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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바라보는 시선

함께 낯설지 않았어야 할 풍경

B급 낭인 [이재훈] 2011. 3. 10. 09:42

쌍용차 임무창씨 빈소 @출처:한겨레



그날도 여느 날과 다르지 않은 오후였다. 그즈음 나의 머리는 미디어에 하루가 멀다 하고 등장하는 온갖 죽음과 그 죽음의 서사들이 복잡하게 얽혀 한없이 무거웠다. ‘해고 트라우마’, ‘업무 스트레스’, ‘생활고’, ‘성적 비관’ 등의 범주들로 어쩌면 단순하게 분류된 죽음들은 때론 뜨거운 한탄과 함께, 때론 차갑도록 묵묵히 하나의 인간사로 미디어에 기록됐다. 한명의 인간으로 제대로 눈길조차 받지 못하던 인간들이, 마침내 죽음에 이르고 난 뒤에야 한명의 인간으로 기록되는 지독한 역설 앞에서 나는 그저 무기력했다. 그 죽음 뒤에 가려진 서사들은 오롯이 개별적일테지만, 어느덧 하나의 보편으로 묶인 채 나를 오래 짓눌렀다. 하지만 나는 그 보편성을 어떤 언어로 규합해야 할지 선뜻 떠올리지 못했다.

그러던 내게 가슴을 쿡 찌르는 짧은 글이 다가왔다. “몇 년 전 신촌 헌책방에 엄청난 양의 영화 이론 원서들이 매물로 들어왔다. 도저히 지나칠 수 없어서 현금을 탈탈 털어서 구입했는데 그 안에는 이런 메모가 들어 있었다. ‘영화는 이제 그만이다. 살아야 한다’ 그 메모는 아직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다.” [각주:1] 행간에 여백이 가득한, 가려진 서사의 뒤안길에서 나는 다시 깊게 침잠했다. 삶은 과연 살고픈 것인가, 살아지는 것인가, 아니면 견뎌야 하는 것인가. 노동은 과연 삶과 분리되는 것인가, 삶의 깊은 일부인가, 아니면 실존을 위한 필연으로만 존재하는 것인가. 그리고 예술은 과연 노동인가, 노동과 분리된 ‘하고 싶은 일’[각주:2]인가, 아니면 노동이면서 동시에 하고 싶은 일일 수 있는 것인가. 세 가지 범주의 얽히고 설킨 개념들 앞에서 나는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 여백의 서사를 읽기 이틀 전, 나는 내가 소속된 공간에서 발행된 신문에 실린 칼럼[각주:3]을 읽고 이번에는 한없이 난감했다. 칼럼은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잇따른 죽음, 삼성전자에 입사한 지 1년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25살 청년의 죽음, 구제역으로 순식간에 모든 것을 빼앗긴 한 축산농가 가장의 죽음, 학비 때문에 피자 배달을 하다 차에 받혀 죽은 아르바이트 학생들의 죽음들을 되뇌며, “쌀이나 김치를 조금만 더 얻을 수 없을까요”라는 쪽지를 남긴 채 빈곤과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스러진 한 시나리오 작가의 죽음을 거론했다. 칼럼은 “한 ‘유망한’ 시나리오 작가의 죽음이 지독히도 낯설었다. 국회의원과 정부까지 나선 사회적 관심은 더 낯설었다”고 했다. 이어 “그는 이웃집 문에 쪽지를 붙일 게 아니라 문을 두드려야 하고, 친구들에게 전화라도 걸어야 했고 피자 배달이라도 해야 했다”고 했다.

나는 그 글이 벽돌을 찍어내듯 똑같은 크기로 ‘평등하게’ 죽음들의 무게를 등가로 재배치하려는 강박에 시달리다, 그 강박의 과잉으로 되레 죽음들의 무게를 등가로 재배치하는 데 실패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고은씨의 죽음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그렇게 ‘낯섦’으로 배제할 성질의 것이었을까. 죽음 이후에야 사회적 관심이 있었다는 까닭으로 이미 죽음으로 사라진 최고은씨의 생전 행동에 사회가 어떤 당위를 요구할 수 있는 것인가, 나는 이해되지 않았다. 한명의 개인이 죽음에 이르는 개별적 과정은 ‘빈곤’ 혹은 ‘병마’, ‘신병 비관’ 혹은 ‘성적 비관’ 등으로 단순히 범주화하기 어렵다. 그렇기에 “죽기 전 그 정도는 했어야 하지 않나”라는 발화에는, 죽은 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 삶의 부분들이 어떻게 총체적으로 작동했는지는 사실 별다른 관심이 없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곳에는 “적어도 나는 너희와는 (혹은 너희의 관점과는) 다르게 볼 수 있다”는 ‘정신승리’만 덩그러니 남았다.

최고은씨의 죽음은 칼럼에서 거론된 것처럼 ‘사회적 죽음’과 배치되는 자리에 존재하지 않는다. ‘한류’로 일컬어지는 영화산업은 이미 한국 사회를 ‘먹여 살릴’ 재화로 통용되며, 실체를 알 수 없는 ‘국익’의 논리로 포장되고 있다. 그 안에선 승자 독식의 논리가 횡행한다. ‘로또’와 맞먹을 확률로 불리는 지독한 경쟁을 뚫고 승자로 자리매김한 콘텐츠가 생산된다 해도, 승자의 먹이는 오롯이 문화투자 자본과 배급 자본, 스타 감독과 배우에게 배분될 뿐이다. 콘텐츠 생산 과정에 일정한 노동을 바친 이들에게 몫이 돌아가지 않는다. 그렇게 구조는 문화산업에서 투명인간과 같은 콘텐츠 제작과정 생산 노동자들이 승자독식 이후의 배부른 먹이 가운데 생존을 위한 일부의 몫조차 품에 안지 못하도록 제도화해 있다. ‘꿈을 좇는 아름다움’을 들먹이며 ‘밥그릇’을 보장하지 않는 불합리한 구조 안에서 수많은 이들이 절망하고, ‘영화는 이제 그만이다. 살아야 한다’고 되뇌며 좌절하거나 쓰러져 간다. 하지만 스타 감독과 배우들은 여전히 ‘굿 다운로더’ 공익광고에 등장해 공정한 시장과 소비자 도덕만 강조하고 있다. 그들 중 누구라도 문화산업 노동자들의 열악한 처우를 위해 발벗고 나선 이가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어떠한가.

최고은씨의 죽음에 대한 사회적 관심 뒤에 가려진 숱한 소외자들의 죽음을 환기하기 위해서 최고은씨의 죽음과 예술인들의 사회적 처지를 배제하는 언표는, 다시 다수의 예술인을 소외자로 만들고 우리에게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한 죄’를 저지르게 만드는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결국 소외자들의 죽음에 대한 관심은 최고은씨의 죽음에 대한 것과 같은 크기의 벽돌로 덧붙여 나가야할 문제이지, 죽음 뒤에야 겨우 일어난 최고은씨나 달빛요정 이진원씨와 같은 예술인들의 죽음을 소외자에 대한 무관심처럼 보이지 않는 크기로 깎아내야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최고은씨의 죽음은, 임무창씨와 같은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잇따른 죽음, 삼성전자에 입사한 지 1년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김주현씨의 죽음, 그리고 그 직전에 일어났던 같은 회사 소속 박기숙씨의 죽음, 구제역으로 순식간에 모든 것을 빼앗긴 한 이름 모를 축산농가 가장의 죽음, 학비 때문에 피자 배달을 하다 차에 받혀 죽은 아르바이트 학생들의 죽음, 성적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한 채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학생들의 죽음과 정확히 등가의 무게를 가질 뿐 그 이상이 되어서도, 그 이하가 되어서도 안 된다.

모든 ‘사회적 죽음’은 그 죽음의 개별성만큼이나 죽음 이후 남은 사회적 과제도 개별적이다. 그런 점에서 이 숱한 죽음의 개별적 행렬에 대한 관심의 무게는 균등하게, 하지만 사회적 해결책은 개별적으로 풀어갈 필요가 있다. 예컨대, 삼성 반도체와 전자산업 노동자들의 잇따른 산업재해 사망 사건과 관련한 개별적 과제는, 산재 피해자에게 입증 책임을 부과하면서도 정작 기업에는 정보 공개의 의무를 부과하지 않고 있는 ‘산업재해보상보험법’ 개정 요구에 그 시작점을 둘 수 있겠다. 죽음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그런 개별적 죽음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친 제도에 대한 변화 요구에 이르러, 그저 슬픈 감정을 털어낸 뒤 곧 잊어버리고 말 동정이 아니라 현실적 실천으로 불현듯 등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출현한 현실적 실천 너머에, 저 죽음들의 보편성을 총체적으로 규합해낼 수 있는 정치적 상상의 공간이 존재하지 않을까. 우리가 집요하게 고민해야할 건 그래서, 죽음에 대한 사회적 관심의 무게를 재는 행위가 아니라, 끝없이 새로운 세계를 요구할 수 있는 상상과 사유일 것이다. 

*미디어스에 실렸음



  1. 트위터 : @slowland0 [본문으로]
  2. 박권일은 시사인 179호 ‘잠수함의 토끼 최고은씨’에서 ‘본인이 원해서 하는 일은 노동이 아니라는 통념’에 대해 통렬하게 공박했다. 나는 그의 견해에 동의한다.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9524 [본문으로]
  3. 곽병찬, ‘아주 낯선, 죽음의 풍경들’, 한겨레 3월2일치,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465882.html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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