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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육은 사회적 관계를 통해 나의 존재를 자각하는 주체적 행위다. 공동체 공간에서 이뤄지는 타자와의 만남은 수많은 ‘너’의 존재를 통해 ‘나’라는 개별적 존재가 무엇으로, 그리고 어떻게 사유하고 실천해야 할 지에 대해 인식하는 도구로 작동한다. 그래서 교육은 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하는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흔히 교육의 주체를 학생과 학부모, 교사라고 얘기할 때, 한국에선 학부모와 교사는 교육을 ‘하는’ 존재, 학생은 교육을 ‘받는’ 존재라고 인식한다. 교육이 가진 본연의 의미가 배제된 선입견이라 할 수 있겠다. 학생이 다른 학생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주체성을 자각해갈 때, 학부모와 교사는 관계와 인식의 장을 열어주는 객체로 존재해야 하지만, 한국의 학부모와 다수의 교사는 스스로 학생들을 타자화하고 자신들의 욕망을 대리시키거나 자신들의 ‘엄숙함’을 제도로 강제한다.
 

 김상봉 전남대 교수는 스스로를 교육하는 학생들의 주체적 인식을 ‘서로 주체성’이란 개념으로 설명했다. 김 교수는 “나는 타인의 부름을 통해 자기를 의식하며, 타인의 기쁨과 슬픔 속에서 자기의 기쁨과 슬픔을 발견하고, 타인의 욕구 속에서 자기의 욕구를 확인한다. 그런 한에서 너와의 만남이 없다면 나 또한 주체로서 존재할 수 없다. 내가 오직 너를 통해 내가 된다는 것, 이것을 가리켜 우리는 서로주체성이라 부른다”고 말했다. 그렇기에 교육은 훈육과 달라야 하고, 국가나 교사는 국민이나 학생을 교육하는 일방적 주체라기보단 서로주체성의 수평적 단위 구성원으로서, 국민 혹은 학생이 주체성을 열어주고, 그 내용을 관장하는 보조 역할로서 책무를 이행해야 한다.
 

 하지만 한국에서 교육은 이미 죽었다. 아니, 한국에서 교육은 처음부터 부재했다. 한국의 학교는 인간을 억압으로 길들이고, 복종을 강요해 온전한 스스로의 사유를 박탈한다. 한국의 학교는 ‘너를 통해 내가 되는’ 상상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너를 밟아야 내가 산다’는 약육강식의 법칙을 체화하는 공간이다. 학부모가 유아 때부터 아이들에게 학습 과정을 선행해서 익히게 하는 건, 내 아이가 그 학습 과정을 통해 미리 무언가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아이가 다른 아이보다 조금이라도 고지를 먼저 선점하게끔 하기 위해서다. 일류, 이류, 삼류로 줄줄이 등급화한 대학의 서열은 그 대학에 가는 학생의 사회적 지위를 결정한다.
 

 그리고 그 문제의 본질에 있는 학력과 학벌 우대는 졸업한 성인들의 사회적 신분으로 오롯이 재생산된다. 기를 쓰고 자녀를 좋은 대학에 보내려는 건, 자녀가 대학 졸업장이란 ‘신분증’을 바탕으로 좋은 노동조건에서 일하게 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공동체의 ‘더불어 삶’에서 ‘혜택’을 받아본 적 없는 한국인에게 그 ‘좋은 노동 조건’은 함께 누려야 할 것이 아니라, 내 자식만 누려야 할 것이다. 그래서 깊숙이 연계돼 있는 교육과 노동을 분리해 인식하고, 교육은 모조리 ‘나의 문제’로 열을 올리면서도, 노동은 모조리 ‘너의 문제’로 타자화하고 배제한다.
 

 <교육인가 사육인가>의 작가 김종철은 한국 교육에 공동체를 배제하는 습속이 자리 잡은 원인, 그리고 ‘왜 교육이 갈수록 사육으로 변질되고 있는가’(362쪽)라는 자문에 대한 해답을 일제 이후 단 한 번도 권력을 놓지 않은 기득권 세력의 존재에서 찾으려 한 것 같다. 언론인 출신이기에 스스로도 “교육 전문가가 아니다”라고 밝힌 그이지만, 언론인답게 수십 권의 교육과 역사 관련 저서, 신문과 잡지 기사들을 꼼꼼히 톺아가며 한국 교육 모순의 역사를 치밀하게 되짚는다. ‘일제 잔재’의 청산 실패, 태생적인 ‘친미 사대주의 교육’ 체제의 한계, 군사정권에 의해 탄압받은 교육 주체들의 아픈 역사는 당장 눈앞의 교육 현실에만 매몰돼 있는 우리의 시선을 시계열로 분산 배치해, 무엇이 그 모순을 낳은 역사적 원인인가를 본질적으로 사유하게 한다. 그리고 권력에 질문한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사육’으로 포장된 ‘교육’을 하는 것인가, 라고.
 

 게다가 핀란드와 프랑스, 독일 등 진보 진영의 교육 전문가들이 롤모델로 삼고 있는 국가들의 교육 제도 확립의 역사뿐만 아니라, 진보 진영 교육 전문가들이 그저 배제하고 마는 미국과 영국, 일본의 교육 역사까지 골고루 짚어 “배울 것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과 우리의 ‘차이’를 밝혀야 한다”는 인용 글(333쪽)의 취지에 충실히 부합한다. 저자는 “엄친아는 현실에 존재할 가능성도 있지만 영원히 실체로 나타나지 않는 이상일 수도 있다. 몇 해 전부터 서양의 선진국들은 물론이고 우리나라에서도 ‘세계 최고의 교육개혁을 이룬 국가’로서 주목을 받는 핀란드는 다른 나라들이 따라갈 수 있는 본보기인가 아니면 ‘엄친아’ 같은 존재인가”(332쪽)라고 되물으며, 언젠가부터 한국 사회에서 ‘교육 천국’이란 상징으로 기능하고 있는 핀란드에 대한 신화의 해체를 건의한다. 긍정적인 모습에만 매몰돼 한국 사회의 역사적이고도 태생적인 교육 현실의 한계를 돌아보고 견줘보기를 주저하는 이들에게 따끔한 일침을 더한다. 하지만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등 지난 ‘민주 정부 10년’의 교육 정책이 교육의 주체여야 하는 인간을 ‘인적 자원’으로 보고, 김영삼 정부 이후의 신자유주의적 경쟁 논리를 무비판적으로 계승하면서 자기 계발적 주체를 양산한 또 다른 ’권력’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에는 따끔함이 부족했다.
 

  파올로 프레이리는 <페다고지>에서 “모든 사람은 각자 자신이 처한 세계에서 존재하는 방식을 비판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힘을 계발해야 한다. 즉 세계를 정태적 현실로서가 아니라 변화 과정의 현실로서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라고 밝혔다. 그는 교사가 학생에게 일방적으로 지식을 주입하는 ‘은행 저금식’ 교육이 아니라, 서로가 공동 탐구자가 되는 ‘문제제기식’ 교육, 문제제기식 교육을 실행하는 데 있어 빠질 수 없는 방법인 ‘대화와 반(反)대화’ 교육으로 인간을 늘 생각하게 하는 교육이 진정한 교육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과연 무엇을 교육하고 있는가. 남이 얼마나 앞서갈까 불안해하며 스스로를 옥죄고, 결국 구성원 모두가 안달함을 미필적 고의로 전이하는 사회, 그래서 모두가 스스로 ‘사육’되길 바라는 나라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진 않을까, 라고 <교육인가 사육인가>의 저자는 묻는다. 그 물음의 근거로 제시된 한반도 안팎의 교육 역사적 사실 관계는 우리에게 사유의 틀거리를 제공한다. 그 물음의 해답을 온전히 주체적으로 사유하게 위한 도구로, 교육에 대해 스스로를 교육하는 매개로 <교육인가 사육인가>는 훌륭한 텍스트가 될 수 있을 법하다.

*이 글은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가 최근 발행한 '앎과 삶' 시리즈 1권, '교육-미래를 위한 확실한 대안'에 공저 글로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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