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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이 쓴 <의자놀이>는 발행 두 달 남짓 만에 10만 부가 넘게 팔리며,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의 절박한 상황을 널리 알리고 있다. 이 책은 7년이 넘도록 복잡하게 이어져온 쌍용차 사태의 맥락과 사실 관계를 어느 정도 충실히 담은 한 권짜리 텍스트다. 그렇기에 줄지어 숨을 거두는 쌍용차 노동자들에 대해 단순한 동정의 시선이 아니라, 어떤 지점에서 함께 분노해야 할지 그 팩트를 알려주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도 풀리기 어려워 보이는 굴레도 안고 있다. 쌍용차 사태와 관련해 하종강과 이선옥이 이미 매체에 게재한 글을, 공지영이 <의자놀이>에 인용된 여러 글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인용’했다는 논란이다. 다른 인용 글과 달리 본문에 인용 표기가 전혀 없다. 책 뒷부분 ‘출처 및 참고자료’에 하종강의 이름과 해당하는 페이지만 표기했고, 문장마저 조금씩 고쳐져 있다. 유독 이 ‘인용’ 부분만 마치 공지영이 쓴 것처럼 읽힌다.

 

‘의자놀이’ 옆 대나무 숲

 

논란 이후 공지영은 “몸이 6㎏이나 불 만큼 힘든” 시간을 거치면서 트위터를 접고 지리산에 갔다가, 20일 만에 트위터와 대중 매체에 복귀했다. 그리고 이선옥은 여전히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논란의 책임을 ‘무명 작가의 시기심으로 몰아가는 조롱’의 시선과 싸우고 있다는 말을 트위터에 털어놓고 있다.

 

공지영은 <나·들>과의 인터뷰에서 이 ‘예외적 인용’에 출판사와 더불어 자신의 실수가 있었다고 인정했다. 출판사가 <의자놀이>의 여러 인용 부분이 본문보다 활자 크기를 작게 조절한 것과 달리 유독 이 부분 인용에서만 같은 본문 활자를 쓰는 실수를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지영은 “최종 수정 단계에서 나도 이게 내 글인 줄 알고 문장을 좀 고쳤어요. 활자 크기가 달랐으면 남의 글이라는 긴장감 때문에 (조심했을 텐데). 그건 내 실수죠”라고 했다.

 

하지만 공지영은 하종강과 이선옥에 대해 여전히 불신의 감정이 있음을 숨기지 않았다. 공지영의 불신은 요약하자면, 문제를 제기하면서 몇 차례 “말이 바뀐”[각주:1] 그들의 진심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고, 진짜 노동자를 위해서 문제 제기를 하는지 그 진정성이 의심스럽다는 얘기다. 그리고 자신의 입장에서는 “충격적”이었던 “오만 부 전량 회수” 요구[각주:2] 역시 그들의 진심과 진정성을 의심하는 근거로 밝히고 있다.

 

여기서 진심과 진정성이라는 불투명한 개념이 어떻게 하나의 굴레가 되어 <의자놀이> 논란의 매듭을 꼬이게 했는지가 읽힌다. 공지영과 출판사의 대처가 부적절했다고 생각한 이들은 본문에 인용 표기를 하지 않고 문장마저 고친 행위가, 그 부분을 마치 공지영이 쓴 것처럼 읽히게 하기 위함이었는지 혹은 단순 실수였는지 알 길이 없다. 공지영의 진심과 진정성은 공지영만이 알 뿐, 타자는 끝내 공지영의 마음을 읽을 수 없다. 거꾸로, 공지영 역시 하종강과 이선옥의 마음을 읽을 수 없다.

 

진심과 진정성의 논리는 비대칭 구조다. 자신의 진심과 진정성을 근거로 상대의 마음을 읽으려 하면 상대방의 진심과 진정성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종속된다. <의자놀이> 논란이 불거지면서 심각한 감정의 상처를 입었다 해도, 먼저 고려돼야 했던 것은 문제의 정확한 책임 소재, 즉 사실관계였다. 그리고 여기서 남는 것은 오롯이 ‘실수’라는 행위다. 그 실수에 의해 꼬인 매듭을 풀어야 할 1차적 책임은 여전히 공지영이 지고 있다. 하지만 공지영은 지난 두 달 동안 실수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다. 따라서 책임질 까닭도 없었다. 결과적으로, 진심과 진정성은 책임 소재에 관한 논쟁을 가로막는 도구 혹은 수사로 작용한 것 아닐까.

 

책임 소재, 끝내 풀지 못한 매듭

 

이런 풍경은 비단 <의자놀이> 논란에서만 있었던 게 아니다. <의자놀이> 논란이 벌어지기 얼마 전, ‘맑시즘’이라는 진보 포럼에서 강연 노동력을 지불하고 고작 ‘카스테라’로 그 대가를 주고받은 강사들과 단체 사이의 일이 알려지면서 트위터에서는 성마른 분노가 폭발했다. 지난 9월부터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번성하고 있는 트위터 ‘대나무숲’ 현상은 <한겨레21> 신소윤 기자의 표현대로 “동서고금을 막론한 ‘을’들의 외침”이다. <의자놀이> 논란에 뛰어든 이들의 문제제기는 같은 맥락 위에 있다. 그들은 진심과 진정성이라는 관형어가 붙은 어떤 대의에 의해 고스란히 열정을 착취당하거나 불안정 노동에 시달리고 있는 세대의 정서를 대변한다.

 

대선을 두 달 앞둔 지금 우리 사회의 한쪽은 ‘선한 눈빛에 담긴 힐링 능력’과 ‘강인한 남성성’(이상 문재인) 또는 ‘진심이 담긴 정치 개혁 실행 의지’와 ‘지도자의 진정성’(이상 안철수) 등이 그런 분노와 몸부림을 멎게 해줄 거라는 믿음의 열기에 휩싸여 있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정책적 ‘실수’를 저지를 개연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실수한 권력에 대해 이렇다할 책임도 묻지 못한 채, 되레 진심과 진정성이 없다고 책망당할 개연성이 더욱 큰 상태에 놓여있는지 모른다. 우리는 이미 2007년 대통령 선거와 2008년 총선 패배의 책임을 ‘20대 개새끼론’으로 환원하는 것을 본 적이 있지 않은가. <의자놀이> 논란에서 책임의 문제가 도드라지는 사정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어떤 책임의 부재는 그렇게 반복되는 것 아닐까.


*<나·들> 2012년 11월 창간호에 실렸다. <나·들>에 실린 기사 중에 칼럼식으로 쓴 글만 여기 옮겨놓으려 한다.




  1. 공지영은 “(하종강이 <경향신문>에 게재한 칼럼의 인용 원문 저자인) 이선옥 이름이 인터넷판에 있다고 했는데 없었고, 다시 종이신문에 있다고 했다가 또 없는 것으로 밝혀지고 나자, 결국 두 사람의 합의로 이름을 빼기로 했다고 말을 계속 바꿨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하종강은 “출판사 사람들에게 그와 같은 말을 한 적이 전혀 없다”고 반박했다. 논란 초기 트위터에서 “이선옥의 이름이 종이신문에는 게재돼 있다”는 확인되지 않은 주장이 사실인 양 회자됐었다. [본문으로]
  2. 실제 두 사람이 출판사에 보낸 전자우편에는 ‘이미 배포된 책은 가능한 한 회수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돼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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