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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정환씨가 경찰 조사를 위해 서울경찰청 현관에 도착하는 순간을 취재하는 사진기자와 방송카메라 기자 80여명의 모습 ⓒ한겨레



둘은 최근 가장 많은 눈길을 끌었다. 한 명은 영화를 만들어 개봉 한 달을 며칠 앞두고 누적 관객 수 237만여명[각주:1]을 모았다. 첫 주 127만여명을 모았던 기세는 어느덧 수그러든 모양새지만, 실패로 불리기엔 아직 이르다. 다른 한 명은 국외 원정도박으로 넉 달 남짓 ‘도피’ 생활을 하다 귀국하면서 언론과 대중으로부터 십자포화를 받고 있다. 입은 옷이 ‘명품’이라며 “겸손하지 못하다”고 비판받고, 쓴 모자가 도깨비 모양을 하고 있다고 “국민을 놀리고 있다”고 야단맞았다. 이미 예상했겠지만 앞은 심형래, 뒤는 신정환이다.

둘은 애매한 위치에 서 있다. 심형래는 평론가들에게 평가 대상조차 되지 못하는 수모를 당했다. 문화평론가 이동연은 “<라스트 갓 파더>는 별 하나 주기도 아까운 영화”[각주:2]라고 혹평했고, 진중권은 심형래와 ‘심빠’, 그리고 그들의 언쟁에만 눈독을 들이던 연예 매체들의 ‘노이즈 마케팅’을 거부하며 영화 자체를 외면했다. 그럼에도 적어도 237만여명의 대중은 그의 영화를 선택했다. 물론 예상보다 훨씬 적은 수치이고, 연말 연초 아이를 데리고 갈 데가 없던 가족 단위 관객이 많았지만 말이다. 반면 신정환은 그와 반대 지점에 서 있다. ‘인터넷의 다수’로 대표되는 ‘대중’과 그들을 등에 업은 연예 매체들은 준엄함을 갖춘 채 법과 도덕으로 그를 단죄했다. 그리고 그들은 신정환에 대한 단죄가 ‘과잉’이라고 지적하는 진중권을 향해서도 “무책임하다”고 꾸짖으면서 무감한 듯 클릭 수를 올렸다.


‘대중’이란 용어는 그만큼 편리하다. 펜대를 쥔 사람은 대부분, 자신의 발화가 대중 일부에게나마 지지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면 모처럼 용감해진다. 이때 펜대를 쥔 사람은 스스로 동원한 대중의 실체를 과대포장하고, 스스로 과대포장한 대중을 다수 혹은 전부라고 믿는다. 게다가 심형래의 영화를 선택한 237만여명과 그의 영화에 후한 평점을 매기며 “심형래의 노력을 폄하하지 말라”고 항변하는 대중의 존재가 펜대를 쥔 사람에게 사적인 이익까지 가져다준다면, ‘다수 대중의 지지’란 품에 안겨 자신의 안락함만 추수하기에 더할 나위없이 좋은 기반이 된다.

여기에 신정환의 경우처럼 법과 도덕이라는 제도까지 뒷받침하면, 그들의 나르시시즘은 더욱 부풀어 오른다. 법과 도덕은 펜대를 쥔 사람이 자의적으로 동원한 대중을,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는 대중으로 믿는 신화를 재현해주는 도구로 기능한다. 법과 도덕이 존재하므로, 다수 대중이 그렇게 믿고 있거나 믿어야 하는 가치가 신정환이라는 ‘범법자’ 혹은 ‘부도덕자’에 대한 비난으로 표출되고, 그 비난의 표출은 그 자체로 정당성을 가진다고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심형래의 영화를 소구하길 원치 않는 대중, 그리고 신정환의 ‘일탈’을 법과 도덕의 관점으로 재단하길 거부하는 대중의 존재는 자연스레 은폐된다.


하지만 이 지점에만 머무르면, 심형래에 대해 분명히 존재하는 일부 대중의 소구와 신정환에 대해 분명히 존재하는 꾸짖음의 욕망을 해석하는 데 한계에 봉착하게 된다. 펜대를 쥔 이들이 작동하는 대중 동원 기제만으로 대중의 소구와 욕망을 온전히 풀이하긴 어렵다. 그래서 나는 잠시 1999년을 떠올렸다. 심형래는 1999년 김대중 정부의 국정홍보처가 선정한 ‘신지식인 1호’였다. 그는 국정홍보처의 TV 광고에 등장해 “못해서 안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니까 못하는 겁니다”라고 말했고, 국정홍보처는 이에 더해 “자기만의 새로운 아이디어가 있다면 당신도 신지식인입니다. 신지식으로 제2의 건국을 이룩합시다”라고 말했다.

‘신지식인’은 끝없는 자기계발로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고, 이 아이디어를 통해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면서 국가의 ‘지식기반경제’를 뒷받침하는 인적자원의 상징이었다. 심형래는 지난 11년 동안 ‘인적자원의 상징’으로써 국가의 지식기반 문화경제에 이바지하라는 명령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어찌보면 지극히 충성스러운 개인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 역시 그에게 영화 제작비의 70%를 ‘국민세금’으로 충당해주겠다는 의사를 내비칠만큼 의리를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무서운 것은 “심형래의 노력을 폄하하지 말라”는 대중 일부의 맹목적 항변이 여기에 그 맥락이 닿아있다는 점이다. 심형래의 노력은 국가의 노력으로 환원되고, 그가 노력하지 않으면 국가의 경제적 기반도 힘을 잃게 될 것이란 대중의 불안이 그 맹목성을 담보해 맹렬히 작동한다. 그리고 그 대중의 불안은 국가의 경제적 기반을 자신의 경제적 기반으로 환원해 생각하는 데서 기인한다. 모두 함께 도태되지 않기 위해 끝없이 자기계발을 하는 총합이 국가경제를 이끌어가고, 그 국가경제의 이익이 나에게 돌아올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단 한 번이라도, 그 '국익'의 실체를 피부로 느껴본 적이 있던가.

여기서 신정환은 정확히 그 반대 지점의 처지에서 비난의 대상이 된다. 신정환은 대중 일부가 보기엔 ‘자신을 컨트롤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위해 노력하지 않는’, 그래서 도박 중독을 떨치지 못한 무력한 개인, 나아가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존재에 불과하다. 끝없이 자기계발을 해야만 먹고살 수 있기 때문에 모두가 분투하고 있는 현재의 한국 사회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개인으로 인지된다. 그런 개인은 ‘대중의 사랑을 받는 연예인으로써 그 사랑을 자본으로 환산해 먹고살 가치가 없다’는 인식도 작동한다. “신정환의 도박중독이 청소년에게 악영향을 미친다”는 발화에는, ‘국가 경제에 이바지해야 할 미래의 인적자원들의 일탈’에 대한 대중의 불안까지 담겨 있다. 그런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그들은 신정환의 태도를 굴종으로 압박하려는 강박까지 동원한다.

신자유주의적 자기계발 담론은 그렇게 대중 일부를 강박적으로 옥죄고 있다. 개인이 끝없이 노력한다면, 그 노력을 통해 생산된 결과물이 어떤 가치가 있든 상관하지 않고 그 노력 자체만으로 결과물을 포장하는 건, 그런 개인들의 강박에서 나오는 개별성의 총합이다. 여기에선 영화라는 예술의 장르가 어떤 미학적 가치를 가지는지, 혹은 어떠한 사회적 맥락을 품고 있는지 따져볼 수 있는 여유가 없다. 되레 그런 미학적이거나 사회적인 평가에 대해 ‘자발적으로’ 방어막을 치며 ‘노력하는 개인’을 보호하려는 강박적 자기계발 연대만 오롯하다. 반면 노력하지 않고 무력한 개인은 철저히 배제된다. 개인들은 끝없이 자기 절제력을 발휘하면서 자신의 ‘도덕적 해이’를 방조하지 않아야 한다. 절제력 없는 개인은 무한경쟁 사회에서 배제되어야 할 존재에 불과하다고 그들은 스스로 믿는다. 심형래와 신정환은 그런 점에서 한국 사회의 현재를 가로지르는 동전의 양면이라 할 수 있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고 있는가.

*미디어스에 실렸음


  1. 1월23일 기준.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본문으로]
  2. 1월7일 노컷뉴스 라디오 녹취, http://www.nocutnews.co.kr/show.asp?idx=168388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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