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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내용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최근 몇 년 사이 한국 사회에는 주제 의식이 선명한 영화가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언로가 막혀있다 여겨지는 사회에서 영화는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고발을 공유하는 중요한 매개가 됐다. <도가니>(2011), <부러진 화살>(2011), <두 개의 문>(2011), <남영동 1985>(2012), <26년>(2012) 등이 성공과 실패를 거쳤고, 천만 관객을 동원한 <변호인>(2013)에 이르러 사회 고발 영화의 대중 동원력은 정점을 찍었다. 부조리한 사건의 전말을 파헤치는 고발극이나 다큐멘터리에서 시작해 부조리에 분노하고 각성해 정의의 화신으로 거듭나는 한 인간의 성장 서사(변호인)까지 사회 고발 영화의 화법이 진화했다. 한국의 사회 고발 영화는 사건을 파헤치게 만들거나 인간을 분노케하는 선명한 적대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대체로 연기력이 출중한 악역들이 등장해 거악의 상징적 존재로 화하고 적대를 유발한다. 적대의 반대 지점에는 숭고한 개인이 배치된다. 관객들은 영화를 보기 전에 이미 영화의 사회적 성격과 결론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기꺼이 시간과 돈을 투입해 영화를 보고, 감상을 공유하고, 주변에 영화 보기를 권유하거나 때론 강제한다. 그들은 거악과 맞서 시련을 대신 겪어주는 숭고한 개인을 경배하고 그런 개인의 존재에 안도한다.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도 얼핏 보면 한국의 <변호인>과 비슷한 플롯으로 보일 수 있다. 론 우드루프(매튜 맥커너히)라는 캐릭터의 성장 서사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론은 방탕한 생활을 하며 술과 마약, 섹스를 즐기는 달라스 카우보이 마초 백인 남성이다. HIV 감염으로 숨진 배우이자 게이인 록 허드슨을 경멸하면서 친구들과 낄낄대는 전기 기술 노동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전기 감전 사고로 실려 간 병원에서 자신도 HIV에 감염돼 목숨이 30일 밖에 남지 않았다는 얘기를 듣는다. 론은 이후 죽음과 타협하지 않고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죽음과 적극적으로 투쟁한다. 평생 한 번도 드나들지 않았을 것 같은 도서관을 찾아 HIV에 대해 공부하고, 임상 단계에 있는 HIV 치료약 AZT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낸다. 더 이상 AZT를 구할 수 없게 되자 멕시코까지 찾아가 치료약 펩타이드T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이 약을 공유하기 위해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이라는 일종의 조합을 만든다. 마침내 조합을 믿고 찾아온 이들을 위해 자신의 자동차까지 팔아 펩타이드T를 챙겨주는 정의로운 리더로 진화한다. 이 과정에서 경멸의 대상이던 게이 레이언(자레드 레토)과 연대하면서 서서히 게이 역시 자신과 똑같은 삶을 살고 있는 또 하나의 존재일 뿐임을 인정하게 된다. 이보다 더 탁월한 성장 서사가 있을까 싶다.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 스틸컷


 

하지만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은 직설적인 한국의 사회 고발 영화들과 달리 애매모호함 투성이 영화이기도 하다. 애매모호함은 먼저 끝끝내 숭고한 영웅과는 거리를 두는 론의 양가적 캐릭터에서 읽을 수 있다. 론은 정의로움으로 똘똘 뭉친 존재가 아니다. 그가 멕시코에서 구해 홀로 충분히 복용할 수 있었던 펩타이드T를 무리하면서까지 밀수하고, 이를 널리 공유하기 위해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을 만든 이유는 사실 돈벌이가 되기 때문이다. 레이언과의 연대 역시 레이언을 매개로 해 게이 커뮤니티의 HIV 감염자들에게 펩타이드T를 팔 수 있다는 사실로 인해 가능했다. 임상 단계인 AZT를 얻기 위해 론은 부당거래도 서슴지 않는다. 론은 오로지 실존을 위해 치료약을 발견하고, 조합을 만들고, 조합과 펩타이드T 투여의 합법성을 획득하려고 노력했다. 그 행위에 어떤 숭고한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런 면모를 가장 잘 살펴볼 수 있는 장면이 샌프란시스코 법원에서 펩타이드T 합법 사용을 인정받기 위해 제기한 소송에서 패소하고 돌아온 론에게 박수갈채를 치는 클럽 회원들의 모습과 대비되는 론의 얼굴이다. 론을 맞이하고 존경을 담은 얼굴로 박수를 치는 클럽 회원들과 달리 정작 그들을 바라보는 론의 얼굴에는 의아함이 묻어난다. 론은 시련과 장해를 극복하면서 그 과정을 통해 성장하는 인간이기도 하지만, 방탕함과 속물성을 그대로 간직한 우리 주변의 흔한 인간이기도 하다. 그런 양가성을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은 숨기지 않았다. 어떤 지점에서 성장을 하든 말든, 또 다른 지점의 인간은 변치 않은 채 그대로일 수 있다.

 

두 번째로는 론과 맞서 싸우는 거악의 존재가 선명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이 "미국 식품의약국(FDA)과 다국적 제약회사 그리고 의료기관들의 부적절한 유착관계를 고발한다"거나 "의료민영화로 사회적 갈등이 증폭되고 있는 시점에서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말하면서 결국 '규제는 암 덩어리'라고 말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비판까지 나아간 한 리뷰('정부가 승인해준 약, 이제는 못 믿을 것 같다', 오마이뉴스, 최한욱)도 있었지만, 나는 영화가 어디에서 ‘부적절한 유착관계’를 뚜렷하게 폭로했는지 찾을 수 없었다. FDA나 제약 회사, 의료 기관은 엄밀히 따졌을 때 단지 그들의 일을 했다. FDA는 사실 임상 실험도 채 되지 않고 과학적 검증 체계를 거치지 않은 치료약의 밀수나 불법 사용을 인정할 수 없도록 만들어진 제도 기관이다. 의료 기관 역시 검증되지 않은 약물을 무작정 환자들에게 투여하거나 처방할 수 없고, 약효의 검증과 부작용의 확인을 위해 하는 임상 실험도 비정하다고만 말할 수 없다. 제약 회사 역시 그저 약을 팔려고 할 뿐이다. 물론 미국 외의 여러 나라에서 이미 의학적 근거를 가지고 HIV 치료약으로 사용되던 약물들을 적극적으로 검증하지 않은 FDA의 관료주의적 태도, 백혈구를 죽여 감염 위험성을 더 높이는 AZT의 부작용을 제대로 따져보지도 않고 덜컥 제약 회사의 임상 실험을 받아들인 의료기관의 나태함, 부작용 투성이인 AZT를 유일한 HIV 치료약으로 승인받아 막대한 수익을 얻기만 바라고 있는 제약 회사의 비도덕성은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영화는 굳이 이들이 이익을 위해 담합하거나 유착하는 식으로 거악화하는 모습을 적극적으로 재현하지 않았다.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이 초점을 둔 곳은 어떤 모순에 대한 폭로나 고발이라기보다 개별적 실존을 위해 투쟁하다가 어느덧 자신도 모르게 윤리적 주체성과 마주한 한 개인의 내러티브였다.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 스틸컷


 

한국의 사회 고발성 영화들은 모순된 권력에 대해 공격성을 드러내는 폭로 그 자체가 주된 목적인 경우가 많다. 적대의 당사자를 끊임없이 공격하거나 폭로하면서 영화를 소비한 사람들에게 함께 그 적대를 향해 분노할 것을 요구한다. 모순된 권력에 대한 폭로는 사람들의 즉자적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데 효율적이다. 그러나 영화와 함께 증폭됐던 분노는 영화관을 나서는 순간 현실로부터 유리되는 경우가 많다. 사람들의 ‘요구받은 분노’ 안에는 적당한 자기 방어 기제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별다른 비용 투입 없이 분노의 편에 서 있다. 어떤 문제와 마주하면 그 문제가 나에게 왜 문제가 되는지 생각하지 않고 기계적으로 분노한다. 자신이 본 사실만을 진실이라 일컫고, 자신이 파악하고 있는 사실이 문제의 본질이라고 믿는다. 냉소 역시 마찬가지다. 애초 사람들의 냉소는 어떤 열정의 소진에서 오는 탈진적 현상에서 기인했다. 하지만 이제는 자신이 속해 있다고 생각하는 공간에서 다수의 편에 서기 위한 안전장치와 같이 냉소를 꺼낸다. 이렇게 즉자적 분노와 냉소를 통해 다수의 편에 서는 것은, 다니는 학교나 직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에 대해 정치적 주체로 나서지 못하고 침묵할 수밖에 없는 자신에 대한 죄책감을 희석시켜주는 방어막이자 안전장치다.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 스틸컷


 

구조의 모순을 사회화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대개 모순의 폭로 구도는 사안을 기계적 선악 구도로 단순화하는 경우가 많다. 거악이 존재하지 않으면 이들에게 정치란 부재하거나 불필요한 것이 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딱 잘라 선악을 판단할 수 있을 정도로 허술하지 않고, 정치는 거악과 맞서 싸울 때보다 새로운 일상을 건설할 때 필요성이 더 커진다. 새로운 일상의 건설에는 제도의 빈 공간과 사회의 모순 사이를 오가며 모순된 사회에 균열을 내는 것으로 공적인 윤리성을 구성해가는 주체가 필요하다. 이런 주체의 내러티브에 주목하는 영화는 사람들에게 영화 속 주체에 자신을 대입해 만약 자신이 그런 상황에 처했을 때 어떤 선택을 내렸을까에 대해 고민하게 만든다. 그리고 고민은 개별적 윤리 구축을 위한 끊임없는 성찰의 도구가 된다.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이 의료 제도의 부조리에 순응하지 않는 적극적 주체로 론을 그려낸 것은, 자유로움 속에서 함께 공존할 공동체를 구성해가는 주체의 모습을 충실히 재현하는 것만으로도 사회적 모순을 붕괴시키자는 정치적 테제를 자연스레 도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당위에 의해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객체와 대비되는 성찰하는 주체는 그렇게 구성되는 것 아닐까. 정치적 확장성도 그렇게 확보될 수 있을 것이다.


*미디어스에 실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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