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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리영희 선생은 휠체어에 몸을 싣고 있었다. 무릎 위에는 담요가 올려져 있었고, 말을 하는 입술은 한쪽의 입꼬리가 다른 쪽의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균형이 무너져 있었다. 하지만 선생은 불편한 몸을 이끌고 파주까지 찾아와, 막 ‘기자’라는 호명을 안고 연수를 받으러 온 후배들 앞에서 ‘쓰는 자’의 책무에 대해 조곤조곤 역설했다. 이른 함박눈이 거세게 쏟아진 2003년 12월의 어느 날이었다.

그날 선생은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의 일례로 서해북방한계선(NLL)을 거론했다. “남북한 사이에 영토와 군사분계선에 대한 협정은 1953년 정전협정과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뿐입니다. 두 문서에선 오로지 쌍방이 인정한 영토와 군사분계선만 인정하고 있습니다. 정전협정에는 군사분계선을 연장할 수 없다고 명시했어요. 결국 남한이 주장하는 서해북방한계선은 쌍방의 인정이 전제되지 않은 일방의 주장일 뿐 입니다. 말은 이미 그 ‘한계’를 명시하고 있지요. ‘북방한계선’ 아닙니까? 그 선은 남이 더 이상 북으로 올라가지 못하는 한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만약 북이 남으로 내려올 수 없는 한계라면, ‘남방한계선’이라고 말하지 않았겠습니까.”

선생의 말에서, ‘우상’은 우리를 둘러싼 미디어, 그리고 그 미디어를 통해 전달되는 남쪽 정부 일방의 주장으로 포장된 그 무엇이었다. 그리고 ‘이성’은 그 말들의 신화를 해체하기 위해 끊임없이 도전해야 하는 또 다른 그 무엇이란 선언적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NLL 인근 수역에서 포격이 일어난 지 13일이 지난 5일 새벽, 선생은 조용히 영면했다. 나는 아직 그 말이 무거운데, 그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다.

#2. 400쪽의 종이 묶음은 누렇게 색이 바랬다. 언제 이 책을 구입했던가, 나는 더 이상 기억하지 못한다. ‘자유인’이라는 이름이 적힌 그 책의 머리말에는 이런 글이 씌어 있었다. “‘거짓의 체제’가 무너지기보다도 더 재빨리 ‘거짓의 사상’의 나팔수였던 소위 언론기관·언론인·지식인이 새로운 분장으로 무대에 뛰어올라오는 것이었다. 그들은 모두가 ‘민주주의의 열렬한 신봉자’였고, ‘군부독재체제에 대항한 투사’였다. 참의 사상과 사람은 오히려 뒷전에 밀려나고 마는 사회상이 연출되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양화는 악화를 구축한다’. 새로운 거짓에 대해 변함없는 참은 또 싸워야 할 어려움에 직면하였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시대의 물결이 변하자 재빠르게 군부 독재와의 ‘대화합 타협 관용 용사’를 입에 담는 일부 언론인과 지식인의 기회주의적 변신에 참담해하며, ‘오랜 세월 거짓에 앞장섰던’ 신문이 제공한 지면에 ‘지식인의 기회주의’라는 제목의 글을 실은 선생의 의중이 거기 담겨 있었다.

그러나 그 신문은 지난 6일자 칼럼이런 글을 실었다. “1970, 80년대 많은 대학생들에게 중국과 베트남 공산주의에 대한 환상을 퍼뜨렸던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가 어제 세상을 떠났다. 민주당은 리 교수를 ‘실천하는 지성’이라 평가했지만, 그는 ‘주사파’가 활개칠 수 있는 공간을 더 넓게 만들었다...종북 세력인 ‘리영희 키즈’는 도처에서 상황 반전을 노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23년의 세월동안 시대상을 여전함으로 공전하게 만든 건 무엇일까, 나는 난망했다. 그리고 그 물음 앞에 아무런 답도 할 수 없었다.

리영희 선생이 등진 세상엔 며칠째 온갖 수사를 담은 말들이 춤을 췄다. 아직 세상을 등지지 않고 남은 자들은 그의 삶을 칭송하든 혹은 부정하든, 자기만의 목적을 실은 말과 행위를 쏟아냈다. 그의 삶은 홀로 오롯했으나, 어디선가 그가 홀로 오롯하지 않았음을 말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그의 글은 실증으로 이념적 편견을 깨려 했으나, 어디선가 그가 이념적이기에 선동적이었음을 돋을새김하려는 글들이 나타났다. 죽음은 죽은 자를 배제했지만, 산 자들은 말의 성찬으로 온존하려 했다. 쏟아지는 말들이 나는 가볍게 버거웠다.

목적적 칭송과 부정으로 세상이 아무리 공전한다지만, 그래도 시대는 변했다. 선생이 살아생전 그렇게나 역설했던 지식인 인텔리겐치아의 사회적 역할은 지금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말과 글이 스스럼없이 난무하며 교차하는 시대, 온갖 통로의 미디어가 지식인의 부박함을 책망하는 시대, 지식인의 일방적이고 하향적인 대중 계몽이 더 이상 의미를 상실해가고 있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선생이 말한 이념으로 시야를 가린 ‘우상’, 그리고 그 ‘우상’을 해체하는 도구로서의 ‘이성’은, 이제 공리로 무장한 채 물적 토대를 거세당한 이들에게 자본의 이름이 덧칠된 ‘이성’으로 합리화해 다시 ‘우상’으로 변증한다.

기득권에 편입되지 않은 지식인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해체된 지위 위에 물적 토대마저 부재한 상황으로 허덕이고, 기득권을 쥔 지식인은 기득권을 통해 지식을 도구화할 뿐 어떤 사유로 변화의 시대에 임해야 할지 고민하지 않는다. 기업은 ‘낡은’ 인문주의를 포기하고, 그 대신 기업가나 중간 관리자, 전문가를 공급해달라며 대학에 손을 뻗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기득권, 그리고 기업으로 대변되는 자본의 이데올로기를 교차해 전파하는 ‘지식 전문가’들이 지식인의 자리를 꿰차고 곳곳에서 판을 친다. 이때 선생이 진실하기 위한 치열함으로 남기고 간 것 이후의 무언가에 대해 말한다는 것이 어떤 식으로 가능할 것인가, 나는 아직 가늠하기 어렵다.

떠난 자의 빈자리는 그렇게 공허하다.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구체적 진실을 추구하고, 진실을 찾는 과정에서 수없는 맥락의 팩트를 찾아 ‘이성’으로 ‘우상’을 해체하려던 그의 빈자리는 그래서, 이제 더 이상 ‘지식인’이란 이름을 달지 않을 자들이 모여 조금씩 메워야 하는 것 아닐까 싶다. 그런 수많은 이들이 ‘그가 떠난 이후의 무언가’에 대해 논하는 집단적 사유로 충돌하고 변증할 때, 개인의 몫으로 채울 수 없는 그 자리가 충만하게 되지 않을까. “맹목적이고 광신적이며 비이성적인 반공주의에 마취되어 있는 사람들을 잠에서 깨어나게 하여 의식을 바로잡아주는 일이 나의 삶의 전부”가 되었던 그의 등을 뒤로하고, 그가 떠맡았던 짐을 다수가 짊어질 때 시대의 변화와 그의 죽음은 함께 여물어 갈 것이다.

노무현의 죽음을 두고 “우리 시대가 오월 광주의 죽음에서 시작되었듯이, 모든 새로운 시대는 죽음 위에서 잉태된다”고 했던 김상봉의 말처럼, 리영희 선생은 우리에게 그렇게 짐을 나뉘어 안기고 새로운 시대의 잉태를 예고한 채 조용히 사위어 갔다. 또 그렇게 한 시대가 종말을 고했다.

*미디어스에 실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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