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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한 고등학교에서 12년째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 김아무개(38) 교사는 5일 <한겨레>와 만나자마자 불쑥 휴대전화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내밀었다. 모의고사 도중 한 교실에서 엎드려 자는 절반의 학생들, 한 개 번호로 쭉 내려 찍은 답안지, 학교에 불만을 표시하기 위해 학생들이 쓰러뜨린 화분과 쓰레기통, 욕설 섞인 낙서가 사진에 담겨 있었다. 그는 “10년 전과 달리 요즘엔 점심시간이나 쉬는 시간에 운동장에 모여 축구나 농구를 하는 학생들을 찾아볼 수 없다. 또래 문화가 사라진 학교는 그야말로 서열화한 대학 가운데 어떤 곳을 갈지 경쟁하는 학원이 되었고, 학생들은 더 이상 대학 이후에 뭘 하고파 하는지 꿈을 얘기하지 않는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학교와 대학이 가파르게 입시기관과 취업사관학교가 되고 있다. 학교는 더이상 교육의 현장이 아니라, 학생들에게 출신 성분을 찍어주는 낙인의 공간으로 변질하고 있다. 초등학생과 중학생은 특수목적고와 자율형사립고 등 특권 학교에 편입하기 위해 대입 전초전을 치르고, 고등학생은 상위권 대학 입학으로 취업에 유리한 지위를 확보하려고 모든 신경을 쏟는다. 이 과정에서 한해 33조5000억원 규모(현대경제연구원 2007년 발표)의 사교육비가 학부모들의 월급통장에서 빠져나간다.

 

학부모들의 선택은 비합리적인 것일까. 교육과학기술부가 전국 초·중·고 1012개교 학생과 학부모 7만4000명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사교육 증가 원인으로 ‘기업체 채용에 있어 출신 대학이 중요하기 때문’이란 이유가 1순위로 꼽혔다. 2순위는 ‘대학이 성적 우수학생 선발 경쟁에 치중하기 때문’, 3순위가 ‘대학 서열화 구조가 심각하기 때문’이었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정책대안연구소 김성천 부소장은 “결국 학벌 중심의 노동시장이 대학서열화 구조와 연동되면서 학부모들이 상위권 대학을 나와야 자녀가 취업에 불이익을 받지 않을 것이란 신념에 의해 사교육 시장이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분석했다.

 

그렇다면 대학서열화와 학벌사회는 누가 조장하는 걸까. 교육 전문가들은 기업으로 대변되는 자본, 학교와 대학, 부유층 등 3가지 주체가 가진 무절제한 탐욕이 정부 정책과 어우러진 것이 근본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기업은 학벌 인맥을 업무에 활용할 수 있고, 학벌 외엔 선발 기준이 없다는 논리로 서열화한 대학 위주의 채용 관행을 유지한다. 하지만 채용한 사람들에게 일할 능력을 직접 가르치거나 대학에 관련 투자를 하는 데는 인색하다. 그리고 취업 준비생들이 알아서 외국어 점수와 학점, 공모전 입상과 봉사활동 경력, 자격증 등의 스펙을 준비하도록 시켜 연구공간이어야 할 대학의 정상적 교육 기능을 마비시키고 있다.

 

정규직 채용은 갈수록 줄이고, 비정규직과 인턴직 채용을 남발하면서 정규직-비정규직-인턴직의 계층화 현상을 만든다. 이에 따라 고스란히 줄어든 임금 지출로 탐욕을 충족하고 있다.

 

오호영 한국직업능력개발원 부연구위원 등이 2005년 532개 기업 인사채용 담당자를 대상으로 실태조사를 벌인 결과, 1000명 이상 규모의 기업 가운데 29.1%가 ‘출신대학을 채용에서 중요하게 다룬다’고 답했다. 300~999명 규모 기업은 20.4%, 100~299명 규모 기업은 17.3%로 기업 규모가 커질수록 학벌을 중시했다.

 

학교와 대학은 공동체 구성원을 길러내는 교육의 근본 기능은 외면한 채, 성적과 그 성적의 배경이 되는 부유한 가정 학생들을 선발함으로써 명문고와 명문대학의 지위를 차지하고 유지하겠다는 탐욕을 숨기지 않는다. 대학에는 ‘성적대로 뽑고 아무렇게나 가르치자’는 교육 태도와 ‘40%의 정규직에 포함되지 않으면 잉여인력이 된다’는 엄포만 공공연히 횡행한다.

 

교육과학기술부가 지난달 1일 공개한 각 대학 신입생 현황을 보면, 서울대와 연세대, 고려대 등 상위권 대학은 신입생 5명 중에 1명 이상을 외국어고와 과학고 등 특수목적고 출신 학생으로 뽑았다. 특목고 출신 비율은 서울대가 25.9%, 연세대가 28.0%, 고려대가 20.7%였다. 최근 4년 동안 서울대 합격자의 21.0%는 서울 강남 3구 지역 고교 출신이었다.

 

부유층은 비싼 교육비를 자녀에게 투자해 명문대에 보내고 좋은 직장을 구하게 해주면서, 자신의 경제적 지위와 계층이 대물림되는 사회 시스템을 유지하려는 탐욕을 드러내고 있다. 이들은 사회 전체를 위한 교육투자, 즉 세금을 내는 데는 앞다퉈 부정적인 자세를 취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교육부가 2005년 발표한 통계를 분석한 결과, 한국의 초·중등학교 학생 1000명당 투입되는 교원은 43.8명에 불과했다. 이탈리아는 93.6명, 프랑스는 70.2명이었고, 국가 평균은 72.8명이었다. 권영길 민주노동당 의원은 “그런데도 이명박 정부는 취임 뒤 3년 동안 중등 교원 수를 동결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용일 한국해양대 교수(교육학)는 “결국 기업과 대학, 부유층 등 3가지 탐욕의 주체가 강하게 결탁하고, 사회 불평등과 사회 위기를 고조시키며 일반 학부모들의 불안심리를 자극한다”며 “이렇게 교육은 계급을 계층화하고 대물림으로 재생산하는 도구로 전락하고, 불안함에 시달리는 학부모들의 내 자식을 위한 ‘합리적 선택’은 결국 모두에게 바람직하고 합리적인 결과를 가져오진 못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정부는 기업과 대학, 부유층의 무절제한 탐욕을 만족시키는 제도를 정착시키고 이를 국가경쟁력을 위한 것으로 포장해 모두에게 이로울 것이라고 선전한다. 하재근 학벌없는사회 운영위원은 “대학서열화가 입시 경쟁을 조장하고, 사람까지 서열화하는 학벌사회를 만들었지만, 지난 10년의 민주정권이나 이명박 정권 등 정부는 단 한번도 대학서열화 문제를 건드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학부모들은 이런 탐욕의 사회 환경에 따라 아이들 모두를 위한 투자엔 인색한 채, 내 아이를 위한 투자에만 모든 걸 쏟아붓게 됐다. 결국 인간 본연의 공동체 심성이 탐욕을 바탕으로 한 경쟁 교육이란 맷돌에 끊임없이 빨려 들어가 잘게 부서지고 있는 상황이 현재의 한국 교육이다.

*<한겨레> 2010년 11월15일자 7면에 실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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