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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방송이 끝난 드라마 '동이'에서 대중에 가장 많이 회자된 인물은 '동이' 역을 맡은 한효주도, '숙종' 역을 맡은 지진희도 아니었다. 단역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보조 출연자로 드라마에 등장해 시종일관 무표정한 얼굴로 연기 아닌 연기를 한 '티벳궁녀' 최나경이 의외의 인기를 끌며 '미친 존재감'이란 조어를 대중에게 각인시켰다. 최나경의 연기는 역설이기에 눈길을 끌었던 것 같다. 최고상궁 역을 맡은 임성민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연기력을 한껏 발산할 때, 최나경이 한 연기라곤 전혀 감정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임성민을 물끄러미 바라본 것뿐이었다. 하지만 대중은 그 무표정의 '발연기'에 열광했다.


역설은 일반의 인식을 뒤집은 것에서 비롯됐다. 일반적 인식대로라면, 보조 출연자는 어떤 식으로든 과잉된 연기를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포장하면서 스타가 될 길을 찾을 법하다. 하지만 <미디어스>와의 인터뷰에서 최나경은 "보조 출연자가 얼굴이 알려지고 주목을 받게 되면 다른 여타 극에 출연하기가 상당히 곤란해진다. 기회가 되면 (관심을 받으며 연기) 하고 싶지만 아직은 많이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주목받은 까닭에 일반의 인식을 뒤집은 역설적 사고를 바탕으로 한 연기 아닌 연기가 일정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연기자스럽지 않은' 그의 외모에 반응한 '열광'이 더 큰 몫을 차지했을 것이나, 그런 '열광'에 대한 비판적 문제 제기는 여기서 일단 차치해두자.)

오세훈 서울시장이 지난주 오랜만에 존재감을 드러냈다. 6.2지방선거 이후 그는 사실 서울의 시장으로서 '존재감'을 가지지 못했다. 내가 최근 그의 출현을 인지했던 건, '카드뮴 낙지 파동' 때 게걸스레 낙지를 먹으며 '안전'을 강변하던 모습뿐이었다. '불치이치 무위지치(不治而治 無爲之治), 즉 일하지 않는 것처럼 조용히 일하는 것, 그것이 훌륭한 행정'이라는 그의 철학 때문일까. 그러던 그가 지난 3일 보편적 전면 무상급식을 "복지의 탈을 쓴 망국적 포퓰리즘"으로 규정하며 미디어 앞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그리고 이튿날엔 자신의 블로그에 '아이들 밥 한 끼 먹이자는데 왜 반대하냐구요?'라는 글을 올려 보편적 전면 무상급식에 반대하는 까닭을 털어놨다.


오 시장이 보편적 전면 무상급식을 반대한다며 내놓은 논리를 살펴보면, 그는 "무상급식은 '인기영합주의 복지선전전의 전형'이며 '서민정당을 자처하는 민주당에 어울리지 않는 '부자 무상급식'이자 '불평등 무상급식'"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세부 근거로, "서울시의 많은 학교가 무상급식을 할만한 물적, 인적 조직이 갖춰져 있지 않다. 1000명 이상을 위한 조리실이 고작 가정집 부엌 규모인 데도 부지기수이고 인건비도 들쭉날쭉해 무상급식을 한다손 쳐도 아이들에게 똑같은 양질의 급식을 할 형편이 전혀 되지 않는다"고 했다. 또 "서울시에선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경우, 아무리 규모가 작은 사업이라도 반드시 1년여 간의 시범 사업을 실시해 시행착오를 최소화한다. 그래야 세금 낭비를 줄일 수 있다"고도 했다. 이어 "민주당 의원들이 전면 무상급식의 최대 논거로 내세웠던 (저소득층 아이들에 대한) 낙인효과는 내년부터 무상급식 지원 대상자 부모가 동사무소에 가 등록하도록 시스템을 개편해 이미 (그 논거가) 허물어졌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무상급식 논란에 대해 "여기서 무너지면 서울시가, 대한민국이 무너진다"고 개탄했다.

과연 그럴까. 2010년 4월 현재 서울시의 초등학교는 국공립 547곳과 사립 40곳 등 모두 587곳이다. 학생 수는 57만여명에 이른다. 서울시교육청과 자치구청, 그리고 서울시의회의 민주당 의원들은 일단 내년에 초등학교 6개 학년 학생들부터 단계적으로 보편적 전면 무상급식을 실시하려 한다. 초등학교 전면 무상급식에 드는 예산은 2300억여원 정도이고, 서울시교육청은 그 예산의 50%에 해당하는 1100억여원을 자체 예산으로 책정했다. 그리고 서울시내 25개 자치구 가운데, 23개 자치구가 이 예산 편성에 동참하기로 결정했다. 동참하지 않은 2곳은 중랑구와 송파구다. 이 23곳엔 대표적인 '부유층 밀집지역'으로 꼽히는 강남구와 서초구가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 먼저 오 시장이 밝힌 '부자 무상급식'이란 논리가 그를 당선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지역 자치구에서마저 외면당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게다가 '부자 무상급식' 논리엔 결정적인 허점이 있다. 서울시는 이제까지 저소득층 학생만을 대상으로 한 선별적 무상급식 정책으로 기초생활수급대상자 가정, 차상위층 가정, 한부모 가정 등에 속한 자녀들의 급식비를 지원해왔다. 이 숫자는 전체 초등학생의 11.6%에 이른다. 즉 보편적 전면 무상급식 정책이 시행됐을 때 급식비를 추가로 지원받는 학생들은 그 11.6%를 제외한 나머지 88.4%의 학생들이 된다. 오 시장이 말하는 '부자'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알 수없으나, 백번 양보해 소득계층 상위 30% 이상을 '부자'라고 칭한다 해도, 나머지 58.4%에 속하는 학생들에 대한 급식 제공의 가치를 소외하자는 얘기가 된다. 나는 오 시장이 이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 궁금하다. 오 시장에겐 소위 말하는 '중산층'도 부자의 범위에 속하는 것인가.

이 지점에서 최근 고은태(@GoEuntae) 선생이 트위터를 통해 제안한 내용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정 전면무상급식이 싫으면 (소득) 상위 10%만 빼고 무상급식하자. 그럼 어떤 반응이 나올지 참 궁금하다. 부자만 빼면 부자급식 아니지 않나"라고 했다. 물론 고 선생의 발언은 그도 밝혔다시피 "전면 무상급식에 대한 전술적 융통성" 차원이고 나는 이 말에 크게 동의하지 않지만, 그가 오 시장이 주장한 '부자 무상급식' 논리의 맹점을 꿰뚫고 있다는 점에서 일견 흥미로웠다. 그의 주장대로 과연 10%의 '부잣집' 가정 아이들을 넓은 범위의 교육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소외시키는 것이 옳을 것인가, 그게 정치적 전술로 통용되는 것이 합당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은 뒤로 하고도, 오 시장의 논리가 중산층 가정을 배제한 채 '무리수'를 두고 있다는 점을 지적해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충분하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오 시장의 주장이 가진 세부 논리 역시 취약하긴 매한가지다. 서울시교육청에 확인한 결과, 현재 초등학교 587곳 가운데 오 시장이 말한 '가정집 부엌'같은 시설로 급식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곳은 한 군데밖에 없다. 적어도 내년부터 시행할 초등학교의 보편적 전면 무상급식에 걸림돌이 될 숫자는 아닌 셈이다. 서울시교육청은 되레 2012년쯤부터 단계적으로 무상급식 단계를 밟아갈 중학교에 시설 문제가 발견될 수 있다고 밝혔다. 서울시내 중학교 376곳 가운데 70여곳이 고등학교와 같은 공간에서 급식을 하고 있어, 중학교만 무상급식을 하게 될 경우 70여곳은 따로 시설을 지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같은 공간에서 고등학생들은 선별적 무상급식 대상이 되고, 중학생들은 보편적 전면 무상급식 대상이 되는 모순이 발생할 수 있어서다. 만약 중학교 70여곳에 급식시설을 짓는다면, 한 학교당 15억원정도로 잡아 모두 1000억원 정도가 든다고 한다. 하지만 이 예산은 내년도 무상급식 예산 편성과는 하등 연관이 없다. 게다가 고등학교 단계에서도 보편적 전면 무상급식을 함께 하게 되면, 굳이 1000억원의 돈을 들이지 않아도 되지 않겠는가.

내년부터 무상급식 지원 대상자 가정의 부모가 동사무소에 가 등록을 하기 때문에 저소득층 가정 자녀에 대한 '낙인효과' 우려가 없다는 논리 역시 허점을 지니고 있다. 동사무소에 등록하는 대상 가정은 기초생활수급대상 가정과 차상위 계층 가정, 한부모 가정 등이다. 하지만 여기엔 '담임 추천 대상' 학생이 빠져 있다. 갑작스레 가정 경제가 붕괴한 상황에 처해 급박한 처지에 빠진 학생의 경우, 국가 차원의 복지 혜택 수급 대상자로 지정되기 전 담임의 추천에 의해 무상급식 대상자가 되기도 한다. 이 밖에도 담임 추천 대상 학생으로 지정될 수 있는 근거는 더 있다. 이 아이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한국 사회처럼 하나의 가정 경제가 붕괴하는 것을, 오롯이 각 가정의 개별적 책임으로 떠맡기는 '무한경쟁의 정글'에서 낙오자들은 그저 배제하고 돌아서면 되는 것일까. 게다가 '낙인효과'는 오 시장처럼 복지를 '국가의 시혜'라고 생각하는 시각으로는 끝없이 재생산될 수 밖에 없다. 복지는 국가가 국민에게 내리는 시혜가 아니라, 소득 하위 계층을 뒷받침하면서 '국가 경제'와 '국익'을 튼튼하게 지지하기 위한 목적 행정이다. 그런 점에서 오 시장은 그런 보수 우파적 국가경제 논리에도 제대로 이르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서울시가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 반드시 1년여 간 시범 사업을 실시하며, 이로 인해 시행착오를 최소화하면서 세금 낭비를 줄일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에 이르면, 사실 할 말을 잃게 된다. 오 시장은 한강 르네상스를 하겠다며 6300억원의 예산을 퍼부었고, 그 예산의 일부로 수상택시를 만든 적이 있다. 한강을 이용해 출퇴근하는 문화를 만들겠다는 게 그의 복안이었다. 시범 사업도 하지 않고 그가 밀어붙인 수상택시는 서울시가 예상한 하루 이용 인원의 0.3%에 불과한 100여명만이 이용하고 있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출퇴근 수요보단, 관광 수요로 밖에 해석될 수 없는 숫자다. 여기에 낭비된 세금에 대해 오 시장은 무엇이라고 답할 것인가.

무엇보다 오 시장이 전면 무상급식을 '망국적 복지 포퓰리즘'이라고 주장할 수 없는 까닭은 그의 정책이 가진 모순에 담겨 있다. 그는 6.2지방선거에서 복지가 보편적인 지지를 얻자, '3무(無) 학교'라는 공약을 내놨다. '3무' 가운데 하나는 학급 준비물비다. 서울시는 내년도 예산에 52억4000만원을 배정했다. 대상자는 '부자'도, '중산층'도, '저소득층'도 배제하지 않은 초등학생 전원이다. 보편적 전면 무상급식은 복지 포퓰리즘이고, 보편적 전면 학급 준비물비 무상 제공은 포퓰리즘이 아닌 근거는 어떻게 다른 것일까. 과문한 나로선 그 차이를 구별할 수 없다.

그렇다면 오 시장은 왜 단 하나도 설득기제를 갖추지 못한, 이런 식의 부실한 논거로 의회정치조차 거부하는 강수를 두고 전면에 나서 언론 앞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을까. 그건 아마 그가 '티벳궁녀'와 같은 '미친 존재감'을 노리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오 시장은 사실 이제까지 한나라당 내에서 존재감이 없었다. 뚜렷한 계파도 없거니와, 계파에 소속될만한 정책적 견해조차 제대로 드러낸 적이 없다. 게다가 6.2지방선거에서 0.6% 차이로 겨우 신승하며, 대선 주자로서의 존재감도 사실상 거세당했다. 그가 '불치이치 무위지치(不治而治 無爲之治)'를 6.2지방선거 이전부터 내세웠는지는 모르겠으나, 사실 그의 저 '정치 철학'은 존재감이 없는 그에게 딱 어울리는, 유일한 선택지였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가 잠재적 경쟁자라고 생각하는 김문수 경기도지사는 연일 폭탄발언으로 이명박 대통령을 견제하거나 혹은 'MB어천가'를 불러대며 존재감을 각인시키고 있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역시 '부자 감세 정책'에 애매한 스탠스를 취하며 복지 담론의 대중적 지지를 교묘하게 줄타기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그에겐 정치적 처세를 위해 '미친 존재감'을 부각할 역설의 정치가 필요했을 것이다. 모두가 '복지 담론의 대중적 지지'를 부담스러워하며 정치적 행보를 조심스러워할 때, 홀로 복지 담론에 반대의 거수기를 든다는 식의 역설. 그게 그가 '미친 존재감'을 얻기 위해 선택할 수 있던 유일한 논리 아니었을까. 그런 점에서 "(민주당 시의원들에게서) 아마도 내후년의 총선, 그 이후 대선에서는 더 과격한 포퓰리즘 공약이 등장할 것"이란 그의 주장은 고스란히 그에게 되돌려줄 수 있겠다. 오 시장이 앞으로도 대선을 바라보며 존재감을 부각하기 위해 또 다른 극단적 선택지를 꺼내들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케임브리지 사전'은 오세훈 시장이 거론한 '포퓰리즘'을 "보통 사람들의 요구와 바람을 대변하려는 정치 사상, 활동"이라고 개념 정의하고 있다. '대중'과 '엘리트'를 동등한 지위에 놓고 정치적, 사회적 변화를 주장하는 수사법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포퓰리즘'의 반대 지점엔 '엘리트주의'가 자리한다고 본다. 하지만 단 하나의 논거도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엘리트주의' 정치는 정치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 지점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이의 몽니에 불과하다. 그런 이가 추구하는 엘리트주의 정치는 포퓰리즘 정치보다 더 하급수이다. 그런 까닭으로 본다면, '미친 존재감'만으론 자신의 연기력과 인기가 오래 유지되지 못할 것임을 일찍 간파하고 자신의 실력을 꾸준히 단련하고 있는 단역 배우 최나경이 오 시장보다 더 정확히 자신의 처지와 상황을 인지하고 있는 것 아닐까 싶다. 모두가 '예스'라고 말할 때, '노'라고 할 수 있는 용기는 누구나 부릴 수 있는 게 아니다.


*미디어스에 실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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