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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의 분단은 역시나 한국 사회의 뜨거운 감자다. 등장할 때마다 많은 이슈들을 초토화하고, 오로지 그 논란에만 눈길을 집중시킨다. 이번에는 북한의 3대 세습체제 구축에 대한 비판 여부를 두고 '진보 진영'이 둘로 갈려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다. 휴전선 위에 있는 체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말들의 성찬이 당면한 주변 민중의 삶과는 상당 부분 괴리돼 있다는 점, 그리고 그 말들의 성찬이 한쪽의 비상식적인 신실성과 다른 쪽이 그에 대해 내뱉는 '극도의 부정' 혹은 비아냥으로 점철돼 있다는 점에서 논쟁은 상당히 폭력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도착적 언어와 배제적 언어만 난무할 뿐, 이 논쟁이 도대체 왜 이렇게 뜨거운 감자여야만 하는지에 대한 성찰과 회의는 그다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다지'라고 단서를 단 건 박가분의 글 '주체사상의 종언과 진보의 종언', 홍세화의 글 '진보의 경박성에 관해' 가 그래도 내게 안도를 줬기 때문이다.)

 

누가 뭐래도 북한은 일국 사회주의 독재 체제다. 사회주의 독재를 바라보는 일단의 편견을 걷어내고 먼저 사회주의라는 관점에서 살펴보자면, 민족주의 '좌파'에게 북한은 사회주의 유토피아로 기능한다. 그들에겐 사회주의가 북한 민중의 삶의 질 문제를 위한 도구적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중요한 게 아니다. 이데올로기를 지향하는 과정보단 결과적으로 등장한 체제만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북쪽 인민들의 '굶주림' 문제보다 북한이 체제 보전을 통해 '유일한 유토피아 국가'로 남아 '미국의 지배'에 대한 대항기제로 존재해야한다는 '논리'(이채언 '<3대 세습> 논하는 꼴통진보에게 답한다')가 등장한다. 하지만 이 글은 쓴 사람이 민주노동당의 씽크탱크인 새세상연구소의 이사라는 점에서 의아한 점이 발견된다. 민주노동당은 2005년 2월27일 개정한 통일에 대한 정강정책에서 '궁극적인 통일체제는 남한 자본주의의 천민성과 북한 사회주의의 경직성이 극복되면서 민중의 권익과 민주적 참여가 보장되는 체제여야 한다'라고 밝히고 있다. 개인의 견해가 정강정책과 반드시 일치할 순 없지만, 적어도 정당의 정책을 만드는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다면 체제를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와 그를 위한 정책이 궁극적으로 어떤 것을 위함인지에 대해 이채언 이사가 무엇이라고 답할 것인가, 나는 매우 궁금하다.

 

북한에 대한 '유토피아적 판타지'는 북한의 일국 사회주의국가 체제가 형성된 역사적 관점도 배제하고 있다. 1945년 해방 이전의 한반도에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이 발화할만큼 자본주의 체제가 공고화한 적이 있었던가. 그런 점에서 북한은, 남한이 반공 이데올로기로 민중을 통제하고 가파른 경제성장을 통해 천민 자본주의 국가로 자리매김한 것만큼이나, 급격한 이념적 전체주의를 통해 형성된 폭력적 사회주의 국가이다. 민중의 주체적 요구에 의해 형성된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라는 말이다. 남쪽의 민중들이 북한을 바라보는 의식 세계가 부정적인 까닭은, 민주노동당 일부가 제기하는 것처럼 반공교육이나 국가보안법에 의한 '역매카시즘' 때문에 그러한 것이 더 이상 아니다. 타자에 의해 형성된 국가의 폭력에 짓눌린 북한 주민들이 개별적 주체성을 성찰하고, 그에 따라 목소리를 내면서 체제를 구축해가는 과정을 이전에도 현재도, 그리고 아마 이후에도 만들지 못하며 살아왔고, 살고 있고,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독재라는 개념에 대해선 어떨까. 과거의 사회주의의 이론은 노동자계급이 혁명을 통해 부르주아 정치권력을 무너뜨리고, 정치적 승리를 거두어 수립하는 정치적 지배권력, 즉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공산국가로 가는 과정으로 거론한다. 이런 사회주의 이론에 충실한다는 전제 아래에서 보더라도(과거의 이 이론이 현재적으로 정합성을 가지는가는 일단 논외로 두자), 북한 사회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의한 민중해방의 도구적 과정으로서 독재 체제를 형성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김일성이란 지도자가 북쪽 땅과 인민을 지배한 뒤 국가 형성 20여년이 지나서야 이념적 지향으로 '주체사상'을 등장시켜 끊임없이 그 영도력을 포장해온 체제가 북한 아니던가. 게다가 그것이 체제 보전을 위한 세습으로까지 이어진다면, 이는 유토피아적 사회주의 국가를 꿈꾸는 이데올로그들로서도 비판적인 견해를 밝혀야할 충분한 까닭이 있는 것 아닐까.

 

그런 점에서 이정희 민주노동당 대표의 "말하지 않는 것이 나와 민주노동당의 판단이며 선택"이란 선언은 북한체제를 사회주의적 관점으로라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회의해본 적이 없다는 속내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지향하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성찰과 회의가 없는 진보는 껍데기일 뿐이다. 게다가 민주주의 체제 안에서 민중을 설득하는 과정으로 표를 얻어 정치적 지형을 넓혀가겠다고 만들어진 공당의 대표라면, 이런 준비없음에 대해 반성부터 해야하지 않겠는가. 통일을 추구하는 세력을 등에 업고 대표가 되었다 해도, 민주노동당이 수권정당이 되어 국가를 대변해야하는 외교적 주체가 아니라면 세습에 대한 비판을 내정간섭으로 볼 정치적 근거가 없다는 점에서 진중권과 홍세화, 이택광의 지적은 합당하다.

 

결국 이 관점들을 종합해 봤을때, 나는 과연 민주노동당의 일부 정치세력들이 민족통일로 이루고자 하는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해 궁금증이 인다. 남과 북이 '하나의 민족'이기 때문에 무조건 하나의 국가를 구성해 어우러져 살아야하는 것인가. 그 당위의 근거는 무엇인가. 통일이 언젠가 올 필연이라 하더라도, 민중이 그 까닭을 수긍하지 않는 통일이라면 통일이 어떤 가치를 가지는 것인지 나는 알 수가 없다. 여기에 체제가 우선인가, 아니면 체제를 구성하는 개인들의 주체성이 우선인가라는 질문을 떠올려 본다면, 개인들의 주체성을 떠올리는 것을 북한 인민의 굶주림에 대한 시혜적인 관점 혹은 '휴머니즘'으로 단순 평가(이채언의 윗글)하긴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도 더해진다. 이데올로기와 정치는 이때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

 

이런 과정을 통해, 나는 본질적으로 한국 사회의 '진보'라 불리는 정치 세력의 진영논리적 언어가 신실성을 도구 삼은 나르시시즘에 푹 빠져 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됐다. 타인의 견해에 의해 자신의 절대적 신실성이 침범받는 걸 조금도 인정하지 못하는 모습은 그 나르시시즘의 절정이다. 민주노동당 울산시당 위원장 김창현의 경향 절독 선언이나, 유시민씨의 한겨레 절독 선언은 그런 까닭에서 등장한 것이 아니던가. '신실성과 진정성'의 저자인 리오넬 트릴링의 견해를 빌리자면, '신실성은 전근대적인 도덕의 가치로서, 자신에게 거짓되지 않은 동시에 타인에게도 진실하기를 원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신실성을 추구하는 자는 그리하여 내면과 외면 사이의 상위나 모순을 느끼지 않으며, 사회가 그에게 요구하는 규범적 의무와 자신이 실제로 욕망하는 바 사이에 어떤 단절이나 간극도 느끼지 못한다.' (김홍중 '마음의 사회학') 하나의 이념적 혹은 체제적 지향을 향한 개별적 성찰을 전제하지 않고 내가 왜 이 가치를 지향해야하는지 의문도 가지지 않은 채, 도덕적이고 규범적으로 이데올로기 혹은 결과적 정치 체제를 추종하기만 하는 진보의 언어는 그 자체로 신실성이 전제된 종교적 문법에 불과하다.

 

과문한 나로선 단정적인 견해인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번 논쟁에서 민주노동당의 일부 세력이 밝히고 있는 논리를 보면, 북한 사회를 바라보는 견해에 과연 그들의 내면이 성찰과 회의로 답한 적이 있는가, 의문이 든다. 그들은 그저 1980년대의 추억에 빠진 채 북한 체제에 대한 자신의 신실성과 그에 동조해주는 폐쇄적 주변인들에게 인정받음만을 지렛대 삼아 도착적 언어로 자위하고 있는 것 아닐까. 폐쇄적 세계 안에서 인정욕구를 한껏 충족하면서 스스로 자족하고 사는 걸 즐기고 있는 건 아닌가.

 

물론 여기서 '무엇이 진정한 진보인가'를 따져 물으며 진보의 가치에 유일무이한 진품성을 등장시키고, 한쪽의 견해를 배제의 언어로 비아냥대기만 하는 일부 다른 쪽 사람들의 진정성 강요 역시 폭력적 나르시시즘에서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이데올로기는 하나의 지향을 위해 나아가는 과정의 산물이기에, 진정한 진보 혹은 좌파라는 가치는 단 하나의 지향으로 존재하면서 진퉁과 짝퉁을 가려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자만이 '좌파'라는 관점 역시 진정성이 자신에게만 있고 타자에겐 부재하다는 전제 아래 상대적 우월감을 느끼려는 권력지향적 나르시시즘의 한 단면으로 보인다.

 

타자의 관점에 무비판적으로 포획되지 않은 채 끊임없이 성찰하고 회의하는 과정에서 주어진 담론의 규범을 깨고 개별적 지향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는 존재가 좌파라는 개념을 전제한다면, 탈규범적 개인을 폭력으로 짓누르는 데 익숙한 한국 사회의 만연한 도덕적 현실은 그 자체로 난감하다. 여기서 문제는 이데올로기를 도덕적 혹은 윤리적 규범으로 설정한 채 그를 추종하는 것과 추종하는 세력에 포섭되는 것이 좌파라고 착각하고 있는 일군의 행위들이다. 이런 행위는 주체와 타자의 관점이 충돌하며 또 다른 무언가를 끊임없이 형성해가는 공간으로서의 담론 형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한다. 이데올로기는 개별적이고 주체적인 관점 형성의 도구에 불과하다. 이데올로기가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 선동과 자뻑에만 이용되는 사회는 획일적이고 고답적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미디어스에 실렸음


잡설1. 이 글을 미디어스에서 읽은 '레닌을 사랑한 오타쿠'의 저자 김민하 선생(나는 이 '선생'이란 호명이 어색해 손발이 오그라들지만, 김 선생이 이미 블로그에서 '이재훈 선생'이라고 썼기에 호칭을 따라 쓴다 -_-;;) 이 반박 글을 보내왔다. 내 글에서 어떤 오류가 발견됐는지, 그리고 마지막 결론에 이른 관점에서 어떤 차이가 있는지에 대해 설파한 김 선생의 글을 여기에 함께 싣는다. 공익근무를 하며 민원인들에게 시달리는 상황에서도 이해를 돕기 위해 급히 글을 정리해준 김 선생에게 감사를 표하며, 읽는 분들의 시간이 허락된다면, 이 글을 함께 읽어보시는 것이 저의 무리한 논지에 대한 영점조준 차원에서 도움이 될 것 같다.  


김민하 선생의 글 

   

잡설2. 나의 글과 김민하 선생의 글을 함께 읽어본 한 선배는 "각자 논리의 비약이 있지만, 재미지다!!"라고 외치며, 일견을 보탰다. 그의 견해는 메신저 대화를 통해 나온 것이라, 글로 소개할 순 없지만,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주체사상 논리와 스탈린주의의 연관성은 뚜렷하지만, 나는 주체사상의 뿌리가 스탈린주의에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단지 스탈린주의적 '방식'을 채택했을 뿐이다. 수령론과 스탈린주의의 핵심적 차이는, 박가분이 부지불식간에 지적한 '민중의 파토스'인데, 스탈린주의는 프롤레타리아 일당 독재까지가 이론적 전개의 끝지점이다. 수령론은 일당 독재론을 끌어왔지만, 훨씬 깊은 뿌리는 맹자(!)에 있다는 게 80년대 내가 내렸던 결론이다. 성군론은 맹자의 '군자'의 화용이다. 내가 그대 글에서 과도하게 느낀 건 수령론에 대한 입론에 있지 않고, 이데올로기를 너무 간단하게 정의한 것인데,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론 자체가 겁나게 복잡하고, 후기 구조주의자 다섯명이 평생 논쟁해도 안 끝날 것이다"라고 말했다. 역시 읽는 분들에게 참고가 될만한 견해라고 생각해, '스압'을 무릅쓰고 여기에 같이 싣는다.

 

 

 

잡설3. 글을 읽은 분들은 느끼셨을 지 모르겠지만, 내가 이 글에서 궁극적으로 하고싶은 말은, 결국 NL-PD로 나뉘어 진영만 추종하며, 자신의 과거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는 이들에 대한 일갈이다. 우리에게 과연 그런 진영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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