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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화를 본 뒤 그 영화가 좋았다거나 싫었다는 평가를 잘 하지 않는 편이다. 철저히 나의 기준에만 따른다면, 영화는 재미있거나 재미없거나를 기준으로 보고 즐기는 대상으로만 존재하진 않는다. 내게 있어 영화는 생각할 거리를 던져줬거나 그렇지 않거나의 차이로도 기능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영화는, 그게 비록 플롯도 상실한 채 만들어지는 잉여 영화이거나 B급 문화를 ‘저질스럽게’ 담아낸 ‘나쁜’ 영화라 하더라도 내게 의미를 손짓한다.

그 영화를 만든 감독이 철학이 있든 없든, 그런 것도 사실 중요한 게 아니다. 영화는 감독이 만들지만, 그가 던진 텍스트는 나와 접합하는 순간 이미 나의 해석 지점으로 넘어와 나의 사유 안에서 부유한다. 그런 점에서 적어도 내겐 나와 접합했던 영화 가운데 텍스트가 유도된 객관적 사회조건이 담겨있지 않은 영화, 그래서 영화가 주는 시각적 즐거움을 즐기고 밝은 곳으로 나와 허무한 어떤 경계에 서 있을 때 잠시라도 내게 사유의 공간을 열어주지 않았던 영화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7월호는 한국 사회가 보통은 무시하고 지내온 B급 영화들의 역능을 기획으로 다루고 있다. 별다른 철학이 담겨있지 않은 것으로 보였던, 그래서 ‘고상한 우리’이기에 그 영화를 보기 위해 티켓을 사는 것만으로 왠지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봐야할 것 같아 보이는, 그런 영화들도 사실 좀 더 면밀하게 맥락을 살펴보면 우리 주변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미학적 혹은 반미학적인 방법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9·11 테러에 대한 할리우드식 처방’이란 글은 소위 말하는 먹물들은 그다지 티켓 구매에 열을 올리지 않았던, <엑스맨>과 <스파이더맨>, <슈퍼맨 리턴즈> 등의 ‘히어로 시리즈’에 담긴 미국 중심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분석하고 있다. ‘좀비 영화의 정치학: 텅빈 눈으로 응시한 팍스아메리카나’란 글도 여름 한철 더위나기용 외엔 용도폐기 처분됐던 ‘좀비 공포 영화’에 담긴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의 일면을 풀어냈다.

여기서 나는 일종의 가능성을 본다. 한국 사회는 오랜 기간 옳고 그름, 상식과 비상식의 정형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독재 군사정권이란 거대한 ‘악’과 맞서 싸운 386세대는 악의 대척점에 있는 ‘선’에 자신을 대입시키면서 존재 가치를 고양해왔다. 이들에겐 신념의 공고함과 변치 않는 올곧음이 지닌 숭고함이 곧 존재의 증명이다. 그 올곧음이 한국 사회를 진일보시킨 순수 열정임을 부정할 순 없다. 하지만 세상은 어느덧 옳고 그름, 상식과 비상식이란 단순 구분법으로 재단하기 어려운 어느 지점까지 와 있다. 그래서 그들 대부분은 어떤 현재적 대상이 아니라 여전히 과거의 어느 한 지점에서 ‘투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독재 군사정권이란 선연한 ‘악’의 구도를 가졌던 한국 사회의 1960~80년대와 달리, 현대를 지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우리를 ‘인격적 주체’로 대접하며 말을 걸어온다. 무한 경쟁과 그 결실로 얻어진다고 인식되는 결과물, 또 그 결과물을 교환가치로 바꾼 뒤 소비활동을 통해 얻어지는 소유물을 보며 ‘너는 상당히 가치있는 존재’라고 인식하게 하는 방법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를 통해 세계는 결국 나를 중심으로 구조화해 있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현실은 그러한가. 구조는 과연 나를 떠받들고 있는가, 아니면 나를 억압하고 있는가.

이런 지적은 지젝의 ‘‘스타워즈’ 읽기, “형제여, 도를 아십니까?”’란 글이 <스타워즈>에 나오는 ‘악의 제국 출현은 우리, 바로 ‘선인들’이 제국을 전복시키는 방식에 따라 좌우된다’고 말한 지점과도 닿아 있다. 사람들은 강력한 테러행위 등을 보고 그들을 처단하려는 ‘팍스 아메리카나’에 기대 그들 자신을 ‘선한 축’에 속해 있다고 생각하려 한다. 이때 테러에 대응하는 자들의 폭력은 은폐되고, 나의 일상에서의 ‘악행’은 그들에게 기댐으로 인해 ‘구원’받는다고 인식된다. 지젝의 글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불교와 도교까지 포섭해 자본주의에 의해 ‘더러워진 정신’을 불교와 도교의 ‘내적 평화’ 기제로 ‘구원’받으며 면죄부까지 얻게 되는 대안 담론을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어디까지 와 있을까. 포스트 담론 이전의 근대의 연장 담론까지도 나아가지 못한 한국 사회라면 근대의 상식과 정신에서 단절된, 근대를 해체하고 현대를 새로운 시대처럼 재창조한다는 탈근대를 논할 자격이 아직은 없지 않을까 싶다. 그런 면에서 지그문트 바우만의 저서 <액체 근대>가 내세운 문제점은 주목할 만하다. 바우만은 이 책에서 고체적으로 예측과 통제가 가능했던, 선명한 문제의식 구도를 가졌던 근대에서 액체적이고 불안정성이 지배하는, 근대가 연장된 지점으로 한걸음 더 걸어간 근대를 얘기한다. 여기서 연장된 근대는 탈근대가 아니다. 신자유주의는 자유주의가 해체된 지점에서 재탄생한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가 아니라, 자유주의의 속성을 어느 정도 간직한 채 고도로 진화한 자본주의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문제의식인 셈이다. 여기서 구조는 나를 지탱해주지 않고 철저한 개인으로 고립시키지만, 실상 삶의 공간에서의 나는 교환가치를 통한 소비활동을 통해 삶을 주체적으로 영위하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하고 있다는 얘기도 될 수 있겠다.

그런 점에서 이번 <르 디플로> 특집이 말해주는 건 우리의 앎을 재구성하는 비판적 방법이다. 이념에 의해 정형화한 담론 형성이 아니라, 이념의 계보를 파고들어가면서 그 도구로 문화적 텍스트를 활용할 수 있는 방법론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옳고 그름의 정형성이 주는 ‘선한 자’이고픈 강박, 그리고 그것에 따라 평면적으로 반복 재생산되는 선명한 대립 구도에서 벗어나라는 제안이다. 선명한 대립구도에 대한 거리두기를 통해 주어진 텍스트의 함의와 본질을 인식하려고 시도한다면 이데올로기에 찌든 나와 그곳에서 한걸음 물러서 있는 나를 구별 지을 수 있지 않을까. 대중문화를 보고 즐길 때 대중문화란 상품을 소비하면서 느끼는 주체성에 대한 착각과 모두가 즐기는 문화이기 때문에 함께 즐겨야 할 것 같은 일종의 종교적인 강박에서 벗어나 텍스트를 뒤집어보는 시도를 통해 얻는 새로운 앎의 즐거움도 누려보는 건 어떨까. 그런 점에서 새로운 앎은 기존의 나에게서 일탈하는 것을 통해 재구성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7월호 리뷰 글로 8월호에 실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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