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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안이 바짝 말라 있는지, 말을 하기 위해 입술을 오무락거릴 때마다 윗입술이 자꾸만 윗니에 달라붙었다. 입을 축이라고 물을 건넸더니, 팔에 힘이 없는지 덜덜 떨다가 절반은 흘려버렸다. 볼은 움푹 패어 있었고, 화통하던 음성은 병상 옆에 바짝 붙어 앉은 사람의 귀에 겨우 소리를 닿게 할 정도로 얇아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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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이 써요. 어제 후배가 순두부를 먹으라고 가져다줬는데, 한 숟갈 먹고 모두 버렸어요. 사과나 귤은 또 지나치게 달아요. 당분을 과잉되게 느끼는 거지. 그런데 희한하게 잘 먹는 음식은 ‘불량식품’이에요. 라면, 자장면. 오늘 저녁도 그래서 자장면을 시켜 먹자고 했어요, 아내에게. 병원에서도 그렇게 하래요. 하하.”

이성규 감독이 영화 <오래된 인력거>의 주인공인 인력거꾼 샬림과 모하메드를 태우고 인력거를 끌고 있다. 출처:이성규 감독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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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 강원도 춘천시 강원대병원 호스피스 병동. 다큐멘터리 영화 <오래된 인력거>와 극영화 <시바, 인생을 던져>를 연출한 이성규(50) 감독은 병상에 누워 그렇게 말을 건넸다. 그는 지난 5월 <시바, 인생을 던져> 후반 편집 작업을 하던 중 간암 말기 판정을 받고 투병하다, 지난달 말 호스피스 병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미 죽음이라는 엄중한 현실을 받아들인 뒤 내린 결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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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기는 걸 결정하고 아내와 끌어안은 채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 울음을 털었다. 울어서 달라질 건 없다. 일상처럼 웃었다. 이제 우리 가족의 일상에 나의 죽음이 들어왔다”고 썼다. “죽음은 나를 존엄하게 한다. 죽음은 존엄의 동반자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삶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이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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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페이스북에 간간이 올라오는 죽음에 대한 그의 사유는 역설적으로, 삶과 꿈과 행복에 대해 여전히 남아있는 그의 간절한 욕망을 텍스트로 재현하는 것이기도 했다.

“제일 힘든 게 무엇이냐고 물으면, ‘잊혀진다는 것’이에요. 하지만 나는 특혜를 받았죠. 다큐멘터리가 있고, 그것으로 주변에 기억될 수 있고, 잊혀지지 않을 수 있으니까. 그게 행복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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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기간 가장 하고픈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그는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마지막으로 인도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에게 인도는 “애증의 공간”이다. 캘커타의 인력거꾼 샬림과 마노즈의 삶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꼬박 10년이란 세월을 그들과 함께 살았다. 그들이 맨발로 인력거를 끌면 이 감독은 카메라를 들고 그들 앞뒤에 서서 함께 달렸고, 그들이 폭우를 맞으면 그도 카메라를 얼싸안고 폭우와 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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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는 그들의 삶에 개입하지 않았다. 관찰자의 자리에 서서 묵묵히 현실을 기록했다. 그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담지 않고 스펙타클화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오래된 인력거>의 처음과 끝을, “더 이상 나를 촬영하지 마세요. 카메라를 치우세요. 내 인생에서 나가주세요”라고 울부짖는 샬림을 달래는 자신의 모습으로 시작하고 맺었다. 연출과 편집 그 자체가 바로 현실이고, 샬림을 설득하고 껴안는 이성규 자신도 바로 그 현실의 일부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오리엔탈리즘이나 판타지에 젖어 인도를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을 온몸으로 거부한다. <시바, 인생을 던져> 역시 그런 메시지를 담은 극영화다.


지난 11일 지인들이 마련한 영화 <시바, 인생을 던져> ‘단 한사람만 모르는 특별한 상영회’에서 이성규 감독이 관객들과 함께 영화를 보고 있다. 출처:이성규 감독 페이스북

 

“샬림이 집을 지었대요. 그걸 아직 못 봤어요. 그래서 인도에 가고 싶어요. 인도는 저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곳이니까요.”

샬림은 뜨거운 캘커타 거리를 인력거를 끌고 맨발로 뛰어다녔다. 15년 동안 한 푼 두 푼 모은 돈으로 삼륜차 택시를 사려는 꿈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아내가 심각한 우울증에 걸리고, 큰아들이 신종플루를 치료하기 위해 가방 공장 사장에게 빚을 지면서, 15년 동안 모아둔 돈을 손에서 모래를 흘리듯 흩어버리고 말았다. 그런 샬림이 집을 짓고, 방 한 칸에 이 감독 딸의 이름을 명명했다니, 가보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말이었다.

“인도는 제가 다큐멘터리 감독으로서의 이름을 얻었고, 제 아내를 만났고, 제 파괴의 씨앗을 얻은 곳입니다. B형 간염이 거기서 옮았거든요. 그래서 인도가 내겐 각별하기도 하고, 애증의 공간일 수밖에 없죠. 가끔 그 파괴의 씨앗을 안 얻었다면 좋았을 텐데, 생각하지만 그래서 어떡하겠습니까. 인정해야지. 욕한다고 달라질 게 없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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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간은 피할 수 있을 만큼 죽음을 피하려 한다. 하지만 그 도피의 끝은, 죽음이 또한 모든 인간이 결코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것에서 멎고 만다. 남보다 훨씬 일찍 다가온 그 현실 앞에서, 이성규 감독이 마지막으로 남긴 걱정은 다큐멘터리와 독립영화 세계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그가 속해 평생을 바쳤던 공동체에 대한 책무감을 버리지 못했다. 그는 공동체에 남긴 삶의 궤적과 타자를 통해 삶의 연속성을 이어가려는 의지로 버티고 또 버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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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방송국 비정규직 문제에 항의하기 위해 방송국 송신탑 위에라도 올라갈까, 라고 후배들에게 말했어요. 조금 과장을 섞은 것이긴 하지만요. 후배들이 만류하더라고요. 한 가지 정말 아쉬운 것은, KBS에 가서 책상을 뒤엎으면서 ‘이런 것 좀 해놓으라’고 말할 수 있는, 기획재정부에 가고 국회의원을 찾아가서 ‘이런 것 좀 할 수 없느냐’고 지적할 수 있는 후배를 더 키우지 못하고 이렇게 간다는 겁니다. 몇 달의 시간만 더 있으면, 쓰는 책도 정리가 될 것이고, 편집하고 있는 다큐멘터리도 마무리가 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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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감독은, 그런 마지막 희망과 의지를 끝내 모두 이루거나 떨쳐내지 못하고, 13일 오전 2시께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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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락된 시간이 그런대로 충분한 줄 알았어요. 그러나 아니네요. 내가 살아갈 하루의 숫자가 줄어든 기분. 아직은 훌쩍훌쩍 울곤 합니다만, 임종이란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죽음이 두려운 건,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죽음의 과정일 겁니다. 죽음의 과정이 내게 축제일 수 있게 도와주세요. 나는 축제 현장에서 놀고 있어요. 재미나게 놀고 싶어요. 그리고 ‘안녕’이라 님들에게 인사하고 싶어요.” -이 감독이 페이스북에 남긴 마지막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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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레쿠시 토리검(조금은 행복하게, 조금은 슬프게).’ 이성규라는 하나의 우주는 그렇게 명멸했다.



*<한겨레> 온라인판에 실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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