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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정 민주노동당 성남시의원이 성남 판교주민센터 비정규직 직원을 폭행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설 연휴 첫날 고향으로 가는 기차를 타고 있던 나는 온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이 의원은 주민센터 직원에게 고성을 지르며 신발과 서류뭉치를 던졌고, 직원의 머리채를 잡으려 하는 등의 폭행을 저질렀다. 뉴스 동영상에는 민주주의의 제도적 절차를 통해 정당성을 부여받은 권력이, 자신의 권력을 활용해 보호해야 할 대상을 향해 되레 위계적 폭력을 행사하는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내가 경직됐던 건, 이 의원이 저지른 폭력에 이 의원이 부여받은 제도적 권력, 그리고 이 의원 개인의 권위의식이 겹겹이 착종돼 있기에 사안이 가볍지 않다고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어진 소식은 더 참담했다. 이 의원은 주민센터에서 보내는 명절 선물을 거부하려던 목적이 그 행위의 본질일 뿐 “절대 때리거나 폭행한 적은 없다”고 해명했다. [각주:1] 이 해명은 마치 최루탄을 쏘아 놓고 직격으로 맞은 사람이 없으니 그건 폭력이 아니다, 라는 식의 말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가 만약 시의원이라는 '권력 기관'에 명절마다 선물을 보내 환심을 사려는 공공기관의 인습을 두고 저항하려 했다면, 그 인습을 작동하는 공공기관의 권력자와 맞서 부당함을 지적하는 것이 옳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맞선 대상은 그런 인습에 저항할 힘을 가지기 힘든 존재였다. “그 직원이 나에게 사과했으면서, 나를 (모욕 혐의로) 고소했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발화는, 자신의 본질적이고 목적적인 의도만 옳다면 어떤 수단이라도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식의 왜곡된 당위로밖에 읽히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이정희 민주노동당 대표가 즉각 사과를 표명한 뒤 열겠다고 말했던 징계위원회 회부가 임박한 7일, 스스로 탈당계를 냄으로써 자신은 일말의 책임도 질 수 없다는 의사를 행위로서 증명했다.

자연스레 이 의원의 위계적 폭력 행위를 비난하는 반응이 쏟아졌다. 나는 대부분의 비난에 수긍했다. 그 비난은 위계적 폭력이란 현상을 너머, 개별적 대표자에게 권력을 내맡기는 대의제 시스템의 본원적 한계를 일부나마 폭로하기 위해서라도 충분하진 못하지만 필요한 과정이었다. 그래서 나도 그 행위의 폭력성과 한계를 꾸짖는데 동참했다. 하지만 여기저기서 수긍하기 힘든 비난도 함께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비난들은 주로 과잉된 일반화의 오류에 근접하고 있었다. (여기서 진보진영으로 분류되는 일부 인사들의 무분별하고 무조건적인 ‘이숙정 옹호론’에 대한 거론은 차치해두자. 사실 거론하기도 부끄럽다.) 과잉된 일반화의 오류는 주로, 이숙정 의원의 개별적 폭력 행위를 ‘진보적인 이미지를 내세워 정계에 입문한 젊은 정치인’ 전반에 대한 도덕성 부재로 연결짓고, 나아가 좌파 정당 구성원이 가졌을 것으로 지레 상상하는 ‘도덕적 얼굴 뒤에 가려진 양면성’을 폭로하는 데까지 이르면서 표면화했다. 그렇게 한 개인의 윤리 부재 행위는, 일반화의 오류와 도덕이란 제도가 만나 집단을 매도하는 수단으로 확대 재생산됐다.



박은주 조선일보 기획취재부장의 글이 그 오류의 일단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박 부장은 사람들이 다른 비리 시의원보다 이숙정 의원의 경우에 더 강하게 분노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파했다. “진보적 혹은 좌파적 성향의 인물을 국회에, 시의회에 진출시키는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이전 세대의 구태와는 다른 모습을 보일 것’이라는 그들의 선전과 그걸 믿는 마음 때문이다. 진보적 성향의 이들이 GDP(국내총생산)에 크게 기여한 바는 없지만, 그들이 공동의 선을 위해 희생할 것 같다는 판타지가 유권자들에겐 있다. 그런데 그들의 행태가 구악 의원보다 더 형편없는 것이라면 그걸로 끝이다…사람들이 이숙정 사건에 분노하는 까닭은 알량한 권력일지라도, 일단 잡기만 하면 돌변하는 정치인의 모습이, ‘젊어서’ ‘여자라서’ ‘진보라서’ 다를 줄 알았던 사람에게서 그대로 반복됐기 때문이다.” [각주:2]

이 글에는 이번 폭력 사건을 발판삼아 진보 혹은 좌파 전체를 도매금으로 무력화하려는 기제가 곳곳에 숨어 있다. ‘이전 세대의 구태’라는 표현은 한국 사회 보수를 ‘이전 세대’로 환유해 구태를 저지른 주체에 대한 은폐를 시도하고 있고, ‘진보적 성향의 이들이 GDP에 크게 기여한 바는 없다’는 말은 삶의 모든 가치를 경제적 토대 형성 하나에만 집중시키면서 자연스레 진보의 ‘무능력함’을 환기시킨다. 결국 진보가 제대로 한 것도 없으면서 도덕적이기까지 못하다면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 라는 명제로 쉽게 귀결된다. 하지만 진보 진영 일부도 이런 인식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진보정당에 대한 도덕적 잣대는 다른 정당에 비해 훨씬 가혹하고 엄격한 것이 현실”이라는 현실론을 거론하며 진보 모두가 대중에게 두 손 모아 사죄해야 한다고 말했다. 진보 모두가? 과연 그런가.

나는 이런 오류적 시선들의 근원이 한국 사회의 진보 진영이 추구하는 도덕적 강박 혹은 대중이 진보 진영에게 요구하는 도덕적 시선의 과잉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남재일 경북대 신방과 교수는 한국의 현대사가 가진 왜곡된 ‘우’와 ‘좌’의 구분짓기 오류에 대해 이렇게 분석한 적이 있다. 그는 “우의 이념은 생존을 위한 전략, 좌의 이념은 정치적 이념에의 헌신으로 의식화했다. 냉전 이데올로기를 근간으로 한 반공국가인 한국 사회에서 ‘좌’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반항하는 정치적 타자를 총칭하는 범주였다…이 범주를 발명한 정치적 주체인 ‘우’는 물질적 탐욕을 정치적 결의로 포장하는 자부터 도덕적 파탄을 정치적 열정으로 위장하는 자들이 중심이 됐다. 덕분에 한국 사회에서 ‘좌’란 범주는 줄 서면 밥 먹기 어려운, 그러나 줄 서는 자들은 결기 있는 자들이란 범주로 각인됐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이 구도에서 권력은 힘에 호소하고 저항은 도덕에 호소함으로써 지배는 폭력화되고 저항은 미학화됐다. 폭력화된 지배와 미학화된 저항은 일종의 적대적 공생관계를 유지했다…87년 민주화 이전까지 힘에 의한 지배와 도덕에 의한 저항이라는 분열 구도는 계속됐고, 현재까지도 정치적 집단 무의식의 형태로 잔존한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각주:3]

결국 한국 사회의 좌파는 비도덕적인 우파에 저항하면서도 적대적으로 공생하며 상대적 도덕성으로만 존재 의의를 찾아왔고, 대중은 이 구도에 편승해 자신은 우파의 비도덕적인 생존 전략에 따라 물적 탐욕을 쌓아가면서도, 자신과 분리된 좌파에겐 ‘결기어린 도덕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그 존재 의의를 인정할 수 없다는 자아 분열적 시선을 강요해왔다. 이런 대중들은 한국 사회에서 타인에게 가장 쉽게 인정받을 수 있는 방법이 ‘도덕 스탠스에 묻어가기’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하나의 개인이 ‘도덕적으로 온당치 못한 일’을 저질렀을 때, 나의 기력을 소모하지 않고, 물적·정신적으로 손해를 보지 않으면서도 정당한 척 혹은 착한 척 인정받을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그 개인을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군중 속에 숨어 함께 손가락질하는 행위다. 군중 속으로의 편승은 나의 존재 미학까지 고스란히 앙양시킨다. ‘도덕적으로 우월한 군중과 그 속에 속해 있는 나’. 얼마나 멋진 말인가. 하지만 외부로만 향하는 대중의 이런 도덕 무장 강요는 고스란히 박은주 부장과 같은 이들에게 활용돼, ‘좌파=도덕성’으로 프레임화하고, 이는 다시 우파의 지배체제를 공고하게 만드는데 이용된다.

나는 되레 이 의원이 보여준 폭력과 일말의 해명 행위에서 외부에서 강제된 폭력적 도덕 감정과 개별적 자아의 괴리가 징후적으로 드러난 것으로 보인다. 제도로 강제된 도덕을 형식적으로만 흡수한 채 이를 개별적이고 주체적인 윤리로 사유하지 못하면, 언젠가 형식 논리가 바닥을 드러내게 되어 있다. 이 의원의 행위와 사고는 그 바닥의 산물이다. 그리고 그 괴리의 징후는 강제된 도덕성이 한국 사회의 우파에 의해 어떻게 지배권력의 운영 기제로 활용되는지도 함께 보여줬다. 도덕은 그 제도적 강제성으로 인해 개별적 주체가 관계를 통해 형성하는 윤리감정과 그 생성 기제가 다르다. 그런 까닭에 이 의원의 폭력과 궤변적 해명은, 도덕 부재가 아니라 윤리 부재가 낳은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이숙정 사건에서 사유해야할 건 이런 것들 아니었을까.

*미디어스에 실렸음

  1. 오마이뉴스 블로그, 이숙정 성남시의원, "정치 그만 두는 것 각오" http://blog.ohmynews.com/doomeh/275030 [본문으로]
  2. 조선일보, '완장 찬 민노당'에 분노하는 이유,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2/05/2011020500674.html [본문으로]
  3.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남재일 ‘말과 행동의 정치적 분열증을 넘어’,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548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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