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강남 스타일> 뮤직비디오 한 장면 캡처


걸그룹 티아라는 단 한 번도 그들의 실재를 드러낸 적이 없다. 그들은 2009년 후크송 <보핍보핍>을 히트시키며 이름을 알렸다. 고양이 발 장갑을 손에 끼고 엉덩이를 흔들며 ‘보핍’만 110번 반복하는 노래다. 지난해 6월 발표돼 인기를 끈 <롤리폴리>는, 이 노래보다 한 달 전 개봉돼 736만 명의 관객을 불러 모은 영화 <써니>의 추억 장사 콘셉트에 그대로 편승했다. 물론 다른 걸그룹도 실재를 알 수 없는 이미지 상품이긴 마찬가지다. 소녀시대는 ‘순수하지만 섹시한 소녀들’이라는 역설의 이미지로 삼촌 팬들의 열광을 이끌었고, 카라는 ‘역경과 실수를 딛고 일어선 생계형 아이돌’이라는 ‘들장미 소녀 캔디’ 이미지로 오빠 팬들의 환호를 낳았다. 하지만 티아라는 그런 상품화한 이미지조차 제대로 구축한 적이 없다. 이미 대중성을 인정받은 걸그룹이나 다른 문화 상품의 이미지를 그대로 복제한 아이돌이면서도 시장에 연착륙한 특이한 경우다. 그 배경엔 ‘언론플레이의 대가’ 김광수 코어콘텐츠미디어 사장이 있다. 그는 어떤 매체가 됐든 자신이 생산한 ‘상품’이 언론이나 예능 프로그램에 나오게 하는 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렇게 티아라는 ‘이 시대의 삶에 나타난 모든 가짜의 요약’으로 소비됐다.

 

왕따 해결 의지 없는 왕따논란 

 

 그런 티아라가 사람들의 실제 삶에 개입했다. 가끔 언론플레이의 도구로 활용되던 멤버들의 트위터로 화영에 대한 집단 따돌림이 알려지면서다. 이전 방송에서 예능으로 별 문제 없이 소비되던 내용들도 집단 따돌림의 근거로 거론되며 집중포화를 받았다. 그렇게 티아라는 집단 따돌림이라는 사건을 통해 보편성을 얻었다. 평소 티아라의 존재와 노래를 모르던 학부모들까지 방송에서 티아라 멤버를 솎아내 퇴출을 요구하고 나섰다. ‘타진요’(타블로에게 진실을 요구합니다)와 획수 하나 다른 이름의 ‘티진요’(티아라에게 진실을 요구합니다)라는 인터넷 카페가 생겼고, 곧 34만여 명의 회원이 가입했다.

 여기서 보편성은 악명의 보편성이다. 그런데 보편화한 악명은 과연 어디까지 유효할까. 학부모들은 걸그룹이 상품으로 소비될 때는 별 관심 없다가, 집단 따돌림 사건으로 자녀에게 해악을 끼칠 수 있는 존재로 등장하고 나서야 퇴출 요구로 ‘실재에 대한 소비’를 시작했다. 그러나 티아라의 ‘실재에 대한 소비’를 요구하는 행위에서 정작 집단 따돌림이라는 폭력의 실재에 대한 관심은 부재하다. 그들의 요구에는 학교에서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는 집단 따돌림이나 학교 폭력 사태를 낳는 아이들 사이의 권력 관계가 어떻게 생성되는지 같은, 진짜 까닭에는 관심이 담겨 있지 않다. 아이들을 집단으로 모아두면 서로 그악스럽게 싸우는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고, 그러니 가해자만 퇴출하면 문제는 모두 해결되고 말 것이라는 단순 배제의 논리가 작동했다.

 ‘티진요’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들은 카페에서 “저희는 티아라에게 진실을 요구하는 것이고, 티아라 관계자 분들에게 진실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들은 티아라 멤버들이 기획사의 ‘언론플레이’에 가려진 이미지를 벗고, 직접 기자회견을 열어 “우리가 화영을 집단 따돌림했다”는 사실을 고백하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이 요구에도 정작 멤버들의 고백이 집단 따돌림 문제의 실제 해결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에 대한 관심은 담겨 있지 않다. 만약 티아라 멤버들이 ‘티진요’의 요구처럼 집단 따돌림이 있었다고 ‘진실’을 고백한다면, 이어질 과정은 ‘나쁜 짓을 한 티아라만은 더 이상 문화 상품으로 소비하지 않겠다’는 일종의 제한적 소비자 선언이 될 것이다. 과연 ‘티진요’가 한류 문화상품이 되어 전세계 시장으로 진출하면서 사생활도 없이 기획사가 철저하게 짜놓은 시나리오대로 로봇처럼 움직이는 수많은 아이돌들의 실제 삶에 대한 구조적 문제까지 건드릴 수 있을까. 정작 ‘티진요’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나 주변인도 결국 집단 따돌림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잠재적 공포를 덮기 위해, 얼른 가해자를 솎아낸 뒤 이들을 배타적으로 ‘집단 따돌림’하면서 소극적 가해의 자리에 안전하게 서고 싶은 것은 아닐까.

 

‘강남스타일’과 ‘이태원프리덤’ 차이는? 

 

 결국 보편은 껍데기일 뿐이다. 보편적으로 소비되는 것은 늘 실재가 없고, 그곳에 주체가 설 자리는 부재하다. 이때 보편은 자주 집단의 논리로 어떤 주체나 주체성을 재빨리 배제할 근거를 찾기 위한 도구로 쓰이기도 한다. 이런 예는 티아라를 둘러싼 풍경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유투브 뮤직비디오가 게시된 지 두 달이 채 안 된 9월 5일 현재 9905만여 조회 수를 기록하고, 각종 패러디 영상이 전세계에서 올라오고 있는 싸이의 <강남 스타일>에 대한 소비 열풍도 같은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다. <강남 스타일> 뮤직비디오가 열풍을 일으키며 다수에게 소비되고 있는 것은, 정작 이 동영상이 진짜 강남의 모습을 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동영상에 등장하는 사우나와 문신한 조폭, 노인들의 장기판, 테니스장, 관광버스, 승마장, 선캡 쓰고 뒤로 걷는 사람, 요가하는 사람, 목욕탕 등의 배경과 구성요소는 (승마장 정도만 빼면) 강남이라는 공간과 강남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실재가 아니라 보편적인 것들로 뭉뚱그려져 있다. 강남구나 홍익대 주변, 삼청동 같은 특정 공간에서 살거나 이 공간에 모여 정서를 향유하는 사람들의 문화를 그리지 않고, 싸이와 출연자들이 과장되고 익살스런 몸짓을 하면서 “옵 옵 옵 옵 오빤 강남 스타일”을 반복한다.

 반면 지난해 3월 공개된 유브이(UV)의 <이태원 프리덤>은 이태원이라는 공간의 전형적인 모습을 그대로 패러디하고 있다. 뮤직비디오 세트장에 지하철 이태원역 바로 옆 소방서를 뜻하는 ‘119’, 해밀톤호텔을 표현한 ‘해밀호텔’, 맥도널드 대신 등장한 ‘떡도널드’, 이태원의 큰 옷 전문점을 표현한 ‘빅 브라더’ 등을 전시하고, 직접 이태원의 밤거리 모습을 찍은 화면까지 삽입했다. 이태원을 경험해본 사람이면 누구나 UV가 패러디한 장면을 보고 이태원이라는 공간이 가진 정서를 함께 향유하며 즐거워한다. 하지만 이 공간을 전혀 경험하지 못한 이들이라면 어떨까. 이 차이가 <강남 스타일>의 보편적 유명세와 <이태원 프리덤>의 한정적 환호라는 결과를 낳은 것 아닐까. 결국 <강남 스타일>은 강남이 실재하지 않는 보편이란 껍데기이고, <이태원 프리덤>은 그 안에서 이태원이라는 공간의 문화가 읽히는 개별자다. 이에 대해 문화연구자 박미숙은 자신의 블로그 ‘호모 컬츄라’에서 “UV의 <이태원 프리덤>은 특정 계급의 정서를 관통하는 반면에, 싸이의 <강남 스타일>은 안타깝게도 사회적 유대감이나 공감대를 기반으로 한 웃음이 아니라 감각적인 웃음이다. 간단히 구분을 하면 <이태원 프리덤>은 대중문화를 구성하는 하위 문화에 기반을 둔 것이고, <강남 스타일>은 사회적 공감대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슬랩스틱’(극단적으로 과장된 우스운 행위)에 가깝게 연출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런 차이 때문에 <강남 스타일>은 보편성을 얻어 전세계로 통용되며 소비된 반면, <이태원 프리덤>은 한국에서도 이태원의 클럽을 오갔거나 미국에서 직수입한 신기한 물건들을 사본 사람만 공유하는 개별적 존재에 한정된 채 소비됐다. 특히 <강남 스타일>은 <나는 가수다>와 <슈퍼스타 K> 등의 각종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진정한 음악성을 갖춘 가수를 찾던 사람들의 소비 요구와 극적으로 대비된다. 이에 대해 김민하는 <한겨레21> 924호에서 “조금 성급하게 말하자면 대중은 ‘진정한 무엇’을 찾다가 그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무것도 없는 것’에 열광하다 이것이 지겨워지면 다시 ‘진정한 무엇’을 찾는다. 프로그래밍 용어로 표현하면 ‘널’(Null)과 ‘0’ 사이에서의 방황이다. 이 방황을 통해 우리는 또다시 ‘보편’의 부재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화장발 인터뷰’를 클렌징하라

 

 물론 <강남 스타일>이나 <이태원 프리덤>은 모두 즐거움을 위한 문화 장치로 그 어느 것 하나 소거되어야 할 당위가 있는 것은 아니다. 티아라의 집단 따돌림 사건 역시 문제의 보편적 공유를 막을 강제 장치를 만들자는 얘기가 아니다. 하지만 여기서 정작 고민해야 할 건 ‘보편의 소비가 과연 나를 위한 소비인가’란 물음이다. 오늘날 언론사 기자들은 자신의 기사를 조금이라도 ‘클릭’ 수가 높은 상품으로 만들기 위해 검색 키워드를 어색하게 짜깁기한다. 어떤 문제를 고발함에 있어서는 어설픈 객관주의 장치를 활용해 보편적 가치에 소구하려 애쓴다. 특히 어떤 사람과의 인터뷰를 통해서 보여주려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철저한 개별성이 아니다. 그 사람이 대중이란 모호한 군집에 의해 어떻게 보편적으로 소비되고 있느냐에 중점을 두고 그 사람의 기존 이미지를 재생산한다. 이런 맥락 속에서 기자들은 불신의 상징이 되어 때로 ‘기레기’(기자+쓰레기)라고 불리기도 한다. 연예 기획사는 언론이 정작 아이돌의 상품 이미지 뒤에 가려진 실재에는 전혀 관심 없다는 사실을 볼모 삼아 사람의 깊은 속내를 나누는 개별 인터뷰를 배제한다. 그리고 아이돌의 상품 이미지가 기사라는 상품이 되어 클릭 수를 높일 수 있게 기획한 형식적인 인터뷰로 언론플레이를 한다. 여기에는 언론이 생산한 기사를 소비하는 이들의 주체적 선택은 배제되어 있다. <나·들>이 찾으려 하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화장빨 인터뷰’를 클렌징하고, 집단 논리에 의해 객체로 존재하는 이들의 실재를 찾아내어, 이 실재와 정서를 공유할 수 있는 이들에게 소비를 묻는다. 껍데기 속의 알맹이는 그 물음 속 어딘가에서 발견되지 않을까.

 

티페인 트위터 화면 캡처


관련 보조 기사

 

‘강남 스타일’이 아니었다

 

가만히 돌이켜 보자. 그대가 싸이의 <강남 스타일> 뮤직 비디오를 처음 접한 때가 언제였던지. 싸이가 유투브에 뮤직 비디오를 공개한 건 7월 15일이었다. 이후 연예 뉴스 사이트에는 이 노래가 음원 차트를 ‘올킬’했다는 홍보성 뉴스가 수 백 개나 쏟아졌다. 하지만 정작 7월에는 <강남 스타일>에 대한 대중의 반응이 그다지 폭발적이지 않았다. 그 단초는 트위터 반응에서 살펴볼 수 있다.

 트위터 정보 분석 프로그램인 ‘트윗믹스’를 이용해 7월15일부터 3일 단위로 ‘강남 스타일’이라는 단어와 관련 사이트 링크가 함께 언급된 트위터 숫자를 분석해봤다. 뮤직 비디오 공개 직후인 7월15일부터 3일 동안은 언급 수가 330건을 찍었지만, 그 뒤 7월 말까지는 평균 150건 정도를 유지하는 데 그쳤다. 그러다 8월2~4일 갑자기 734건으로 폭증하고, 8월3~10일 918건, 9월20~22일 1079건으로 점점 수치가 올라갔다.

 흥미로운 건 영어 ‘GANGNAM STYLE’의 트위터 언급 수도 비슷한 추이로 증가했다는 점이다. 미국의 트위터 지수 집계 대행사인 ‘톱시’(Topsy)를 통해 ‘GANGNAM STYLE’ 언급 수를 살펴보면, 7월에는 하루 5000건 대를 오가는 데 그치다가, 8월1일부터 1만737건으로 껑충 뛴 뒤 27일까지 하루 평균 2만1707건을 기록하기에 이른다. 8월에 접어들자마자 전파력을 높인 어떤 계기가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리고 저스틴 비버를 발굴했다는 스쿠터 브라운과 힙합 뮤지션 티페인 등 외국의 저명한 스타들이 <강남 스타일>을 언급한 시점이 바로 8월 1일 인근이라는 점에 눈길이 가닿는다.



 이런 추이는 한국에서 일었던 <강남 스타일> 열풍이 일정 부분 팝의 주류 무대인 미국에서 ‘한류 상품’이 승인받았다는 ‘집단적 인정욕구’에 기반한 것 아닐까 하는 추정을 가능케 한다. 게다가 8월1일부터 25일까지 ‘강남 스타일’이 언급된 한국어 트위터 7664건 가운데 최고의 리트윗 수(1704건)를 기록한 트윗이 ‘LA다저스 스타디움에 싸이 등장! 강남 스타일 열풍의 현장’이라는 점도 이런 분석에 설득력을 보탠다. 한류에 대한 집단적이고도 산업적인 세계화 열망이 대중문화 소비의 영역안에 침투해 일정 부분 선택을 강제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강남 스타일> 열풍을 타고 이 노래에 대한 분석 글들도 쏟아졌다. 대중문화의 산업적 성공 모델에 고무된 글도 있고, <강남 스타일>이 ‘강남’으로 추수되는 한국 사회의 속물성을 고발했다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궁금증이 인다. 혹시 <강남 스타일>이라는 메시지를 수신하는 대중의 반응, 그리고 그에 대한 분석 모두에 어떤 과잉이 내포됐던 건 아닐까. 강렬한 스포트라이트처럼.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