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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죽을 때까지 아기다

그는 부모에게 버림받았다. 할머니와 둘이 산다. 할머니는 대화의 상대라기 보단 의식주의 의존대상일 뿐이다. 주로 게임을 하고 공포물을 보며 불에 타 죽는 꿈을 꾼다고 했다. 게임, 즉 가상의 공간은 그가 유일하게 자신감을 갖고 타인과 소통하는 창이다. 공포물은 관계 맺기에 미숙한 그가 꿈꾸는 상상 속 인간관계의 틀이다. 삶에서 우리는 늘 주변인들로부터 긍정적인 면은 인정을 받고 부정적인 면은 자극을 받으며 진로를 조정해나간다. 하지만 그는 실재적인 관계를 맺는데 서툴다. 친구가 없다. 공포물은 그런 그가 관계를 맘대로 조종하고 통제하며 관계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다고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이다. 전기톱으로 사람을 살해하는 영화 장면을 반복적으로 반추하며 떠올리는 그의 상상은, 흉기 앞에서 벌벌 떠는, 그러면서 그에게 제압당한 인간들의 모습이다. 적어도 상상 속에선 인간관계를 지배할 수 있다고 스스로를 고양시킨다. 반면 불에 타 죽는 꿈은 자기혐오다. ‘왜 나는 남들처럼 살지 못할까’라는 자책은 그에게 스스로 가장 극단적인 형벌을 가한다. 이런 자기혐오가 그에게 남을 죽이는 살인이 아니라 스스로를 죽이는 자살을 선택케 했다.

부모가 없다고 다 이렇게 되진 않는다. 게다가 같은 조건인 그의 동생은 논술 경시대회에서 대상을 받기도 한 우등생이다. 하지만 그의 삶은 상대적으로 더 비참하게 대비됐다. 그는 그런 능력이 부족하다. 그러면 모두 그처럼 소외돼야할까. 영점조정이 없는 무한경쟁은 능력과 노력이 부족한 자를 보통 그렇게 만든다. 그도 노력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대입검정고시에 합격했다. 21년 삶 동안 가장 열심히 땀을 흘렸다. 합격하면 마침내 주변의 인정을 받을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도구를 잘못 선택했다. 누구나 대학가는 게 ‘기본’이 되어버린 이곳에서 그의 성취는 아무런 눈길을 끌지 못했다.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또 자기혐오가 치밀어 오른다. ‘존재하지 않는 나’는 그냥 세상에서 조용히 사라지면 된다. 하지만 꿈에서처럼 혼자 형벌을 당하며 죽긴 억울하다. 인터넷에 카페를 만들어 동반자를 구했다. 이제까지 늘 혼자였는데, 죽음의 순간까지 ‘혼자’라는 사실은 죽기보다 싫다.

 

 
‘그’는 지난 4일자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얘기들을 털어놨다. 한 인터넷 카페를 통해 모인 사람들이 강원도의 한적한 펜션에서 함께 목숨을 끊는 일이 잦아지며 온 나라가 떠들썩하다. 대부분의 언론이 ‘충격’이라며 단순 전달식 사건 보도에 집중했고, 카페 운영자인 ‘그’ 찾기에 혈안이 됐다. 하지만 이 신문의 인터뷰 기사 바로 밑에 게재된 박스 기사가 뜬금없다. 경찰이 인터넷 ‘자살 정보’를 모니터링해 심지어 처벌까지 한다고 했다. 결국 ‘법적 처벌’이라는 하위 단계의 공포로 ‘죽음’이라는 극단적 상위 단계의 공포를 선택하는 인간들을 통제해낼 수 있다고 믿는, 이번 정부와 언론의 끝 모를 단순 결론이다. 심지어 일부 언론은 지난달 말 자살카페를 찾은 여고생이 성폭행당한 사건을 비중 있게 실었다. “에비~그거 무서운 거야”라고 대중을 어르고 달래는 언론의 태도에 일면 오만함까지 느껴진다. 대통령은 더 심하다. 대통령은 라디오 연설에서 “죽을 각오로 살아간다면 이기지 못할 건 없다”고 했다. 집단 자살로의 선택을 온전히 그들의 개별적인 문제로 책임 전가한다.

삶이 개별적이긴 하다. 인간의 사고와 행동만큼 한 묶음으로 재단하기 어려운 일도 없다. 심지어 인간이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끊는다는 극단적인 선택에 이르게 되기까지의 과정만큼 개별적이고 복합적인 것이 또 있을까. 하지만 이제까지의 우리 언론은 생활고나 신병 비관, 실연, 우울증, 가정불화 등의 단순 근거로 하나의 삶, 그 끝자락을 멋대로 재단했다. 우리가 개인의 부정적인 행동을 재빨리 해석해버리는 이유는, 그 행동을 이해하는 척하면서 우리 스스로는 그 해석의 범주에 들어가 있지 않는다는 사실로 우리와 개인을 구별짓기 위해서다. 그러면 집단은 금방 안정을 되찾고, 개인은 순식간에 잊혀진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집단의 그 약삭빠른 선택은 자살을 선택하는 개인에게 마지막 길까지 ‘모난 돌의 공포’를 잉태시킨다. 이 공포는 외부와 내부적으로 동시에 작용한다. 개인은 자살하는 순간까지 동료를 찾는다. 외부적으로는 집단에 의해 늘 위축됐던 개별적 특수성에 대한 비난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다. 다름에 대해 인정받지 못하며 살아온 개인은 죽음의 순간마저 집단 속으로 도피하기를 원한다. 개별 행위로 자살을 선택했을 때 오롯이 혼자 받아들여야하는 ‘죽을 각오로 살면 되지 왜 죽느냐’는 식의 비난으로부터 숨어들기 위해 집단이라는 그늘을 찾는 것이다. 집단으로 함께 죽는 자리에선 그 사람이 ‘왜’ 죽었느냐는 개별적 이유보다 ‘집단 자살’이라는 키워드가 주요 포커스가 됨을 그들은 안다. 자신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내뱉는 같잖은 죽음 해석으로부터 벗어나 소집단에 묻혀 죽음을 선택하고 나서야 대집단으로부터 해방된다는 역설. 하지만 그들은 이 역설마저 고맙다.

내부적으로는 모난 돌로 살며 삶의 순간들을 인정받지 못해온 개인이 집단으로부터 자기 삶의 마지막 순간조차 인정받지 못하긴 싫다는 소외 공포, 즉 인정욕구가 숨어있다. 살아오며 자신과 비슷한 선택을 내리고 자신과 유사한 사고를 지닌 집단에 소속돼 본 경험이 별로 없는 이들은 죽음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자살’이라는 공통 키워드를 가진 카페라는 소집단에 소속돼 구성원들로부터 그 선택에 대해 인정받는다.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을 소집단에서 공감 받게 되는 순간, 소통조차 없이 살아온 그들의 지난한 삶이 드러나게 되는 이 역설은 또 어떤까. 하지만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를 이루게 되는 순간, 그들은 곧 삶과 이별하고 만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아기다. 아기는 눈길을 받고 싶어 할 때 우렁찬 울음소리로 신호를 보낸다. 조그만 성취라도 이뤄냈다 싶으면 그걸 보여주지 못해 안달한다. 살아오면서 우리가 단 한 번이라도 남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지난한 욕망에서 벗어나본 적이 있을까. 그 욕구를 최대한 감추고 처세하는 사람이 ‘성숙한 어른’이라는 레테르를 부여받으며 다시 인정받게 되는 순간, 그것마저 사실 인정욕구의 재생산에 다름 아니다. 결국 사람은 누군가에 의해 이해받고 받들어지길 원하며 평생을 산다. 자신의 특별한 선택과 개별적 생김새를 긍정적으로 인정받고 싶어 하는 개인의 유아적 욕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집단과 타인, 그 누구보다 개인의 이야기를 그의 입장에서 들어주고 따뜻하게 보듬어줄 수 있는 제도의 존재가 집단 자살에 대한 법적 처벌이나 책임 전가보다 우선돼야하지 않을까. 집단의 폭력에 길들여진 타인의 태도 변화가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리는 장기적 대안이라면, 우선 ‘미친 사람’들이 가는 공간이라는 편견의 이름으로 분칠된 ‘정신병원’을 ‘문제’없는 개인 누구나 기댈 수 있는 진정한 멘탈케어의 공간으로 대중화시킬 수 있는 제도적 장치부터 갖추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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