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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엄마한테 전화하면서 울었습니다. 너무 창피하다고. 선생님이 칠판에 ‘급식지원신청서 제출’이라고 쓰시기에 가슴이 철렁했지요. 제 이름을 부르실까 봐서요. 아이들이 눈치채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요? 경험자분들 꼭 좀 대답해주세요.” “저도 이 문제로 고민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라는. 그냥 떳떳하게 가서 말하세요. 그리고 정 창피하시면, 급식비 지원 받으려고 일부러 가난하다고 거짓말했다고 하세요. 그럼 애들도 ‘와 좋겠다’ 그래요.”


2010년 12월 20일 EBS <지식채널e>가 방송한 ‘공짜밥’ 편에 나온 학생들의 인터넷 질의응답 가운데 일부다. 최근 보편적 무상급식을 두고 오세훈 서울시장이 몽니를 부리는 가운데 전파를 타면서 더욱 화제가 됐다. 누리꾼들은 영상을 보고 ‘눈칫밥’ 먹는 아이들의 처지에 공감하고 공분하며, 이런 상황이 보편적 무상급식의 당위성을 설명해준다고 말한다. 2010년 10월 말 서울시가 서울시민 1천 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82.7%가 보편적 무상급식의 필요성에 찬성 의사를 밝힌 까닭에도 ‘아이들에게 더 이상 눈칫밥을 먹여선 안 된다’는 공감이 큰 구실을 했을 것이다.


하나의 사회적 정책을 추진할 때 그 정책에 대한 시민의 감성적 공감을 얻는 것은 분명 필요하다. 그 공감이 비록 ‘불우한 아이들’에 대한 시혜적이고 감성적인 동정을 담고 있다 해도, 어떤 현상을 마주하고 공감과 공분을 끌어내는 과정은 의미가 있다. 저소득층 자녀들을 소외된 상태로 내버려둘 수 없다며 공분을 느꼈을 때 오는 과잉의 충동은, 우리의 일반적 인식 너머에 존재하는 무언가에 대한 사유의 과정을 끌어내는 계기가 된다. 그래서 정책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꼭 이성적이어야 한다는 명제가 필연적으로 작동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같은 이유에서 감성적 공분에 따른 과잉의 충동은 도구적 과정의 단계로만 멈출 필요가 있다. 눈칫밥을 먹이지 않기 위한 시혜적 복지의 논지에만 머무르면, 보편적 무상급식이 가진 함의의 많은 부분을 놓칠 수 있다. 이는 보편적 무상급식을 “망국적 복지 포퓰리즘”이라고 매도한 오 시장의 발언에 담긴 오류를 짚어내는 데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눈물샘의 효용과 한계


그런 점에서 이준구 서울대 교수가 최근 ‘무상급식 논쟁을 보며’(1)라는 글에서 밝힌 견해는 부분적으로 참고할 만하다. 이 교수는 보편적 무상급식 논쟁이 사회복지 차원에서만 이뤄지는 점에 대해 ‘논점 설정에 오류가 있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교육을 국가가 제공해야 할 ‘가치재’의 관점으로 바라봤다. 그는 “가치재는 모든 국민이 최소한 일정 수준 이상의 혜택이 돌아가게 만들어야 한다는 관점에서 정부가 직접 생산·공급하는 상품을 뜻한다. 의료, 주택, 교육 서비스가 그 좋은 예”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무료급식을 사회복지 정책의 일종이라고 보면, 부유층에게 무료급식 혜택을 주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초등학교 교육을 의무화한 것은 그것이 가치재 성격을 가졌기 때문에 모든 국민에게 평등하게 그 기회가 돌아가야 한다는 취지가 그 밑에 깔려 있다. 부유층 자제가 초등학교 수업료를 내지 않는 데 대해 아무도 시비를 걸지 않는 건, 교육이 가치재의 성격을 가졌기 때문에 의무교육이란 제도를 만들었고, 의무교육은 무상으로 제공한다는 사회적 합의를 이루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 교수의 관점은 무상급식 역시 근대국가 시민교육의 한 과정이기 때문에 당연히 국가가 책임지는 의무의 한 부분이라는 점을 설명하는 데 탁월하다. 학교라는 공간에서 친구들과 함께 비슷한 먹을거리를 공유하고, 자신의 먹을거리를 구성하는 음식 재료가 사회의 어느 부분에서 공급되는지 알아가는 것은 공동체 사회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치는 근대국가 교육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과정이다. 그런 점에서 ‘무상급식’이란 호명을 ‘의무급식’으로 바꿔야 한다는 일부 주장은 의미가 있다.


여기서 오 시장의 ‘복지 포퓰리즘’이라는 논지가 헛다리를 짚고 있다는 점이 자연스레 까발려진다. 복지 시각에서 무상급식을 본다면, 오 시장이 주장한 ‘부자급식’에 해당하는 부유층 자녀 일부를 빼고, 저소득층과 중간 계층 자녀를 아우르는 선별적 무상급식을 하면 된다. 오 시장의 서울시는 2010년 11.6%의 극소수 저소득층만 급식비를 무상으로 제공했다. 그렇다면 반대로 상위 11.6%만 빼고 무상급식하는 것이 복지 시각에서 본 무상급식의 논리가 되지 않을까. (물론 그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무상급식은 복지의 의미보다는 국가의 책무로서 시행해야 할 교육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선별을 넘어 보편적이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 교수의 견해는 그 자체로만 봤을 때 한계가 있다. 이 교수의 견해에 머무르면, 교육을 국가가 제공하는 ‘재화’ 혹은 ‘서비스’로 보는 관점에 갇히게 된다. 교육을 ‘가치재 서비스’로 보는 시각에는 국가가 교육 기반을 제공하는 이유가 국가가 원하는 가치에 따르는 국민을 길러내기 위한 것이란 맥락이 녹아 있다. 이 관점은 ‘자유주의적 개인이 스스로 자기계발을 통해, 국가라는 공동체에 이바지하는 주체로 자연스레 승화시키는’ 공병호식 신자유주의 자기계발 통치 이데올로기와 이념적 평행선을 그을 수밖에 없다. 공병호 경영연구소장은 최근 자신의 홈페이지(2)에 ‘무상급식과 세계관의 충돌’이란 글을 올려 “스스로 비용을 지불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스스로 부담하도록 하는 것이다. 자유주의는 개인적 선택을 중시하고 이것이 여의치 않을 때에 한해서 사회적 선택의 도입에 찬성한다. 무상급식에 대해 사회적 선택의 범위는 스스로 지불할 능력이 없는 부모에게 국한되어야 한다”며 ‘수익자 부담의 원칙’과 ‘자기 책임의 원칙’을 거론했다.


이준구와 공병호를 지양하면…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교육 본연의 의미부터 톺아보며 공병호식 ‘신자유주의 자기계발’ 담론을 공박할 필요가 있다. 교육은 공동체라는 공간에서 타자와의 만남, 그로 인해 이뤄지는 관계를 통해 주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본연적 의미가 있다. 김상봉 전남대 교수는 이와 관련해 ‘서로주체성’이란 개념을 제시한다.(3) 김 교수는 “나는 타인의 부름을 통해 자기를 의식하며, 타인의 기쁨과 슬픔 속에서 자기의 기쁨과 슬픔을 발견하고, 타인의 욕구 속에서 자기의 욕구를 확인한다. 그런 한에서 너와의 만남이 없다면 나 또한 주체로서 존재할 수 없다. 내가 오직 너를 통해 내가 된다는 것, 이것을 가리켜 우리는 서로주체성이라 부른다”고 말했다. 결국 교육은 사회적 존재로서 개인에게 ‘사회의 주인이 될 때에만 나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존재로서 주체성을 형성해갈 수 있는 장을 열어주는 목적을 지닌 관계의 행위 세계이다.


그렇기에 교육은 훈육과 달라야 하고, 국가나 교사는 ‘국민’이나 ‘학생’을 교육하는 일방적 주체라기보단 서로주체성의 수평적 단위 구성원으로서, 타자- 국민 혹은 학생- 가 주체성을 형성할 수 있는 교육의 장을 열어주고, 그 내용을 관장하는 보조 역할로서 책무를 이행해야한다는 명제가 가능하다. 그래서 보편적 무상급식은 같은 음식 재료로 만들어진 음식을 함께 먹으면서, 그 음식을 받아들이는 내 욕구와 타자의 욕구, 음식 재료를 생산하는 타자와 그 음식 재료를 음식으로 가공하는 타자의 사회적 존재를 주체적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데 중요한 교육적 의미를 지닌다. 이준구처럼 급식을 국가가 ‘서비스’로 제공하는 가치재로 보는 관점에 머무르거나, 공병호처럼 수익자가 음식을 상품으로 두고 교환하는 재화의 의미로 해석해선 안 되는 까닭이다.


이번 보편적 무상급식 논쟁에서, 근대국가 구성원으로서 우리가 내는 세금이 어떻게 쓰여야 한다는 인식적 사유를 하는 계기가 된 점은 의미가 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 사회의 교육은 옆에 있는 공동체 구성원을 밟고 올라가는 무한경쟁 체제로 작동하며, ‘내 새끼 이기주의’로 발현되는 학부모들의 욕망 구조를 충실히 재현해왔다. 교육은 공동체 구성원에게 잠재적 주체성을 현실화하는 장이어야 한다는 본연이 배제된 채, 개인이 개별적으로 부담할 수 있는 사적 재화를 통한 사교육 서비스 활용의 극대화, 그리고 더 가진 자가 덜 가진 자를 ‘밟고 올라서기’에 유리한 기반을 위해 공교육에 쓰이는 세금을 최소화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기능해왔다.


이는 1990년대 중반 이후 교육 이데올로기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1995년 이전 한국 사회의 교육은 국가가 통제력을 발휘하기 위해 국민을 훈육한다는 국가주의 통치 이데올로기의 도구였다. 그러다 1995년 5·31 교육개혁을 통해, 교육‘공급자’인 국가와 학교, 교사 중심주의에서 교육 ‘수요자’인 학생과 학부모 중심의 소비자 선택권과 주권론이 부상하기 시작했다. 교육은 공급자의 ‘자율성’과 ‘다양성’을 바탕으로 학교 현장을 서비스화하고, 소비자가 주체적으로 교육서비스를 선택하고 그 비용을 지불하는 과정을 통해 교환 관계를 형성했다. 하지만 여기서 교육은 자연스레 국가의 인적자원을 개발하는 도구로 작동했다. 국가와 결합한 자본은 국민이 스스로 자기계발을 통해 경쟁력 있는 주체가 되도록 유도하면서, 경쟁력을 계발하지 못한 개인은 철저히 도태시키고 그 책임까지 개인에게 오롯이 전가했다.


출판시장을 휩쓴 ‘성공’을 위한 자기계발서는 개인을 국가와 자본을 위한 충실한 개별적 구성원으로 최적화해야 한다는 의식을 내면화했고, 국가와 자본은 별다른 재화와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아도 ‘성공’의 강박으로 내모는 개인들의 아귀다툼을 통해 자연스레 그 강박을 통치했다. 여기서 실패한 개인은 실패의 까닭을 온전히 자신에게만 묻고, 그 옆에 서 있는 또 다른 개인들도 ‘네 선택에 따른 결과’라고 말하며 실패한 개인을 철저히 배제하는 환경을 함께 조성했다. 서동진 계원디자인예술대 교수는 “친밀함으로 묶인 관계가 아닌데도 우리는 사회적 현실을 개인들끼리 자신의 꿈과 의지를 실현하려고 분투하는 세상처럼 그린다. 가난이나 차별을 비관해 죽은 이에게서 우리는 가난과 차별을 보기보단 그의 심약하고 무력한 태도를 먼저 떠올린다”고 했다.(4)


밥에서 시작하는 교육 주체성


하지만 15년 동안 이어진 정글의 무한 약육강식 체제는 자기계발에 매진해온 개인들을 지치게 만들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보편적 무상급식’이라는 화두가 복지 담론으로나마 발화한 건, 지친 개인들의 아우성이 과잉의 충동으로 조금씩 발현되기 시작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보편적 무상급식이 과잉의 충동을 부른 복지 담론에 머무르지 않고 교육 본연의 의미, 인간 본연의 공동체 심성을 되찾기 위해 기꺼이 내 세금으로 그런 환경을 조성해줄 수 있다는 인식으로 지평이 확대할 때, 근대적 ‘정상국가’의 재현을 위해 개별적 주체의 이기적 욕망이 구조적으로 재편되는 길이 열리게 된다. 그럴 때 사회 구성원은 국가와 자본에 이용만 당하지 않고, ‘구성원으로서의 나’라는 주체성을 온전히 되찾아오는 도구를 확보해 국가와 자본에 맞설 수 있게 된다. 보편적 무상급식에 대한 소구가 시혜적 나눔에서 오는 게 아니라, 착취당하지 않을 미래적 나 자신을 위한 작은 발걸음인 건 그런 까닭을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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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준구 교수 블로그 http://jkl123.com.

(2) 공병호 경영연구소 http://www.gong.co.kr.

(3) 김상봉, <학벌없는 사회: ‘학교’를 버리고 시장을 떠나라>, 메이데이, 2010.

(4) 서동진,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 돌베개, 2009.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1년 1월호에 실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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