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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생활 초기에 포이동 판자촌 주민들을 취재하다 만난 사람이 있다. 그러니까 벌써 7년 전이다. 그는 자주 입버릇처럼 내뱉는 문장이 있다. 뭔가 머쓱해질 때 혹은 자신이 충분히 알고 있는 사안이지만 뭔가 말하기가 부끄러울 때, 그는 먼저 “형이 배운 게 있냐, 할 줄 아는 게 있냐”라는 말을 건네며 머쓱함과 부끄러움을 견제한다.

그는 10여년 동안 철거촌과 판자촌을 돌아다니며 주민들을 설득해 개발주의 공권력, 그리고 개발주의 공권력과 결탁한 건설 자본과의 싸움을 독려해 왔다. 그가 처음부터 철거촌 주민 생존 투쟁에 대해 대단한 정치 의식을 지녔던 것은 아니었다. 한 보험회사에서 상무의 운전사로 일하던 그는, 1997년 IMF 구제금융 때 사실상 정리해고라고 볼 수 있는 자진사퇴를 했다. "당시에 운전팀이 사람이 둘 있었는데, 회사 쪽에서 자꾸만 눈치를 주길래 내가 먼저 안 나가면 다른 사람이 잘릴 것 같았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어이가 없으면서도 가슴이 뻐근했다.

실직자가 된 그에게 갑자기 살던 동네의 재개발이 들이닥쳤다. 세입자였던 그는 단순히 “이건 뭔가 부당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그는 어느덧 이주대책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선봉에 섰고, 개발주의 공권력과 건설자본의 결탁 관계가 가진 모순을 몸으로 부대끼며 체득하게 됐다.

물적 토대가 없던 그에게, 2000년께 생긴 기초생활수급대상자 선정은 한줄기 빛이었다고 한다. 당시 초등학교에 갓 들어간 딸과 둘이 살던 그는, 수급비와 간간이 여기저기서 번 쌈짓돈으로 생활을 하며, 동네 재개발 때 도움을 줬던 다른 지역 사람들의 철거 반대 투쟁 현장을 뛰어다녔다. 생계를 유지하려 동대문시장에서 옷도 팔아봤지만, 투쟁 현장 사람들이 전화를 걸어오면 가게를 내팽개치고 달려가는 그의 옷가게가 제대로 장사가 될 리 없었다.

그렇게 10여년을 싸웠고, 그 시간 동안 그가 그렇게나 천착했던 포이동 문제는 아직 모순이 풀리지 않은 투쟁 현장으로 덩그러니 남아있다. 지난 6월 포이동에서 화재가 났을 때, 반값 등록금 촛불 현장을 둘러보던 내게 전화를 걸어 큰 목소리로 "어떻하냐"며 소리 지르던 그가, 오늘 갑자기 차를 한잔 마시자며 광화문에 찾아왔다. 그는 느닷없이 내게 명함을 건넸다. 만난 지 7년 동안 단 한 번도 건네받지 못했던 명함에는 잔뜩 이질감이 묻어 있었다. 경찰 정보과 형사들에게 쫓겨다니는 그였기에, 사실 그의 이름을 안 지도 오래 되지 않은 터였다. 그는 최근 한 변호사 사무실에서 수습 직원으로 일하게 됐다고 말했다. 소개를 받고 일하게 됐고, 변호사 업무의 현장보조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했다.

“그런데 왜 수습이냐. 왜 월급받는 정식 직원으로 대우해달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또 “형이 배운 게 있냐, 할 줄 아는 게 있냐”라고 말했다. 나는 “배운 건 둘째치고, 일을 하면 정당한 대가를 받아야지”라고 왠지 모르게 따지는 말투로 물었다. 그러나 그는 씨익 사람 좋은 웃음을 짓더니 “내가 받을만하다 생각되면 정식으로 얘기할 생각이야. 걱정마”라고 말한다.

사람 좋음이 절대적 가치가 아니고, 노동의 대가는 ‘받을만한 사람’이 아니라 ‘노동을 하는 사람’이면 조건 없이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런 그를 더는 추궁할 수 없었다. 그에게 따뜻한 국밥 한 그릇을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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