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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텍스트와 영화의 텍스트는 엄연히 다르다. 하지만 그 엄연히 다르다는 명제는 모두에게 강박적 규범이 될 순 없다. 텍스트의 크로스오버는 그래서 그 강박에 대한 해체 시도다. “영화가 당연히 이래야지”라는 말은, 그 말의 발화자가 영화를 보기 전 이미 그 영화가 가진 내러티브를 예상하고 봤다는 걸 전제로 한다. 그렇기에 영화가 단순히 예측 가능한 텍스트로 자발적 마스터베이션을 유도하는 도구가 된다는 건 영화에 대한 모독 아닐까, 라고 정성일은 생각한 것 같다. 영화에 대한 사랑으로,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라고 말하는 정성일의 첫 영화 <카페 느와르>는 그래선지, 영화 그 자체의 내러티브 기법보단 문학적 텍스트의 반복적 전달 기법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도입부에서 ‘세계소년소녀 교양문학전집’이란 말로 명확히 제시하듯, 영화는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꼬리와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야>의 머리를 엮어서 흘러간다. 베르테르처럼 ‘이뤄질 수 없는 불륜’의 사랑에 아파하던 영수(신하균)는, 자신의 사랑을 선점한 압도적 대상을 향해 울분을 터뜨리려 하지만, 이에 실패하고 스스로의 죽음으로 자신의 세계를 파괴하는 방법을 택한다. 하지만 그는 죽지 않고 살아난다. (정성일은 “베르테르의 죽음을 막고 싶었다”고 했다.) 죽었지만 죽지 않은 영수는 (영화는 그가 어떻게 살아났는지 친절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현세이지 않은 현세에서 (영화는 이를 흑백으로 처리한다.) 울고 있는 여성에게 손을 내미는 <백야>의 남성으로 전환한다.

이방인과 이방인의 만남은 우연으로 처리되지만, 세상에 우연이지 않은 만남이 어디에 있을까. 그렇게 영수는 ‘사랑의 기다림이 이뤄질 수 있을까’ 두려워하는 선화(정유미)에게 손을 내밀고, 선화의 긴 얘기를 들어주며 그의 얘기를 나의 얘기로 흡입한다. 타자의 존재를 나의 존재 안에 합일하는 순간 사랑이 이뤄지는 것일까. <백야>에서 그랬듯, <카페 느와르>도 그렇지 않다며 고개를 젓는다. 선화와 조금씩 합치하는 과정이 어느덧 절정에 이르는 순간, 선화는 불현듯 나타난 이전의 기다림의 대상을 향해 달려가고 만다. 그리고 영수는 그 관계의 부조리에 더 이상 저항하지 못하고 세상을 향해 구토만 남긴 채, 영원히 자신의 존재를 소멸해간다.


198분 동안의 긴 러닝타임 동안 정성일은 새로운 얘기를 하지 않았다. 아니, 새로운 얘기를 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그가 사랑하는 문학과 영화와 음악과 미술을 끊임없이 자신의 텍스트에 꾸역꾸역 삽입하며 온전히 그들의 합치만 바랐다. 하지만 영화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에서 병석(최민수)이 평생 고쳐 쓴 내러티브로 영화를 치밀하게 창조했지만, 그 창조가 이전 텍스트의 조합에 머무르면서 창조일 수 없는 창조로 남았던 것처럼, 정성일의 <카페 느와르> 역시 자신의 세계를 오밀조밀 바느질한 카펫 같은 텍스트를 엮어내는데 머무르고 말았다. ‘당대의 영화광이자 필사적 탐독가로서 정성일의 사적 기억의 몽타주, 교양의 아카이브’라는 시놉시스의 말은, 나를 정성일 ‘감독’과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대화를 실현할 초수신인’의 단계에 이르지 못한 ‘미욱한 개인’으로 만들어 놨다.

국내외를 넘나드는 영화에 대한 오마주, 그가 “광우병을 상징하려 했다”고 말했던 도입부의 햄버거 먹는 장면과 <백분토론>의 일부분, 그리고 2009년 1월1일 보신각 타종 행사에서 “이명박은 물러가라”는 장면을 묵음으로 방송했던 KBS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넣은 현장 화면이 곳곳에 애정을 품고 삽입돼 있지만, 이들은 영화의 내러티브에 온전히 담기지 않은 채 내내 겉돈다. 그는 영화 <극장전>의 오마주가 “홍상수 감독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이라고 했지만, 내러티브에 녹을 수 없는 오마주는 되레 관객들에 대한 예의의 부재를 증명했다.

폭력과 욕설을 혐오하는 정성일답게, <카페 느와르>는 최근 한국 영화의 지나친 하드코어적 폭력 역시 정면으로 반박하며 아드레날린보단 상대의 폐부를 찌르는 대화로 긴장감을 극대화하려 한다. 하지만 내겐 그 역시 영화라기보단 문학적 텍스트의 전형으로밖에 보이지 않았고, 화면상의 긴장감은 치밀하게 전달되지 않았다. 문학과 영화를 크로스오버 하려 했다는 점을 이해한다 쳐도, 문학적이거나 혹은 연극적인 문어체 대사를 구사할 필요까진 없었을 것이란 생각도 든다. 정성일은 <카페 느와르>에 대해 쿨한 태도를 가지라는 충고에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왜냐하면 그런 태도는 나의 배우들과 스탭들에게 예의가 아니기 때문이다”(정성일 트위터 @cafenoir_me)라고 했지만, 영화는 텍스트를 건네는 순간 자신의 것만이 아니라 타자의 것도 된다는 점을 그가 좀 더 깊게 숙고해야 하지 않았을까.


자신의 지향과 개별적 윤리가 100% 합일하는 개인은 자폐적이 될 수밖에 없다. 지향과 합일하는 윤리는, 지향과 윤리를 온전히 흡입할 수 없는 타자와의 타협을 인정하지 않는다. 티끌만큼이라도 타자의 불편한 개입에 틈입 당하는 것이 불편한 개인을, 한국 사회는 개별적 주체성으로 온전히 인정해주지 않고, 되레 배제한다. 불행하게도 나는 한국 사회의 그 배타성이 몸서리치게 싫지만, 정성일의 문법으로 그를 항변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영화가 대중성의 강박에 휘둘릴 필요는 없지만, 아쉽게도 정성일이 영화를 통해 얘기하려는 것을 읽을 수 없었기 때문에 (적어도 미욱한 나로서는), 혹은 정성일이 얘기하려는 것이 사전에 이미 다른 문학적 도구를 통해 공개됐기 때문에 영화는 타자에게 새로운 해석을 위한 지평을 열어주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정성일이 첫 영화에서 보여준 욕심과 완벽주의는, 철저한 방어기제로 느껴질 만큼 자폐적이란 생각이다. 나는 그 자폐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의 자폐가 아쉽다. 그래서 결국, <카페 느와르>가 정성일의 치밀하고도 농밀한 사유를 담아내지 못한 것이 영화라는 헐거운 장르의 한계 때문인가, 그래서 그가 영화 내러티브보단 문자 텍스트의 전달에 집착했을까, 라는 생각까지 이르게 됐다. 그런 전제라면 정성일이 만든다는 다음 영화를 좀 더 힘을 빼고 볼 수 있을까. 아직까지 판단은 이르다.


*미디어스에 실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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