짜증이 섞여 있었다면, 아비의 찌푸림엔 아무런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는 점도 달랐다. 병원 식당가의 다른 자리엔 다섯 가족이 둘러앉았다. 일흔은 훨씬 넘어 보이는 여성..
*쌍용자동차 투쟁 다큐 영화에 대한 두 번째 보고서 지난 22일 1년 만에 다시 만난 신동기(34)씨의 얼굴은 까맣게 그을려 있었다. 소주잔을 기울이며 그에게 물었다. “요즘 정육점 일은 어떠신가요?” 하지만 그는 쓰게 웃으며 “그만둔 지 오래 됐습니다”라고 말했다. 2009년 여름, 해고 대상자가 아니면서도 77일 동안의 뜨거웠던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반대’ 옥쇄파업에 동참했던 그는 같은 해 11월 회사에서 파업 참가를 이유로 해고 통보를 받았다. 일자리는 쉽게 구해지지 않았다. 그에겐 이미 ‘강성’ 쌍용자동차 노동조합의 해고 노동자라는 ‘낙인’이 찍혀 있었다. 아무도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아이 셋을 키워야 했다. 학교 선배의 도움으로 월급 130만원을 받고 정육점에서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20km..
그날도 여느 날과 다르지 않은 오후였다. 그즈음 나의 머리는 미디어에 하루가 멀다 하고 등장하는 온갖 죽음과 그 죽음의 서사들이 복잡하게 얽혀 한없이 무거웠다. ‘해고 트라우마’, ‘업무 스트레스’, ‘생활고’, ‘성적 비관’ 등의 범주들로 어쩌면 단순하게 분류된 죽음들은 때론 뜨거운 한탄과 함께, 때론 차갑도록 묵묵히 하나의 인간사로 미디어에 기록됐다. 한명의 인간으로 제대로 눈길조차 받지 못하던 인간들이, 마침내 죽음에 이르고 난 뒤에야 한명의 인간으로 기록되는 지독한 역설 앞에서 나는 그저 무기력했다. 그 죽음 뒤에 가려진 서사들은 오롯이 개별적일테지만, 어느덧 하나의 보편으로 묶인 채 나를 오래 짓눌렀다. 하지만 나는 그 보편성을 어떤 언어로 규합해야 할지 선뜻 떠올리지 못했다. 그러던 내게 가슴..
이재훈의 인앤아웃 no.33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건 고3 1학기 중간고사 때였다. 혈압이 높고 심장이 약했던 그는 심근경색으로 돌연사했다. 좁은 마당에 천막이 내걸렸다. 문상객이 올 때마다 아버지는 울었다. 아버지는 처음 눈 콧물과 함께 울었지만 한나절이 지나고부턴 소리로만 길게 울었다. 아버지의 울음은 점액질을 잃어가는 만큼이나 감정도 메말라가는 듯했다. 문상객들은 아버지의 손을 어루만지며 황망해한 뒤 곧 고기국밥을 우걱우걱 먹었다. 그리곤 소주를 마시거나 화투를 치며 떠들썩하게 놀았다. 나는 문상객들과 아버지를 잃은 내 아버지가 슬픔을 금세 지우는 모습에 난감했다. 열여덟의 나는 장례라는 절차가 죽은 자보다 산 자를 위한 것임을 이해하지 못했다. 문상객의 고성방가가 피붙이를 잃은 이의 공허함을 달래려..
을 읽으며 떠올린 15년 전의 기억 너의 이름을 뇌 깊숙한 곳에 봉인하던 그때도 지금처럼 온몸이 시린 2월의 겨울이었다. 요한아. 무엇이 그 봉인을 풀었는지 지금 이순간 나는 그 까닭을 알지 못한다. 문득 나는, 너와 달리 나는 졸업까지 했던 우리의 학교와 너의 이름을 검색창에 쓰고 돋보기 버튼을 눌렀다. 다행일까. 포털 한 곳은 너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사이트는 너의 이름과 죽음의 방법을 적고 '경쟁적 입시교육을 계속 고집하는 시교육청의 무책임함'을 경고하고 있었다. 그랬다. 너는 1995년 2월27일 오전 8시10분, 대구 대륜고등학교 본관 2층 화장실에서 온몸에 석유를 끼얹고 불을 질러 스스로 숨을 끊었다. 너의 죽음은 한 신문에 묵묵히 기록돼 있었다. 신문은 경찰의 입을 빌려 "..
이재훈의 인앤아웃 no.8 1996 비아르 舊 자이르 photo by 성남훈 김훈의 ‘남한산성’을 읽은 이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한결같이 참담하고 먹먹하다고 했다. 쭈뼛거리며 책을 들었더니, 그 반응은 슬몃 이해가 되면서도 언뜻 표상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책엔 병자호란 때의 처절했던 역사가 담담하지만 숨막히는 문체로 서술돼 있었다. 국제관계의 소용돌이 속에서 소설 속 개인들은 국가가 요구하는 당위에 얽매이지 않았다. 무너지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개인이 희생돼야한다는 이데올로기를, 김훈은 강요하지 않았다. 개인은 철저히 생존 본능에만 충실했다. 그 ‘속물적’ 선택들은 우리에게 내 속의 본능을 날 것 그대로 쳐다봐야하는 불편함을 안겼다. 하지만 그 불편함이 국가가 요구하는 당위에 길들여진 것이란 사실을 문득..
그는 소리없이 오열했다. 5년 동안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눈물이었다. 따뜻한 봄볕조차 미치지 않는 차가운 땅 속으로, 삼베천으로 꽁꽁 싸인 그의 어머니가 무명천을 지지대 삼아 천천히 들렸다가 조금씩 내려졌다. 몸 크기에 맞게 파낸 줄 알았던 홈이 작아 몸이 다시 들렸다. 인척들은 혀를 차며 인부들을 나무랐다. 손에 박인 굳은살보다 더 무뚝뚝하던 인부들의 표정이 새파랗게 변하며 연방 "죄송합니다"를 되뇐다. 아래쪽을 삽으로 더 파내고서야 인척들의 표정이 풀린다. 횟가루가 섞인 차가운 흙이 그 위에 흩뿌려졌다. 160cm가 채 될 것 같지 않은 몸은 그렇게 부분 부분 세상과 이별했다. 관 뚜껑을 5등분한 듯한 나무판자가 홈 안에 몸을 봉인했다. 사고로만 남아있던 죽음이 땅밑으로 내려가는 순간 몸으로 느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