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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관인 아버지를 '스펙'으로 썼다는 사실을 공공연히 행동으로 과시하던 35세의 한 여성이 아버지와 손을 잡고 나란히 백수가 됐다. 며칠 동안 신문과 방송은 이 부녀에게 칼을 씌운 채 칼춤을 췄다. '현대판 음서제도의 부활'이라는 거창한 수사까지 등장시키며 장관 부녀를 그 부활의 상징으로 규정한 채 한껏 매질했다. '다수 대중'은 장관의 낙마 이후까지 온통 부녀의 '공정치 못함'을 술안주로 삼았고, '공정한 사회'를 내걸었던 대통령은 사실상 폐지로 가던 고시 제도를 부랴부랴 무덤에서 꺼내놓으며 급한 불을 끄려 애썼다. '다수 대중'은 백수가 된 부녀를 비난하며 '그래도 대한민국은 건강하다'는 명제 아닌 명제를 '재확인'하려 했고, 대학 입시에서의 입학사정관제 도입과 같이 전형 과정을 불투명하게 하며 '특권 계급'을 씨내림하려던 정부도 일단은 한 발짝 물러선 것처럼 보인다.


대중의 분노는 거리로 뛰어나오지 않았을 뿐, 마치 2008년 6월의 촛불을 보는 것 같았다. 촛불이 대중의 상상 속에 자리매김한 '대한민국'이라는 정상국가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음에 대한 분노였듯, 장관 부녀에 대한 매질 역시 그 부녀가 상상 속에 자리매김한 '공정한 정상국가'를 뭉개놓고 있다는 사실관계를 보며 발현한 분노였다.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더 이상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없는' 사회에 대한 거부감, 나의 세대는 이렇게 공정하지 못한 사회에 살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나의 다음 세대까지 나의 비루한 사회적 존재감을 되물림할 수는 없다는 위기의식도 한 몫을 했다. 압축성장의 결과물로 얻어진, 한국 사회 특유의 '내 새끼만은 평등해야' 한다는 강박은 여기서 적절하게 녹아들었다.

 

하지만 그 정도 '공정함'을 둘러싼 우리만의 마스터베이션으로 대중에게 그 공정함의 대가가 오롯이 재분배될까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장관 부녀를 백수로 만든 결과는 차치해 두고라도, 정부가 부랴부랴 관에서 꺼낸 고시 제도의 부활이 과연 사회적 공공성을 위해 어떤 지향성을 담보하고 있는 것일까, 라는 앙금이 남기 때문이다. 과연 고시 제도가 부활해 '기회의 평등'이 어느 정도 보전되면, 한국 사회는 '공정한 사회'라는 상징적 지향과 공정함이 공공성으로 사회 곳곳에 나뉘어지는 결과적 현실을 손에 거머쥘 수 있을 것인가. 그런 점에서 나는 장관 부녀에 대한 분노가 고시 제도의 부활이 아니라 되레 발본적인 해체 시도 그 너머까지 닿지 못했다는 점에서 진한 아쉬움이 들었다.

 

근대 국가에서의 공무원과 조선시대와 같은 왕정 계급 국가에서의 '공무원'인 관리는 엄연히 다른 존재론적 의미를 지닌다. 왕정 계급 국가에서의 공무원은 개인이 지배 계층에 편입되는 '출세'의 과정을 통해 자신의 일신과 가족의 안위를 담보할 입신양명의 도구적 존재로서 기능했다면, 근대 국가의 공무원은 사회 공동체의 공적 이익을 중시하는 주체들로 짜인 공화주의 국가에서 그 국가의 시스템을 작동하는 시스템의 한 구성 요소로 기능하기 위해 존재한다. 근대 국가의 공무원이 개인의 이익 창출 욕망을 거세당하는 대신, 현실 고용 시장에서 여전히 수세적일 수밖에 없는 기업 노동자들과 달리 '신분 보장'이라는 특권을 거머쥐는 건 그런 까닭에서다. (물론 '신분 보장'의 특권이 공무원의 노동 3권과 정치적 발언권이라는 기본권 박탈의 근거가 될 순 없다는 점은 분명히 해두자.)

 

하지만 한국 사회는 어떤가. 고시를 준비하든 그들의 주변 어딘가에 서 있든 그들의 총합은, 여전히 고시 제도라는 조선시대의 과거제와 다를 바 없는 시스템을 도구 삼아 '기회의 평등'에 대한 열망을 충족시킬 수 있다는 판타지에 갇혀 살고 있진 않은가. 신림동과 노량진에서 불철주야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 고시생들 가운데 '기회의 평등'의 상징인 고시 등용문을 거쳐, 결국은 신분을 상승시키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이가 얼마나 될까.

 

만약 "나는 그렇지 않다"고 강변하더라도, 고시는 결코 '기회의 평등'을 보전해주는 도구가 아니라는 사실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한 언론보도(서울신문 9월8일자 4면)에 따르면 사법고시와 로스쿨, 행정과 외무고시 등에 도전하는 수험생은 모두 13만여명으로 추산된다. 하지만 이들 시험의 한 해 합격자는 모두 합쳐 1500명이 되지 않는다. 1.2%가 채 되지 않는 가능성이 나만을 간택해주길 바라며 바늘구멍 뚫기에 올인하고 있는 셈이다. 결과적으로 봤을 때, 이 '기회의 평등'을 통한 신분 상승의 욕망은 1.2%의 상승자와 98.8%의 '잉여'를 매년 재생산할 뿐인 데도 말이다.

 

결국 '기회의 평등' 판타지는 차별과 불평등을 은폐하는 기제로 기능하게 된다. 기사에 등장하는, 5년째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는 김호영(32·가명)씨의 사례를 봐도 이런 점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고시를 통해 "지방 출신이라는 한계와 학벌의 벽을 넘겠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하지만 지난해 행시 합격자 307명 가운데 서울대 출신은 35.2%, 고려대와 연세대 등 이른바 'SKY' 출신이 차지하는 비중은 64.2%에 이른다. 최근 3년 동안 한 번이라도 10명 이상의 합격자를 낸 대학은 'SKY'를 합쳐서 겨우 7개 대학 뿐이다. 1.2% 안에서도 극소수에 불과한, 7개 대학 이외에 속하는 지방 출신과 학벌 비수혜자들만의 신분 상승이 과연 '기회의 평등'을 보전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서 겨우 1.2% 안에서도 극소수에 불과한 이들에게 문을 열고 있는 고시 제도는, 기득권자들을 중심으로 한 차별과 불평등의 기제를 그대로 보전한 채 그저 기득권을 욕망할 수 있음 그 자체만으로 '평등하다'는 판타지를 반복 재생산하고 있다.

 


지난 4일 포털사이트 다음에는 '3대 고시 존치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라는 카페가 생겼다. 9일 만에 1400명에 가까운 회원들이 모였다. 이들은 카페 소개 글로 "세칭 현대판 음서제 폐지만을 위한 사시, 행시, 외시 연합 카페입니다. 현대판 음서제 폐지에 관심있으신 분들은 누구나 환영합니다"라고 써놨다. 하지만 그들이 지금 이상이라고 믿고 있는, '현대판 음서제 폐지'로 얻어질 '공정함'이라는 가치가 'SKY' 중심의 고시 점령 구조를 재생산하면서 아예 그 구조를 고착화하고 있다는 걸 그들은 알고 있을까. 복지부동하며 자기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영혼'을 팔고, 인사철만 되면 눈치만 보며 생존투쟁에 모든 걸 바치는 일부 공무원들의 보신주의가 한국 사회 곳곳을 옥죄는 모습을 가장 관심있게 지켜봤을 그들에게 과거 지향적인 '기회의 평등'이라는 판타지를 해체하는 모습을 기대하는 건 아직까지 시기상조일까. 

*미디어스에 실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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