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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1일 경기 평택시 군문동 평택장례문화원 특 3호. 검은 소복을 입은 김정희씨는 아들 김철강(35)씨의 영정 앞에서 입술을 거의 열지 않은 채 몇 마디 말을 중얼대고 있었다. 메마른 입에서 조금씩 밖으로 세어나오는 그의 말은 드문드문 들렸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 하고 싶은 거 다 해주면서 왕자처럼 키웠는데…. 해주고 싶은 게 더 많았는데 저렇게 한순간에…. 내가...”
   
   빈소 밖에서 김철강씨를 추모하기 위해 기다리던 조문객들은 차마 그런 김정희씨를 말리지 못했다. 어머니 외엔 가족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상주 자리에 앉은 김철강씨의 이종 사촌도 그런 김정희씨를 건드리지 못했다. 아무도 김정희씨의 긴 조사에 개입할 수 없었다.
 

 하루 전인 10일 오후 3시께 경기 평택시 비전1동 ㅈ아파트. 김정희씨는 식당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아들을 찾았다. 김씨는 아들 방의 문을 열었다가 털썩 주저앉았다. 아들은 자신의 방에서 목을 매 숨져 있었다. 1년 전에도 스스로 목을 매 숨을 끊으려 했던 아들이었다. 김정희씨는 간절히 아들을 말렸다. 아들은 그 뒤 1년 동안 죽지 못해 살아 있는 듯했다. 이날도 김정희씨는 아침 일찍 일을 나서며, 아들의 밥을 지어놓고 먹기를 당부했다. 하지만 그게 아들의 마지막이었다.
 

 김철강씨는 월드컵 열기가 한창이던 2002년 4월 쌍용차 평택 공장에 입사했다. 군에 다녀온 뒤 전문대를 중퇴하고, 일찍 일을 시작했다. 그는 조립3팀에서 자동차 새시 조립을 맡았다. 김철강씨가 입사했던 2002년은 IMF 구제금융 직후 대우차에 인수됐던 쌍용차가, 대우차의 몰락으로 새로운 인수권자를 찾고 있던 때였다. 하지만 2004년 10월 화려한 투자 계획을 밝히며 쌍용차를 인수한 중국 상하이차 자본은 4년 동안 내부에서 올라온 기술 개발 요청을 무시한 채, 자신들에게 필요한 기술만 쏙쏙 빼내어 갔다. 수십억원의 국고 지원을 받은 하이브리드 기술과 디젤엔진 변속기 기술이 상하이차로 넘어갔다. 그리고 2009년 1월 상하이차는 돌연 자본 철수를 선언하고, 한국을 떠났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 글로벌 경제를 외치며 상하이차의 인수를 허락했던 정부도, 쌍용차를 상하이차에 헐값에 매각했던 산업은행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2009년 초여름, 2400여명 규모의 정리해고 명단만 노동자들 앞에 떨어졌다. 상하이차 인수를 허락했던 정부의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2009년 초여름, 쌍용차 노동자들도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옥쇄파업에 들어갔다.
 

 김철강씨는 옥쇄파업 도중 사쪽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평택 공장을 나와 스스로 희망퇴직을 선택했다. 하지만 ‘쌍용차 노동자 출신’이란 호명은 그에게 낙인이었다. 아무도 그에게 일자리를 허락하지 않았다. 희망퇴직 때 받은 퇴직금과 차를 판 돈은 점점 메말라 갔다. 어머니 김씨가 식당 일을 해서 아들의 생계를 뒷받침했다. 하지만 그는 점점 더 외부 세계와의 접촉을 차단해 갔다.
 

 김철강씨가 숨진 방에 남긴 그의 휴대전화에는 자신의 사진 2장과 전화번호 1개만이 저장돼 있었다. 김씨가 남긴 유일한 전화번호의 주인은 중·고등학교 친구 홍아무개(35)씨다. 홍씨는 6개월 전쯤 김철강씨를 마지막으로 만났다. 10일 빈소에서 만난 홍씨는 “그때는 원래 밝은 성격을 가진 철강이가 평소처럼 쾌활하게 웃고 떠들며 얘기를 나눴다”고 했다. 하지만 넉달 전쯤 나눈 마지막 통화에서 김씨는 “나이도 있고 쌍용차 출신이란 이유 때문인지 취직이 잘 안 된다”는 속내를 털어놨다.
 

 홍씨는 지난 9월 말께 다른 친구와 함께 족발을 안주로 소주를 마시며 김철강씨를 부르기 위해 번갈아가며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김씨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굳이 찾아갈 생각이 들 만큼, 이상한 징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날 남겼던 부재중 전화 기록이 홍씨가 김철강씨의 삶에 건넨 마지막 개입이었다. 홍씨는 “그때 철강이와 함께 족발이랑 소주라도 한 잔 했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텐데, 너무 미안하다”고 말했다.
 

 홍씨와 마주한 빈소 식탁에는 쌍용차 기업노조가 보내온 나무젓가락과 국 그릇, 종이컵 등의 장례 상조 물품이 어지러이 놓여 있었다. 옥쇄파업 이후 17명의 쌍용차 노동자와 노동자 가족이 숨진 뒤 처음 제공된 물품이다. 기업노조는 옥쇄파업으로 민주노총 금속노조 산하 쌍용차 지부가 붕괴한 이후, 2000여명의 노동자가 쌍용차 공장에서 밀려난 그 자리에 새로 생긴 노동조합이다. 지난 3월 상영된 <당신과 나의 전쟁>의 후속편인 <낙인>에 출연한 기업노조 김규한 위원장은 스크린에서 소통을 역설하고 있었다. 그는 “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하다. 믿음이 있어야 소통이 이뤄진다. 지금은 사쪽이 무엇을 한다고 하면 100% 다 믿는다. 사쪽도 노동조합이 한다고 하면 다 믿는다”고 말했다. ‘소통’과 ‘믿음’의 결과였을까. 쌍용차는 지난해 노사파트너십 프로그램 최우수 기업 고용노동부 장관상을 수상했다. 민주노총 금속노조 산하 쌍용차 지부 사무실이 있던 공간은 리모델링을 거쳐 ‘쌍용 피트니스 클럽’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곳에는 ‘복지동’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소통’은 그렇게 ‘유연한 복종’을 은폐하는 언어로 작동하고 있었다.
 

 김철강씨의 입사 동기인 신동기(34)씨는 “기업노조 집행부에 철강이 지인이 있어 장례 상조 물품을 보내온 것일 뿐”이라며 “지난 4일 자동차 안에서 연탄불을 피워놓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노동자의 빈소에는 보내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신씨는 그 물품들을 나르며 잠시 몸을 떨었다.
 

 하지만 요즘 해고 노동자들은 공장에 남은 ‘산 자’들과 교류하려 애쓰고 있다. 옥쇄파업 때 ‘산 자’와 ‘죽은 자’들은 각자가 ‘살기 위해서’라는 까닭으로 서로에게 새총을 쏘고, 욕설을 내뱉으며 쇠 파이프를 들고 격렬하게 맞붙었다. 자본은 그렇게 생존권을 빌미로 인간과 인간의 갈등을 조장해놓고, 갈등의 책임을 온전히 인간에게 전가한다. 그리고 인간은, 갈등의 책임을 온전히 뒤집어쓴 채 관계의 단절을 겪고, 단절로 인한 결핍을 견디지 못한 채 점점 위축된다.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은 올 초부터 ‘산 자’들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었다. 쌍용차 해고 노동자로 옥쇄파업 때 구속돼 6개월의 형을 살고 나온 김정욱 민주노총 평택안성지부 지부장은 “‘산 자’와 ‘죽은 자’의 노-노 갈등으로 서로 상처만 주면, 정작 그 갈등을 조장했던 사쪽과 정부만 좋아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다른 해고 노동자들과 여러 차례 얘기를 나눴다”며 “해고 노동자들은 여전히 분노에 휩싸여 있지만, 서로 단절된 관계 그 자체를 힘들어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서울행 마지막 열차를 타기 위해 서둘러 걸러온 평택역 대합실에선 박원순과 나경원의 서울시장 재보궐선거 TV 토론회가 방영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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