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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1월 18일 오후 2시. 부산 영도의 한진중공업 조선소 사옥 앞에는 2개의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사옥에 걸린 현수막에는 ‘노동조합은 회사와 하나되어 한진중공업 75년 역사 조선 1번지 긍지와 자부심을 되찾겠습니다’라고 써 있었다. 그 건물 바로 앞에 세워진 천막 텐트의 현수막 문구는 ‘158억 손배소 철회하고 민주노조 탄압 중단하라!’였다. 지난해 11월 10일 김진숙(52)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은 노사가 ‘1년 뒤 정리해고자 복직’에 합의하자 농성 309일 만에 85호 크레인에서 내려왔다. 그 후 1년이 지난 지난 11월 9일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자 92명 복직’ 뉴스가 보도됐다. 그런데 왜 여전히 천막 텐트가 있고, 회사와 화합하는 노조와 회사를 비난하는 노조로 나뉘어 서로 대립각을 세우고 있을까.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 사옥에 새 노조에서 쓴 현수막과 금속노조 지회에서 쓴 현수막이 나란히 걸려 있다.



# 2012년 11월

2012년 11월 9일 오전 9시, 사 쪽은 약속한 1년이 꽉 차도록 정리해고자 92명의 복직 발령을 내지 않고 있었다. 92명의 정리해고자는 회사 신관 로비에 앉아 항의했고, 논란 끝에 오전 10시에야 복직 발령을 받았다. 하지만 이튿날 부산 간만동 연수원에서 경영설명회와 재입사 교육을 4시간 동안 한 뒤, 회사는 구두로 “여러분들은 오늘 이 시간 이후로 무기한 휴업”이라고 통보했다. 92명은 11월 11일에도 출근해 “언제까지 휴업인지는 알고 가야 할 것 아니냐”고 물었지만, 회사는 신관 로비를 폐쇄하고 “금속노조와는 어떤 교섭도 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사 쪽은 보수 언론들과의 인터뷰에서 “지난해 6월 모 선주사와 건조의향서를 체결했는데 파업 장기화에다 노동단체, 정치권 등 외부 개입 때문에 계약으로 연결시키지 못했다”며 “92명의 정리해고자가 살기 위해 투쟁해 회사 정상화가 지연되면서 협력업체 직원 3천여 명이 직장을 잃었다”고 주장했다.

 

# 2011년 10월

 

2011년 10월 16일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는 노동조합 지회장 선거를 치렀다. 그때까지 노조는 금속노조 지회 단일 노조로, 정리해고자 92명까지 포함해 노조원이 모두 807명이었다. 당시 현 지회장이 1번, 차해도(53) 전 지회장이 2번, 김아무개 후보가 3번으로 출마했다. 사 쪽은 노골적으로 김 후보를 밀었다. 후보 쪽에 법인카드를 쥐어줬고, 술을 마실 때마다 ‘건배도 3번’이라고 외쳤다. 하지만 차 전 지회장이 53%의 지지율로 2003년에 이어 또다시 지회장에 당선됐다. 정리해고자를 제외한 715명의 노동자들은 정리해고자와 함께 살기를 원했던 것이다. 노사는 ‘1년 뒤 정리해고자 복직’에 합의했고, 김진숙 지도위원이 환호 속에 크레인에서 내려왔다.

 

사 쪽은 그 1년의 유예 기간에 많은 ‘일’을 했다. 회사는 ‘3년 동안 상선 건조 수주가 없어 일감이 없다’며 순환휴직을 강행하겠다고 밝혔다. 노조 역시 순환휴직엔 동의했다. 전체 노동자들이 2개월씩 순환휴직하자고 건의했다. 그러나 사 쪽은 건의를 거부하고 ‘차별’을 선택했다. 12월 1일 파업 대오에 끝까지 남아 있던 273명에게 6개월 휴직 발령을 내렸다. 그리고 2012년 1월 10일, 선거에서 떨어진 김 후보를 내세워 복수노조를 설립케 했다. 이명박 정부와 국회 다수당인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주도로 2010년 1월 1일 개정된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에 따라, 복수노조 설립은 법적 제약이 없었다. 사 쪽은 “새 노조에 가입하면 휴직을 보내지 않겠다”, “생계지원금 1천만 원도 우선 지급하겠다”라고 선전전을 펼쳤다.

 

오랜 파업으로 조합원들은 지쳐 있었다. 1주일 사이에 473명의 조합원이 금속노조 지회를 탈퇴하고, 새 노조에 가입했다. 사 쪽은 금속노조 지회에 158억3천만 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고, 6개월 순환휴직이 끝나 273명이 복귀해야 하는 지난 6월 1일 그들에게 다시 무기한 휴직 발령을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금속노조 지회는 6월 7일 ‘민주노조 말살 책동 중단’, ‘손배 소송 철회’, ‘장기 휴업자 복귀’ 등을 요구하며 다시 천막 텐트를 쳤다. 하지만 지난 9월 단체교섭권은 130명이 남은 금속노조 지회에서 570명의 조합원을 확보해 다수 노조가 된 새 노조로 넘어갔다. 사 쪽과 새 노조는 며칠 만에 뚝딱 단체교섭을 타결했다. 임금은 올랐지만, 2003년 김주익(당시 40살) 전 지회장의 자살 이후 노사가 합의했던 ‘산업재해 9등급 때 근로복지공단 장애보상금 지급금의 300% 회사가 지급’, ‘사망사고가 나면 10년치 임금 지급’ 등의 노동 복지 관련 조항이 삭제됐다. 민주노조인 금속노조 지회는 갈수록 설 자리가 좁아졌다.


차해도 금속노조 한진중공업 지회장(왼쪽)과 박성호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 투쟁위원회 대표(오른쪽)가 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 2004~2008년

 

한진중공업은 호황기를 맞았다. 2004년부터 유럽에서 경기가 살아나기 시작했고, 상선 건조를 위한 계약이 쏟아졌다. 하지만 국내 다른 대형 조선소들은 이미 2007년까지 상선 건조 일정이 꽉 차 있었다. 보통 대형 상선을 건조하려면 최소 3년이 걸린다. 계약하고 설계하고 자재구매하고, 배 건조한 뒤 시운전 테스트까지 일정이 이어진다. 국내 다른 대형 조선소들은 2002~2003년 세계 경기가 불황일 때 적정 가격의 70~80%에 계약을 맺는 ‘저가 수주 전략’을 폈다. 당장 손해 보더라도 공장을 돌려야 하고, 그래야 회사의 지속 가능성이 어느 정도 보장되기 때문이다.

 

반면 한진중공업은 ‘저가 수주 전략’ 대신 2002년 정리해고 카드를 꺼내 들었다. 노조는 파업에 돌입했다. 2003년 10월 17일 김주익 지회장이 85호 크레인에서 목을 매 목숨을 끊었고, 10월 30일엔 곽재규(당시 48살)씨가 85호 크레인 4도크(야외 작업장)에 투신해 숨졌다. 이들의 죽음 이후 비난 여론이 거세게 일자, 사 쪽은 그제야 정리해고자의 복직과 임금 인상 등을 노조와 합의하고 공장 재가동에 들어갔다. 역설적으로, 사 쪽의 정리해고와 노조의 파업으로 인한 2년의 공백 기간이 2004년부터 2008년 상반기까지 이어진 한진중공업의 최대 호황기를 불러온 토대가 됐다. 적정 배 가격보다 적게는 10%, 많게는 50%까지 더 받고 건조 계약을 맺은 것이다.

 

한진중공업은 2005년 필리핀 수빅에 70만 평(231만4천m²) 규모의 조선소 건설 공사에 들어갔다. 하지만 2008년 말 금융위기가 시작된 데 이어 2009년 유럽발 경제위기가 찾아오자, 적정가 이하로 건조 계약을 맺지 않는 한진중공업에는 더 이상 주문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도 조남호 한진중공업 회장은 한진중공업 그룹이 지주사 체제로 전환된 2007년 이후 매년 수십억 원에 이르는 주식 배당금을 챙겼다.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1인당 인건비는 다른 조선소에 견줘 70%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싼값에 노동자들을 굴리는데, 배 건조 계약을 할 때는 경기가 안 좋을 때라도 시장 상황을 고려하고 ‘가능하면 도크를 돌리는 게 좋겠다’ 생각하면서 ‘저가 수주 전략’을 택하는 다른 조선소들과 달리 적정가 수주만 고집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모르겠어요. 그러면서 ‘정리해고를 거부하는 정규직 노조의 파업 때문에 수주가 안 되고, 협력업체 3천 명이 피해를 본다’고 주장하는 건 무리한 논리죠. 협력업체 3천 명의 피해는 경영진의 무능 탓입니다.” 한울 회계법인 송덕용 회계사의 말이다.

 

한진중공업이 적정가 이하로 수주하지 않는 방침에는 정작 다른 꿍꿍이속이 있을 거라고 의심하는 이들이 많다. 2004~2008년 같은 단기간의 ‘대박’을 위해 정규직 직원을 최소화하고, 언제든 계약 해지가 가능한 하청업체와 협력업체 위주로 회사를 운영하려고 한다. 한진중공업이 들어서 있는 8만 평(26만5천m²)의 부지도 눈여겨봐야 한다. 부산시의 ‘영도비전 2020 8대 프로젝트’를 보면, 2020년까지 뉴타운과 마린테크노폴리스 등이 영도에 들어설 예정이다. 회사로서는 기업의 지속 가능성을 굳이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2020년까지 8만 평을 보유하기만 해도 천문학적 보상비를 받을 수 있다. 경영진만을 위한 ‘대박’ 전략은 여전히 유효한 셈이다.

 

# 2003년 10월 17일

 

2003년 5월 26일. 한진중공업 마산 공장이 폐쇄되고, 300명의 노동자가 영도 공장으로 합류하면서 마산 공장 노조 차해도 지회장도 영도 공장으로 적을 옮겼다. 한진중공업 영도 공장은 그해 초부터 파업에 들어가 있었다. 2002년 한 해 동안 한진중공업은 ‘인력 체질 개선’을 내세워 ‘나이 든’ 노동자 650명에게 사실상 해고를 강요하며 구조조정을 했다. 배 짓는 현장에서 못질하고 페인트칠하고 용접하던 노동자들에게 사 쪽은 갑자기 교육 발령을 내고, 컴퓨터 교육과 논문 제출 등을 시켰다. ‘나이 든’ 노동자들은 하나둘 회사를 떠나고, 한 노동자의 어머니와 장애인 여동생이 음독자살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차 지회장은 파업에 합류해 영도 공장 김주익 지회장과 2주일 정도 조합 사무실에서 함께 숙식했다. 6월 10일 저녁, 김 지회장이 차 지회장에게 “오랜만에 집에 좀 다녀오세요. 저도 다녀오려 해요” 했다. 차 지회장은 별 생각 없이 받아들였다. 김 지회장과 같은 부서에서 조립과 도장 일을 한 노동자 김갑열(44)씨는 그날 저녁 김 지회장에게 여러 차례 전화를 했다. 함께 백숙을 끓여 먹기로 한 날이었는데, 김 지회장이 오지 않았다. 김 지회장은 “곧 간다”는 말만 하고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마지막 통화에선 “안 가면 안 간다고 알면 되는 거지, 왜 자꾸 전화하느냐”고 버럭 화를 냈다. 10년 넘게 그를 알았지만, 한 번도 화를 내지 않던 사람이었다. 그날은 장대비가 끊이지 않았다.

 

다음날에야 김 지회장이 비를 맞으며 35m 높이의 85호 크레인으로 올라간 사실을 알게 됐다. 차 지회장은 통근버스에서 내리자마자 85호 크레인 밑으로 질주했다. 그렇게 700여 명의 노동자들이 85호 크레인 아래로 모여들었다.

 

사 쪽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언론도 주목하지 않았다. 사 쪽은 되레 85호 크레인 아래 있는 노동자들에게 “파업 대오에서 떠나면 일하지 않아도 70%의 임금을 주겠다”고 설득했다. 회사의 강경 대응과 세상의 무관심에 노동자들은 하나둘 떠나기 시작해 석 달 만에 200여 명으로 줄었다. 늘 파업 대오에 앞장섰고, 노조에서 대의원과 문화체육부장 등을 지내며 누구보다 김 지회장과 오랜 인연을 쌓아온 곽재규씨도 말 없이 70%의 임금을 받고 다른 일감을 찾아나섰다. 곽씨는 외딸인 아내를 대신해 병든 장모를 부양해야 하는 처지였다. 오랜 파업으로 생계비가 끊긴 그에겐 당장 돈벌이가 필요했다. 일용직으로 건설 현장에 뛰어들었다.

 

7월 22일 부산지방노동청장이 중재에 나서, 노사는 잠정 합의를 앞두고 있었다. 임금을 일정 정도 올리고, 민·형사상 손배 가압류를 철회하는 내용이었다. 정리해고자 복직 문제가 남았지만, 노조원들은 크레인 위의 김 지회장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파업 대오는 흔들렸고, 김 지회장도 망설였다. 하지만 사장 선에서 작성되던 합의서가 이튿날 조남호 회장 등 상부 경영진에 의해 휴지 조각이 됐다. 마지막 희망이 사라졌고, 김 지회장은 더욱 고립돼갔다.

 

10월 17일 아침, 갑열씨는 예정보다 석 달이나 이른 9월 27일 태어난 아이를 오랜만에 보고 있었다. 아이는 병원 인큐베이터 안에 있었다. 김 지회장은 갑열씨의 아내가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을 듣고, 크레인 위에서도 “너거 아 유모차는 내가 꼭 사줄게”라며 축화 화환을 보냈다. 갑열씨는 그 기억을 더듬으며 다시 통근버스를 타고 회사로 돌아왔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매일 오전 8시면 저 높은 곳에서 아래에 있는 노조원들과 인사를 나누던 김 지회장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았다. 전화도 받지 않았다. 간부 3명이 급히 크레인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잠시 뒤 전화기 너머에서 울음 섞인 소리가 들려왔다. “김주익 지회장이 목을 매 자살했다.”

 

김 지회장이 파업 전 마지막 받은 2002년 12월 임금 지급명세서를 보면, 총소득이 기본급 105만1396원에 각종 수당을 합쳐 165만1691원이었다. 하지만 각종 세금과 보험료가 19만3538원, 노조비 2만3249원, 회사의 가압류 금액 73만 원, 5300만 원짜리 연립주택을 마련하면서 빌린 대출금 원금과 이자 20만7천 원, 생활비 마련을 위해 빌린 1천만 원의 신용복지기금 공제액 36만2824원 등 모두 151만661원이 공제돼 실수령액은 13만5080원에 불과했다.[각주:1]

 

# 2003년 10월 30일

 

크레인 아래 노동자들이 다시 모였다. 200명도 채 남지 않은 조합원들이 금세 1천 명 가깝게 다시 불었다. 언론도 뒤늦게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그 800여 명의 파업 대오 복귀자에 합류하고도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다. 곽재규씨였다. 그는 김 지회장 옆에 서 있지 못했던 자신을 자책하며 우울증에서 벗어나지 못해, 매일 술을 들이켰다. 10월 27일, 밤늦게 술에 잔뜩 취한 채 차해도 지회장을 찾아왔다. 그는 무릎을 꿇은 채 “미안하다”며 엉엉 울었다. 차 지회장은 “할 수 없잖아요. 형님도 사정이 있었잖아요. 우리가 싸우면 되잖아요”라며 달랬다. 하지만 10월 30일, 곽씨는 4도크에 몸을 던져 숨진 채 발견됐다.

 

# 또 다른 2003년 10월 17일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 투쟁위원회 대표 박성호(50)씨는 이날 속초에 있었다. 그는 1991년 5월 6일 발생한 한진중공업 박창수(당시 31살) 노조위원장 의문사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김대중 정부 시절 제1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이하 의문사위)에 들어갔다가, 제2기 의문사위가 활동 중이던 이날 다른 의문사 사건을 조사하고 있었다. 그러다 그는 동료에게서 “주익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차를 돌려 부산 영도로 향했다. 그리고 곧 의문사위에 사표를 냈다. 파업 대오에 합류하기 위해서였다. 의문사위는 만류했지만, 박 대표는 “친구가 죽었으니 데모를 해야 하는데, 국가공무원 신분이면 의문사위에 문제가 생기지 않느냐”며 공무원증을 반납했다. 그렇게 두 죽음이 박 대표를 사이에 두고 포개졌다.

 

1991년 5월 7일 백골단이 콘크리트 벽을 뚫고 안양병원 영안실에 난입하자, 고 박창수 한진중공업 위원장의 유족들이 격렬히 제지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



# 1991년 5월 6일

 

1991년 2월 9일. 박창수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과 노조 간부 박성호(당시 29살), 김주익(당시 28살)은 경기도 의정부 다락원 캠프에 있었다. 다락원에선 현대중공업, 대우조선, 대우자동차, 금호타이어, 한진중공업 등 16개 대기업 노조위원장이 모여 만든 대기업 연대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당시 대우조선 노조 백순환 위원장과 조합원 50명은 단체협약이 타결되지 않자 104m 높이의 대형 골리앗 크레인에 올라가 고공 농성을 벌이고 있었다. 대기업 연대회의에선 투쟁을 지지하는 성명서를 제작해 배포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이튿날 귀가하던 69명이 모두 연행됐다. 박창수 위원장 등 7명은 ‘3자 개입’ 혐의로 구속됐다.

 

1990년 1월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이 이뤄지면서 거대 여당의 지지를 등에 업은 노태우 전 대통령은 그해 10월 13일 특별 선언으로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조직폭력배 등을 잡아들이겠다는 조처였지만, 공안 정국을 조성하려는 노림수도 컸다. 1991년 4월 26일 명지대 앞에서 학원자주화 투쟁에 참여했던 학생 강경대가 ‘백골단’ 소속 사복 경찰에게 붙잡혀 쇠 파이프로 심하게 폭행당해 숨지자, 이에 항의하는 학생들의 분신이 이어졌다. 안기부(현 국정원)는 대기업 연대회의와 민주노총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와해 공작을 줄기차게 퍼붓고 있었다.

 

5월 4일 오전 10시쯤, 박창수 위원장은 서울구치소에서 운동 시간이 끝날 무렵 갑자기 줄에서 빠져나와 건물 벽 모서리에 세차게 머리를 들이받았다. 의식을 잃고 쓰러진 그는 곧 안양병원으로 후송됐다. 왜 이런 자해를 했을까. 그는 구치소 시절 면회 온 가족과 노조 동료들 앞에서 끊임없이 가족 걱정을 했다. 구치소 같은 방에 들어온 조직폭력배에게서 “전노협을 탈퇴하지 않으면 마누라를 납치하겠다”는 협박도 받았다고 한다.

 

안양병원에 입원한 그의 곁을 아내가 지키고 있었다. 박 위원장이 아내를 지키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입원 하루 만에 교도관에게서 “큰 상처가 아니면 구치소 내 의무실로 가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어떻게든 병원에 남을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고 했다. 평소 줄기차게 “전노협을 탈퇴하라”고 요구해온 한진중공업 담당 안기부 직원 홍아무개씨를 통해 그 방법을 타진했다. 하지만 5월 6일 새벽 4시 45분쯤, 박 위원장은 안양병원 마당에 쓰러져 숨진 채 발견됐다.

 

의문사였다. 7층에서 떨어졌는데, 당연히 먼저 떨어졌을 머리는 구치소에서 다친 데 외에 멀쩡했고, 발목만 부러져 있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박성호 대표는 “내장이 다 파괴됐는데 외상은 별로 없었다”며 “추락했는데 외상이 거의 없는 경우는 이미 죽은 상태에서 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현장에선 주검을 둘러싸고 경찰과 유가족들의 승강이가 벌어졌다.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과 국회의원 이상수·노무현 등이 현장으로 달려왔다. 결국 영안실에 주검을 안치하고, 부검은 양쪽 동의 아래 실시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5월 7일 새벽 5시 경찰 1천여 명은 영안실 옆쪽 벽을 뚫고 박 위원장의 주검을 탈취했다. 검찰은 부검 결과 “노동운동에 회의를 느껴 옥상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2004년 6월 30일 의문사위는 오랜 조사 끝에 박 위원장 의문사 사건은 △사망 현장에 함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동행인의 신원 미확인 △안기부 관련 자료 요청에 대한 비협조 등으로 진상 규명이 불가능하다고 발표했다. 그렇게 한진중공업 노조는 처음으로 노조위원장을 죽음으로 잃었다. “조사단에 참여해 당시 병원 간호사들도 만나고 했지만, 10년 넘게 지난 기억을 상기하는 것을 굉장히 힘겨워하더군요. 조사팀이 사건 관련인들만 600여 명 조사했죠. 안기부 직원 홍씨는 끝까지 ‘박 위원장과 직접 통화한 적이 없고, 현장에도 없었다’고 주장했고요. 증명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홍씨가 나중에 리베이트를 먹고 비리 사건으로 구속되더군요.” 박성호 대표의 말이다.

 

# 1987년 7월 25일

 

1987년, 당시 한진중공업의 이름은 대한조선공사였다. 한진중공업은 1989년 대한조선공사를 인수했다. 대한조선공사는 1937년 7월 부산 영도에 세운 조선중공업을 모태로 하는 한국 최초의 조선소였다.

 

하지만 노동조건은 열악했다. 1981년 박창수와 함께 ‘한국 최초의 여성 용접공’으로 대한조선공사에 입사한 김진숙은 1986년 노조 대의원에 당선된 뒤 어용 노조를 폭로하는 유인물을 배포해 해고됐다. 그리고 그해 김진숙의 ‘출근 투쟁’을 보면서 김주익과 박성호가 대한조선공사에 입사했다.

 

회사에는 식당 건물도 없었다. “쥐들이 우글거리는 현장에서 새까만 꽁보리밥을 냄새 나는 공업용수에 말아서 후루룩 삼키는”[각주:2] 것이 식사였다. 1987년 1월 ‘도시락 거부 투쟁’이 일어났고, 곧이어 일어난 어용노조의 상조비 횡령사건으로 노동자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그리고 7월 25일 ‘어용노조 몰아내고 민주노조 건설하자’, ‘배고파서 못살겠다 임금인상 시켜주라’, ‘노동조합 위원장을 우리 손으로 선출하자’라고 요구하며 대투쟁에 들어갔다. 노동자들의 요구사항을 회사가 전면 수용했다.

 

나이 든 노동자들은 막걸리병을 든 채 불콰해진 얼굴로 “와 이리 좋노, 와 이리 좋노” 덩실덩실 춤을 추며 얼굴에서 굵은 눈물을 줄줄 흘렸다. 32살의 곽재규, 27살의 김진숙과 박창수, 25살의 박성호, 24살의 김주익도 막걸리병을 들고 함께 어우러져 춤을 췄다. 그렇게 춤을 췄다.


*이 글은 차해도 금속노조 한진중공업 지회장, 박성호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 투쟁위원회 대표, 한진중공업 노동자 김갑열씨, 한울 회계법인 송덕용 회계사와의 대면 인터뷰,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부 지도위원과의 전화 인터뷰를 토대로 재구성했다.

*이 글을 쓰고 얼마 지나지 않은 2012년 12월 21일 한진중공업 최강서 조직부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첫 번째 사진 왼쪽에 찍힌 사람이 취재중 우연히 찍힌 고 최강서 조직부장이다. 

*<나-들> 2012년 12월호에 실렸음

*사진 박승화 기자


*관련 글 : 끝내 내려오지 못한 동생...형은 오늘도 산다



  1. <한겨레> 2003년 10월 23일치 [본문으로]
  2. 김진숙 <소금꽃나무> 54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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