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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며칠 동안 한국 사회는 스펙터클로 전시된 장황한 정치 쇼에 의해 요동치고 있다. "죄송합니다"란 사과만 연발해 '죄송 내각'이란 달갑지 않은 호칭을 듣게 된 이들 가운데 29일 결국 김태호 국무총리 후보자와 신재민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 이재훈 지식경제부 장관 후보자가 사퇴했다. 인사청문회에서 이들의 도덕성에 흠집을 내는 데 큰 역할을 했던 민주당은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민주당은 '일방적 밀어붙이기'로 민심의 역풍을 맞을 수 있다며 조현오 경찰청장 후보자의 사퇴 요청을 일단 유보했다. 청와대의 한 고위 관계자는 "조 후보자의 경우엔 도덕성 문제는 아니지 않느냐"고 말했다. -조 후보자가 위장전입을 한 적이 있다는 사실 관계에 대해선 여기서 그냥 한 번 웃고 넘어가 주자- 여기까지가 29일까지 진행된 스펙터클의 일단이다.



미안하지만, 나는 총리와 장관 후보자 세 명이 사퇴했다는 뉴스를 듣고도 별다른 감흥이 일지 않았다. 2주 정도 진행된 인사청문회 정국은 내내 후보자가 도덕적이냐 그렇지 않으냐만을 두고 다퉜다. 위장전입과 쪽방촌 투기, 쉴 새 없는 거짓말에 의한 청문회 위증 등 모두 열거하기도 힘든 불법·편법적 행위를 도덕적 흠결로 포장한 언어에 대부분의 시선이 쏠렸다. 그리고 마침내 '부도덕의 상징'으로 언론에 의해 부각된 김·신·조와 이재훈 후보자 가운데 세 명이 사퇴하면서, 민주당은 물론이거니와 시민사회 일각에서마저 한국 사회가 마치 도덕적 정의를 회복한 것처럼 달떠있다.

 

나는 여기서 일종의 현기증을 느꼈다. 남북 농업협동사업을 하다 대북강경론자로 돌아선 김태호 후보자와 이명박 정부의 언론장악을 위한 척후병 역할을 하던 신재민 후보자의 사퇴에 의미가 전혀 없다고 할 순 없겠으나, 과연 이 구도로 충분한가에 대해선 지속적으로 회의가 들고 있어서다. 세 명의 후보자를 몰아내면, 한국 사회는 도덕적으로 정의로워지고, 대중의 삶도 거기에 따라 퍽퍽함을 털어낼 수 있을 것인가. 도덕적으로 온전한 사람이 고위 공직에 오르면 그 사실만으로 한국 사회 구성원은 보다 나은 공간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되는 것인가. 나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왜 정치판의 언어는 온통 '도덕'이란 단어의 상징성에만 매몰됐을까.

 

지난 23일 국회 교육과학기술위원회에선 이주호 교육과학기술부 장관 후보자의 인사청문회가 열렸다. 이날 청문회의 이슈는 여러 차례 자신의 논문을 표절해 중복 게재한 이 후보자의 연구 윤리 문제였다. 하지만 인사청문회 중간, 투명하게 스쳐간 질의가 있었다. 권영길 민주노동당 의원은 이 후보자가 차관 시절 주도적으로 추진한 자율형사립고에 다니는 학생들의 양극화 문제를 제기했다. 자율형사립고에 다니는 학생들 가운데 고소득층 자녀가 늘고 있고, 이 후보자가 평소 주장한 것과 달리 사교육비도 늘고 있으며, 학교 안팎에서 계층별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다른 의원들의 질의에선 이 문제가 더 이상 거론되지 않았다. 질의는 구름처럼 부유했고 섬처럼 고립됐다.

 

같은 날 열린 진수희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도 마찬가지였다. 진 후보자의 딸이 한국 국적을 포기하고, 미국 시민권자가 된 것에 대한 추궁이 길게 이어졌다. 딸의 개인적 선택에 부모가 왜 책임을 져야하는지, 그리고 딸의 국적 선택과 부모의 고위 공직행이 왜 연관성을 가지는지에 대한 논의는 일단 차치해두자. 문제는 진 후보자가 "영리병원 안 하겠다"고 했던 청문회 답변과 달리 서면 답변에서는 "제주도와 경제자유구역 6곳에서는 영리병원이 시급히 필요하고, 건강관리서비스도 민영화하겠다"고 밝힌 점이 거의 거론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보편적 복지로 존재해야할 의료가 자본의 논리에 따라 가진 자들을 우선적으로 치료하게 만든다는 데 국회의원들이 별반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한국의 정치 지형에서 '우'와 '좌'를 나눠 점유해왔던 한나라당과 민주당 등의 정치 세력들이 정책적으론 별반 차이가 없이 여전히 '도덕'이란 근대적 정의의 어느 한 지점을 두고 서로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다는 걸 상징하는 것 아닐까. 한국 사회는 이제까지 어떤 정책을 추진하면 대중의 삶이 한 단계 나아질 것인가 아닌가를 치열하게 다투기보다, 자의적으로 갈라둔 진영을 사이에 두고 우리 편이면 무조건 옳고, 우리 편이 아니면 무조건 배척하면서 '정의'와 '도덕'이란 개념을 배척의 도구로 활용해 왔던 것 아닐까. 이 구도에선 우리 편이면 '정의롭고 도덕적'이 되는 것이고, 우리 편이 아니면 '불의하고 비도덕적'으로 단순 배치되고 만다.

 

하지만 이주호 후보자의 무한경쟁 교육과 진수희 후보자의 의료 민영화 추진이 지난 10년 동안의 민주 정부에서 받아들인 신자유주의의 연장선상에 서 있다는 사실은 여기서 별반 이슈가 되지 않는다. 청문회장에서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암묵적 '보수 카르텔'에 의해 정책의 차이성이 드러나지 않았던 건 그런 까닭에서 였다. 그리고 '우리는 다르다'는 것을 애써 강변하기 위해 편 가르기를 위한 '도덕'의 언어만 판을 치게 됐다. 그렇게 비도덕적인 인사들을 청문회로 걸러내고 한국 사회가 여전히 '깨끗한 사회'라는 '공동선'을 모두가 사회적으로 합의하는 순간, 삶의 곳곳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칠 정책적 정치의 언어는 은폐되고, 암묵적 '보수 카르텔'의 구도는 태연히 온존하게 된다. 세 명의 후보자가 사퇴한 날, 이명박 정부가 부동산 거품 부양을 위해 DTI 규제 완화 조처를 발표한 건 이명박 정부가 사실 이 암묵적 '보수 카르텔' 구도가 가진 한계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다는 점을 역설적으로 상징하고 있는 것 아닐까.

 

도덕을 강요하는 사회는 삶의 구체성이 결여된 사회다. 개별적 구성원의 행복과 삶의 질은 사회나 그 사회의 엘리트가 도덕적인 것만으로 담보되지 않는다. 우리의 눈과 귀가 '도덕적이지 못한 이명박 정부'에만 쏠려 있을 때, 정치와 야합한 자본은 그 논의의 뒷길에서 야금야금 우리의 삶을 옥죈다. 합의된 구도를 사유 없이 따라간 뒤 선명한 네 편을 바라보며 '안티'로만 존재하고, 정작 개별적 주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구체성을 사유하지 않으면, 삶은 늘 보편적인 그 어느 지점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어느덧 구조에 의해 잠식되고 만다. 도덕이 기득권 세력들의 지배 도구로 끊임없이 활용되는 건 그래서다.


*미디어스에 실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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