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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방송을 봤다는 건 프로그램이 끝나고서야 알았다. '슈퍼스타K2'에서 134만여 명의 지원자 가운데 톱11을 선정했다. 10명은 이미 정해졌고, 현승희와 강승윤이 마지막 한 자리를 두고 맘을 졸였다. 엄혹하게도, 성공으로의 탑승과 내처짐의 갈림은 문자메시지로 통보됐다. 강승윤은 탑승했고, 현승희는 짐을 쌌다. 심사위원 넷이 둘을 심사하는 과정이 뒤이어 방송됐다. 이승철과 박진영은 현승희의 '뛰어난 가창력으로 대변되는 천재성'을 높이 샀고, 윤종신과 엄정화는 강승윤의 '자신감과 심사위원 지적에 맞춰 변하려는 의지'를 장점으로 꼽았다. 결국 후자가 선택됐다. 재방송인지도 모를 정도로 '슈퍼스타K2'를 챙겨보지 않은 채로는 성급한 판단일지 모르지만, 나는 결국 이 한 장면에서 '슈퍼스타K2'의 한계가 고스란히 드러나고 말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한계는 사실 프로그램의 명칭에서부터 고스란히 상징된다. '슈퍼스타K2'는 미국의 '아메리칸 아이돌'과 영국의 '브리튼즈 갓 탤런트'의 한국판이다. 미국의 우상이 될 스타를 뽑는다는 '아메리칸 아이돌'이 '슈퍼스타K2'와 좀 더 닿아 있다면, '재능을 갖춘 영국인'을 그대로 보여주겠다는 '브리튼즈 갓 탤런트'는 프로그램의 의도 자체가 사실 '슈퍼스타K2'와 동떨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슈퍼스타K2'는 천상의 목소리로 세계를 감동시킨 폴 포츠나 수잔 보일이 우승할 수 있는, 아니 제대로 출연 시간을 확보할 수 있는 프로그램조차 될 수 없을 것이다. 재능을 발굴해내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시스템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슷한 명칭을 가진 '아메리칸 아이돌'과 '슈퍼스타K'도 결과적으로 성격이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뛰어난 음악성과 외모를 함께 갖춰 데뷔 싱글로 빌보드차트 1위를 차지하고 '그래미 어워드'에서 상을 받은 '아메리칸 아이돌 시즌1' 우승자 켈리 클락슨과 한국 가요계의 주변인에 불과한 '슈퍼스타K1'의 우승자 서인국의 처지는 두 프로그램의 격차를 보여준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낳았을까.


1980년대와 90년대 초중반의 한국 가요계와 90년대 후반 이후의 가요계는 기획사 지배력의 등장 이전과 이후로 나뉠 수 있다. 80년대와 90년대 초중반까진 적어도 숨어있던 원석들이 '혜성같이 등장'할 수 있었다. 오랜 언더그라운드 시절을 거쳤던 조용필이 그랬고, 변진섭과 신승훈, 김건모 등이 오랜 무명 생활 끝에 대중 앞에 나타나 시대를 지배했다. 언더그라운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김현식과 유재하, 김광석과 이은미, 장혜진 등은 TV에 자주 등장하지 않았지만 대중의 깊은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그들 뒤에 가려진 수많은 재능들도 존재했겠지만, 그들은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드러난 음악적 재능과 삶의 무게를 담뿍 담은 감성으로 대중 앞에 등장해 한 시대의 마음을 적시거나 뒤흔들어 놨다.


하지만 90년대 후반 이후 그런 천재적인 음악성과 삶을 실은 감성을 갖춘 가수들의 시대는 죽었다. 자본을 갖춘 기획사는 '스타 시스템'을 철저히 기획하고, 그 시스템에 헌신할 수 있는 '의지와 가능성'을 지닌 스타들을 찍어냈다. 대중 앞에 등장한, 만들어진 스타들은 이름만 다를 뿐 'SM엔터테인먼트'의 유영진이나 'JYP'의 박진영의 창법을 고스란히 반복했다. 음악성, 시대 혹은 개인의 감성을 표출하는 예술인으로서의 가수가 되어 대중 앞에 음악을 표현할 수 있는 길은 막혀갔다. 더 이상 악보마저 거부한, 계보가 없는 음악 그대로의 음악으로 새롭게 창조되는 리듬과 창법과 노래를 들을 기회가, 적어도 대중음악이라는 공간에선 사라졌다.


시스템이 10여년 공고히 유지되자, 대중의 인식도 고스란히 기획사의 프레임에 종속됐다. 어느덧 대중은 가창력을 갖춘, 노래로 마음에 울림을 주는 가수보다 외모와 스타성, 유머를 갖춘 엔터테이너로서의 가수를 선호한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런 선호가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인지, 원하게 만들어진 것인지 대중은 알 수 없었다. 대중이 욕망하는 음악의 집합체로서의 대중음악은 대중 앞에 나타날 기회를 잃었고, 대중이 욕망하리라 믿어지는 신화로서의 대중음악, 대중에게 욕망하라고 강요하는 기획사 프레임 속의 대중음악만이 미디어를 통해 강요됐다. 대중의 욕망이 욕망 그 자체로 반영될 수 있는 미디어가 사라지고, 대중이 욕망해야하는 것들을 전제로 시스템이 만들어놓은 기획만이 미디어를 지배하는 시대가 됐다. 욕망이 신화로 지배되는 사회가 열린 셈이다.


이제 대중은 가수가 어떤 창법과 어떤 가사와 어떤 리듬으로 노래하는 지보다, 어떤 기획사에서 몇 년이란 기간 동안 얼마나 열심히 연습해 '완벽한' 무대를 연출할 수 있는지에 관심을 쏟게 됐다. 여기서 개인이 개인 그대로의 모습으로 존재증명을 할 수 있는 공간은 사라지고, 대중의 욕망을 조작하는 시스템 안에서 철저히 구조화한 시스템의 부품만이 존재증명의 공간을 제공받을 수 있게 된다. 그런 점에서 '슈퍼스타K'는 심사위원들의 평가로 대변되는 기획사 시스템 아래 참여자들이 그 부품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인정받기 위한 투쟁의 장이다. 허각과 같은 이가 마음을 울리는 노래를 선보이며 기획사 시대 이전의 감성을 끌어내기도 했지만, 그 역시 시간이 흐를수록 외모를 돋보이게 할 스타일을 갖춰가고, 어색한 무대 연출까지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마치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 무기를 거푸 장착해내는 변신 로봇을 보는 듯 했다.


노래하는 이와 노래를 도구삼아 성공하는 이는 다르다. 삶의 무게를 담아 노래하는 이와 시스템 안에서 기계적으로 노래하는 이도 같은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중학교만 졸업하고 쇼핑몰과 백화점 공연을 전전해온" 허각과 "소녀가장으로 여동생 두 명의 생계를 책임지고, 주말마다 라이브 카페나 술집 무대에서 노래해 온" 김보경의 삶은 미안하게도, 결국 시스템의 부품이 될 '슈퍼스타'의 성공 스토리를 포장해줄 도구로 밖에 존재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들의 눈물을 뒤로하고, 시스템은 뚜벅뚜벅 정형화한 스타 찍어내기로 프로그램을 이끌어가고 있지 않은가. 그들이 '2억원의 상금'과 '보장된 성공의 길'로 포장된 기획사의 스타가 아니라, 노래 자체로 존재증명을 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한 가수로 자리매김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건 그래서다. 허각과 김보경의 지난한 삶이, 미디어가 상품화한 '감동 스토리'의 도구로 전락하는 게 아니라, 그들의 목소리와 감정과 가사에 실려 우리의 마음에 깊은 울림을 일으킬 때가 과연 올 수 있을까.


그런 시공간은 역설적이게도, 그들이 '슈퍼스타'로 성공하고자 하는 욕망을 포기할 수 있는 기반이 갖춰졌을 때 열리게 된다. 미디어를 통제하는 거대자본의 기획 아래 '슈퍼스타'만이 존재증명의 공간을 열 수 있는 사회는 부품들의 목소리만 노래로 흘러다니는 곳이 될 뿐이다. 비록 '슈퍼스타'가 되지 않더라도, 자신만의 음악으로 존재증명의 공간을 열어가는 인디와 언더그라운드 가수들이 그 생존 기반만은 주변과 잉여로 존재하지 않게 만들 때, '슈퍼스타'로 마침내 사장되고 말 그들의 목소리와 감성이 좀 더 날 것 그대로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지 않을까. 



*미디어스에 실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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