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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만추> 스틸컷


홍상수의 영화 가운데 나를 가장 불편하게 만들었던 건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였다. 헌준(김태우)이 강제로 성폭행을 당한 선화(성현아)의 몸을 손수 씻겨준 뒤 “내가 섹스해서 깨끗하게 되는 거야”라고 내뱉는 장면을 봤을 때, 나는 참기 힘든 불편함에 눈을 질끈 감았다. 홍상수의 위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장면이 위악이 아니고 비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성폭행을 당한 여자친구를 앞에 두고 인자한 자세로 “오빠는 괜찮아”라고 얘기하는 수컷들이 우리 주변에 산재해있지 않던가. 성폭력이 남성과 여성의 이데올로기적 권력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폭력이라는 사실은 수컷들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내가 '소유한' 성이 침범당했느냐 여부일 뿐이다.

그래서 수컷에겐 폭력에 의해 상처받은 여성이 겪을 고통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라 배제와 부인의 대상이다. 수컷에겐 자신의 '소유물'이 다른 수컷의 성적 소유욕에 의해 침범당했다는, 영역다툼에서의 패배감이 치욕스러울 뿐이다. 그러면서 그녀를 이해하는 척하고 그렇다 하더라도 “너를 보호해줄 수 있다”는 위선을 자랑스럽게 드러낸다. 여전히 관계의 권력 지위에서 자신이 여성보다 우위에 있다는 점을 증명하는 것이 그런 습속에 내재된 진짜 목적이다. 그럴 때 이해와 소통이란 이름으로 상대를 포용하는 척하는 남성이란 존재는 얼마나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가.

하지만 이데올로기의 폭력에 상처받은 개인은 그런 위선적 소통에 무감하다. 제도의 폭력에 상처받은 인간에게 가장 먼저 나타나는 태도는 제도의 존재에 대한 강한 부인이다. 그러나 촘촘하게 짜인 제도의 관계망은 끊임없이 개인를 옭아맨다. 그런 개인이 어쩌다 위선적인 동정심에까지 직면하게 됐을 때, 개인이 그 다음에 찾는 단계는 제도에 속한 모든 타자와의 관계를 자폐적이고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것이다. 하지만 관계를 차단해도 타자가 스멀스멀 틈입해오면, 결국 개인이 다다를 곳은 자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부정이란 공간밖에 남지 않는다. 그럴 때 소통이란 이름을 들먹이며 다가오는 타자는, 개인에게 존재가 인식되지 않는 무(無)의 존재다. 그런 개인에게 이해와 포용의 이름표를 단 동정은 또 다른 폭력이 될 뿐이다.


영화 <만추> 스틸컷


애나(탕웨이)는 ‘사랑했던 남자’와 ‘결혼했던 남자’의 영역 다툼에 휘말려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한 ‘결혼했던 남자’를 죽였다. 그리고 교도소라는, 세상과 차단된 공간에 내몰렸다. 어느 날 엄마의 죽음이 그녀를 다시 세상으로 불러낸다. 하지만 애나에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타자는 이미 ‘무의 존재’다. 7년 만에 세상을 마주하는 애나의 무감한 표정은, 모든 관계와 타자의 존재를 원천적으로 차단한 자폐적 개인의 그것이다. 그런 그에게 불현듯 훈(현빈)이 등장한다. 이성을 향해 지치지 않고 스멀스멀 틈입을 시도하는 동물적인 훈이지만, 훈 역시 애나에겐 별다른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는 타자다. 세상과 차단된 애나에게는 '거래관계'를 기반으로 한 화폐도 의미가 없다. 훈에게 빌려준 차비 30달러를 되돌려받지 않아도 애나가 아쉬움을 느낄 까닭이 없다.

자폐적 애나를 향한 속물적 훈의 ‘작업’이 지루하게 반복되는 과정에서 애나와 훈은 화면상 한 공간에 있으면서도 함께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역설적으로 불통을 통해서 소통을 시작했다. 애나는 훈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하고, 그 이야기는 서로 소통이 가능하던 영어에서 소통이 불가능한 중국어로 바뀌어 간다. 훈은 그 이야기에 적절한 답이든 아니든 상관하지 않고, ‘하오’(좋다)와 ‘화이’(나쁘다)란 말을 내던진다. 그저 옆에 앉아 말이 아닌 말을, 듣지 못하면서 듣는다. 훈의 행위엔 애나의 고통에 대한 이해나 위무, 애나의 존재에 대한 포용, 위선적 소통에 대한 강박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만희 감독의 원작 속) 혜림에게는 잠시 세상에 나온 것 자체가 선물이고, 움츠려 있지만 사랑을 갈구하는 느낌이 있다. 그런데 만약 사랑 자체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어떨까. 누군가가 자신을 아끼고 예뻐하는 것 자체에 불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좋을 것 같았다." 김태용 감독의 말이다.


영화 <만추> 스틸컷


상처입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어떻게든 소통이 가능하다는 개인의 믿음은 종교적 도그마와 비슷하다. 소통이 가능하다 믿는 사람은 자신만의 시각 안에 타자의 존재와 둘 사이의 관계를 모조리 포섭해놓은 채, 그 관계가 성공적인 것이라고 지레짐작하며 홀로 “(상호) 소통됐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인간은 평생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다. 서로 마음이 통했었다고 하는 건 환상에 불과하다. 소통이 가능하다 믿는 사람에겐 '타자도 나와 함께 소통하고 있다고 생각할까'를 끝내 인식할 수 없는 근원적 한계가 존재한다.

그런 점에서 상처입은 자폐적 개인과의 관계는 차라리 상대의 아픔을 “이해한다” 말하지 않는 거리두기 속의 공존으로만 가능할지 모른다. 역설적으로 이럴 때의 관계는 불통을 통해 지탱된다. 관계에 대한 희망이 거세된 개인에게 소통의 희망을 끊임없이 주입하는 것만큼 부질없는 ‘자뻑’이 어디 있겠는가. 관계는 그런 ‘자뻑’이 해체된 지점에서 다소곳이 존재하는 것 아닐까. <만추>는 내게 그런 생각을 던졌다.


*미디어스에 실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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