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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무력감이었다. 사람들은 가라앉는 세월호와 그 안에서 숨져간 이들을 보며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과 한국 사회를 바라보며 깊은 무력감을 느꼈다. 그 무력감이 어떤 이에겐 격분과 공격성으로, 어떤 이에겐 슬픔과 우울로, 어떤 이에겐 미안함으로 표출됐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저 감정들 사이를 오가는 사람도 있었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태연한 척하다 어느 순간 터져버린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기도 했다. 세월호 안에서 숨져간 이들의 심상에 자신을 대입하면서 느끼는 공포를 유언비어에 담아 빠르게 확산하는 이들도 있었다. 유언비어 유포는 내가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사회가 어떤 식으로 반응하는지 확인하고 공감을 얻은 뒤 재빨리 안도하기 위한 자기 위안적 행위였다.

총체적인 시스템의 몰락

어떤 감정이든 그것이 무력감으로 환원된 까닭은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기능하지 않은 시스템의 총체적 몰락 때문이었다. 우선 길이만 146m에 달하는 6825t급 여객선을 운항하는 전체 승무원 29명 가운데 15명이 6개월~1년 단위 계약직이었다. 핵심 위치인 갑판부와 기관부 선원 17명 가운데 12명이 비정규직이었다. 사고가 난 세월호와 위기에 처한 승객들을 내팽개치고 도망간 선장 이준석(69)씨도 월급 270만원을 받는 1년짜리 계약직이었다. 심지어 출항 당일 구두계약을 통해 승무원이 된 사람도 있었다.

비상 상황에 쓰일 구명벌(침몰시 자동 팽창되는 탈출 기구)과 구명정이 설치돼 있었지만, 구명벌은 46척 가운데 단 2척만 쓰였다. 승객들은 아무도 구명벌과 구명정에 대해 안내받지 못했다. 승무원들은 평소 안전훈련을 제대로 받지 않았다. 생각할 겨를조차 없는 위기 상황에서 안전을 위한 움직임은 임기응변이나 순간적 기지가 아니다. 그것은 몸에 각인된 기억이다. 기억은 매뉴얼과 그 매뉴얼에 대한 반복적인 연습에서 나온다. 세월호 승무원들에겐 각인할 조건이 주어지지 않았다. 불안정한 신분 탓에 승무원들 몸에는 승객들의 안전을 책임질 책무감이 새겨지지 않았고, 안전 시스템에 대한 무관심은 그들을 각자도생의 본능에만 충실하게 만들었다.

사고 발생 직후 승객을 탈출시켜야 할 가장 중요한 시간에 선장은 스스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청해진해운 쪽에 보고를 하느라 소중한 탈출 시간을 허비했다. 선장에겐 위기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극단적인 결정을 내릴 자율성이 없었다. 청해진해운은 회사 과실로 사고가 난 사실이 드러나면 선체보상금이 감액되기 때문에 퇴선 명령을 주저했다.

비용을 걱정하며 시스템을 총동원하지 않은 것은 청해진해운만이 아니었다. 정부는 세월호 실종자 구조 업무를 언딘마린인더스트리(이하 언딘)라는 민간업체에 맡겼다. 첫 주검 수습 과정도 언딘이 주도했고, 기존의 선내 수색 작업을 지원했던 ‘2003 금호 바지선’을 ‘리베로 바지선’으로 교체하면서 실종자 수색이나 주검 수습에 귀중한 조금기(조류가 느려지는 시기)를 허비한 것도 리베로 바지선이 언딘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정부와 새누리당은 2012년 수난구호법을 개정하면서 예산 절감을 이유로 수난 구조를 외주화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수난 구조는 공공이 맡아야 한다”는 목소리는 당시 민주당 안에서도 크지 않았다. 새누리당에선 “국가가 전부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러면 우리나라는 해경국가가 된다”는 얘기도 나왔다. 국가는 효율성이 떨어지는 기구를 더 이상 공공의 영역에 두려고 하지 않았다. 수난 구조는 그렇게 민영화했다.

참사에 대응하는 정부 시스템도 붕괴했다. 사고 초기 실종자 수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오락가락했다. 일관된 체계를 가지고 상황을 책임감 있게 통제하려는 의지를 가진 관료는 아무도 없었다. 단지 응급구조대를 치우고 그 자리에서 라면을 먹은 교육부 장관, 사망자 명단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으려 한 안전행정부 국장, 상황 통제보다 대통령에게 해가 될 것을 먼저 우려하느라 거리로 나선 실종자 가족들을 막아섰다가 차 안으로 숨어 들어간 국무총리만이 격분과 냉소의 대상이 됐다.

박근혜 대통령은 사고 이튿날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데 대해 철저한 조사와 원인 규명을 해서, 책임질 사람은 모두 엄벌토록 할 것”이라고 말하며 사고에 대한 모든 책임을 타자화했다. “저뿐 아니라 국민들께서 경악과 분노로 가슴에 멍울이 지고 있다”며 스스로 책임자에서 피해자의 지위로 자리를 바꿨다. “최종 책임자는 자신의 책임을 말하는 대신 ‘책임질 사람에 대한 색출 의지’를 과시하는 단죄자의 자리를 자연스럽게 차지했다. 침몰하는 시스템에서, 대통령은 그렇게 가장 먼저 ‘탈출’했다”[각주:1]는 평가가 나왔다.

격분과 희생양 찾기의 폭력과 배제

사람들의 지배적 반응은 격분이었다. 탈출한 선장과 선원들이 그 와중에 태연하게 곰탕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며 비난했고, 언론과 삐딱하게 인터뷰하는 선원의 반응이 건방지다고 공격했다. 관료들의 무심함을 성토했고, 책임을 전가하는 대통령을 비하하며 하야까지 요구하고 나섰다. 실종자들을 구해내지 못하는 해경과 잠수부들을 강하게 압박했고, 마음에 들지 않는 기사를 쓰는 언론인의 신상을 캐고 글을 위조했다. 신중함을 담은 의견들은 격분 속에 묻혔다. 모두가 이 무기력한 사회, 무능력한 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 존재하는 것을 견딜 수 없다는 듯 각자 책임의 무게를 탄환에 실어 공격할 대상을 찾아 조준하고 무자비하게 사격했다. 어떤 대화도, 어떤 논의도 불가능했다. 미디어로 재현되지 않는 현장의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은 고려되지 않았다. 표현할 수 없는 고통, 공유할 수 없는 슬픔, 재현하기 힘든 상처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도 인정되지 않았다. 내면은 내면으로 존재하지 못했고, 표현되지 않은 내면은 존중받지 못했다.

한병철의 생각을 빌리자면, 격분과 분노는 다르다. “격분은 행동을 이끌어낼 수 없다는 점, 탈서사적이라는 점에서 분노와 다르다. 그것은 단지 순간순간의 감정 상태에 지나지 않는다. 깊은 사색을 할 수 없으므로 행동을 이끄는 분노의 감정 또한 그들은 느끼지 못한다. 생각을 할 틈이 없고 복잡할 필요가 없기에 감정적으로, 즉각적으로 대처한다.”

“격분의 물결 속에서는 공동체와의 동일시 정도도 매우 낮게 나타난다. 격분 속에서는 사회 전체에 대한 염려의 구조를 갖춘 안정적인 우리가 형성되지 않는다. 이른바 분개한 시민의 염려라는 것도 사회 전체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대체로 자신에 대한 염려일 뿐이다. 따라서 그러한 염려는 금세 모래알처럼 흩어져버린다.”[각주:2]

성찰과 만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는 분노와 달리 격분은 다분히 자기 위안적이다. 사람은 누구나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만나고 그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자신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다는 위협을 느끼면 분노한다. 중요한 것은 그다음 과정이다. 그 뒤에는 질문과 성찰이 따라야 한다. 이 위협이 나만이 아니라 내 주변, 더 나아가 사회를 향해 보편적으로 다가온 것인가. 그렇다면 이 위협에 맞서기 위해 나와 너는 함께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질문과 성찰의 과정이 바로 외부의 위협에 맞서는 사회적 연대다. 분노의 즉자적 표출인 격분에 공공성이 없는 까닭이다. 격분은 합리적 절차와 공공의 기구를 통한 문제 해결을 원하지 않는다.

격분이라는 지배적 반응은 어디에서 기인했을까. 격분의 파노라마는 다분히 탈정치와 비정치의 결과다. 이 탈정치와 비정치는 소비자로서의 정체성이 배태한 탈정치적 주체들에게서 사회화한 현상이다. 사람들은 이제 자신이 노동자로서의 정체성보다 소비자라는 정체성으로 존재하길 원한다. 불안정한 노동 지위와 온갖 ‘갑질’들 앞에서 노동자로 사는 것은 그 자체로 고통이다. 반면 소비자라는 정체성은 화폐를 매개로 마주한 노동자에게 마음껏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며 갑질을 할 수 있다.

소비사회는 자본을 매개로 소비의 대상과 직설적이고 즉자적으로 부딪힌다. 소비사회에서는 인간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물(物)과 물(物)의 관계만 존재할 뿐이다. 물과 물의 관계에서 인간의 감정은 소외된다. 감정의 소외는 조절 능력의 상실로 이어진다.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소비자로서 자신의 권리가 침해받았을 때 제도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 사람들에겐 스마트폰이 있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있고, 블로그가 있고, 커뮤니티가 있다. 자신이 입은 피해 사실을 이곳에 투명하게 공개하면서 대중의 즉자적 격분을 유도하고, 유도된 격분을 통해 자신에게 피해를 준 구체적인 대상을 단체로 공격함으로써 자신의 권리를 확인한다. 제도를 통한 문제 해결이 감정을 이성으로 변환하는 단계를 거칠 수 있었다면, 이제 그런 ‘번거로운’ 절차를 거칠 필요가 없어졌다. 격분은 자연스레 대중의 파토스를 활용해 확대되고, 아무런 검증 절차 없이 희생양을 찾아 마녀사냥을 할 수 있다. 그것뿐이다. 소비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질 수 있는 중간계급, 이들이 자신의 권리만 거듭 재확인하는 형태로 자기 위안에만 충실할 때 목소리를 낼 통로가 없이 배제된 자들은 중간계급과의 연대 고리를 찾지 못하고 더욱 배제된다.

격분하는 소비사회가 낳은 포즈의 ‘정치’와 파시즘

격분이 이끌어낼 수 있는 최선의 결과는 벌어진 문제에 대한 최고 책임자의 진정성 있는 퍼포먼스, 고개 숙이는 포즈다. 문제 해결 과정에 제도라는 매개는 사라지고 없기 때문에 격분은 시스템과 만날 수 없다. 시스템은 격분 앞에서 멈춘다. 게다가 소비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제품의 퀄리티보다 제품의 브랜드인 것처럼, 정치인 역시 그의 정치적 역량이나 정책, 이념적 지향이 아니라 이미지와 브랜드로 평가받는다. 정치적 역량이나 정책, 이념적 지향은 시스템을 구축하는 중요한 자원이다. 하지만 소비사회에서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시스템은 소비사회 앞에서도 멈춘다.

이런 논리를 세월호 사건에 대입해보면, ‘침몰하는 시스템에서 가장 먼저 탈출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비판적 격분 역시 시스템을 통한 문제 해결과 거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박 대통령을 비판하며 널리 거론된 두 가지 말은 그런 한계를 그대로 드러냈다. 하나는 “비가 오지 않아도, 비가 너무 많이 내려도 다 내 책임인 것 같았다. 9시 뉴스를 보고 있으면 어느 것 하나 대통령 책임 아닌 것이 없었다. 대통령은 그런 자리였다”라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말[각주:3], 다른 하나는 “내 책임이다. 내가 죽인 것이야! 이 조선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내 책임이다. 꽃이 지고 홍수가 나고 벼락이 떨어져도 내 책임이다. 그게 임금이다. 모든 책임을 지고 그 어떤 변명도 필요 없는 자리, 그게 바로 조선의 임금이라는 자리다”라는 드라마 속 세종대왕의 말[각주:4]이다.

이 두 가지 말이 박 대통령에 대한 비판으로 거론되고 있다는 점,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말이 세종대왕의 말과 연동되고 있다는 점은 징후적이다. 이 말들이 향하는 비판의 종착점은 결국 최고 권력자의 책임감 있는 사과와 진정성 있는 위무다. 그러나 사과의 수사와 위무의 퍼포먼스는 실제 피해 당사자들에게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건 단지 발을 동동 구르며 주변에서 관찰하는 이들의 자기 위안에 도움이 될 뿐이다.

게다가 이 말들은 한국 사회의 시스템에 대한 모든 불신을 총체적으로 짊어지고 해결할 수 있는 강력한 권력, 즉 영웅적 군왕에 대한 호명을 담고 있다. 격분을 바탕으로 희생양을 찾은 데 이어 그 반대급부로 영웅적 군왕을 찾으며 신속히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외치는 자리에는 시스템이 설 자리가 없다. 시스템을 구축하고 작동하기 위해서는 정치라는 과정을 거쳐야 하지만, 정치가 있어야 할 공간도 없다. 대신 국민으로부터 전능한 권력을 부여받아 관료·정치인 등과 같은 모든 중간자를 쫓아낼 국민의 인간, 위대한 지도자가 강력한 지위를 가지고 등장한다. 이럴 경우 시스템은 개인의 권능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더 이상 시스템으로서의 기능을 잃는다. 이런 영웅적 군왕에 대한 호명이 멈추지 않고 확산하면 유일한 구원자를 향한 외침, 파시즘이 등장할 수도 있다.

앙드레 고르는 “그는 아무도 원하지 않았던 과정(process)의 탄압들로부터, 아무도 책임지길 원하지 않는 시스템의 결과들로부터 그대를 해방시킨다. 그는 ‘역사’로 하여금 자신의 의지에 따라 만들고, 현실의 모호한 법들을 자신의 ‘결정’으로 대체할 것이다. 이제부터 모든 일이 그의 의지에 따라 일어날 것이다. 그러니 복종 속에서 우리의 인간성과 위대함을 되찾자. 이것이 파시즘의 담론”이라고 말했다. 고르는 “파시즘이 발전하는 데에는 대중과 관계를 맺고, 위엄 있는 동시에 서민적이고, 국가의 위대함을 책임지고 ‘초라한 인간들’의 개인성을 전능의 차원으로까지 끌어올릴 일을 떠맡은 지도자의 존재가 필수불가결하게 요구된다”고 지적했다.[각주:5]

그런데 파시즘 담론과 함께 주목해야 할 점은 파시즘을 실현했던 자신의 아버지처럼 강력한 지위와 권력을 재현해줄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민주주의 내부의 절차를 통해 선출된 박근혜 대통령의 현실이다. 역설적으로 박 대통령은 세월호 사건을 통해 자신은 그런 지위와 권력이 없음을 입증하고 있는 것 아닐까. 박 대통령은 세월호 사건에 대한 책임을 선장과 청해진해운, 즉 개인과 자본에 떠넘기려 하고 있지만,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것은 자본을 컨트롤하지 못하는 대통령의 모습이다.

박근혜라는 이름은 애초부터 그런 상징이었다. 그가 단 한 번이라도 현실정치에 깊숙이 개입해 시스템을 작동하려고 애써본 적이 있었던가. 그는 늘 현실정치 외부에 있었고, 현실정치를 진흙탕으로 매도하며 국민적 지지를 얻었다. ‘선거의 여왕’이라는 이름이 괜히 생긴 게 아니다. 박근혜가 충실했던 것은 단지 선거에서 국민적 지지를 받기 위해 행하는 퍼포먼스였을 뿐, 정치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박근혜를 악마화하고 있는 사람들이 기뻐할 일도 아니다. 우리는 그와 비슷한 사람을 제1야당의 공동대표로 앉혀두고 있다. 2014년 한국 사회에서 가장 지지율이 높은 정치인 2명이 가장 탈정치적이고 비정치적인 인물이라는 점은 한국 민주주의 정치의 아이러니다.

시스템은 왜 작동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왜 시스템은 작동하지 않았는가에 대해 살펴보자.

세월호 선장과 선원의 무책임한 선택에는 분명 위기 대응에 취약한 상태에서 각자도생의 본능에만 충실했던 개인의 무능과 판단 착오의 문제가 개입해 있었다. 하지만 개인의 선택은 그를 둘러싼 구조의 영향을 조합했을 때 온전한 형태의 행위로 구현할 수 있다. 앞에서도 서술했듯, 선장과 선원의 불안정한 신분이라는 정체성, 회사의 명령에 종속된 채 자율성을 박탈당했던 불완전한 주체성의 문제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그 문제의 근원에는 최소 비용으로 효율성을 극대화하려 했던 청해진해운 쪽의 관행이 있고, 그런 관행을 묵인하고 불안정한 노동 조건과 최소 비용의 효율성만 강조했던 국가의 방치가 있다.

2000년대 이후의 한국 사회에 국가는 없었다. 모든 것은 시장의 가치로 환원됐다. 국민의 안전마저 시장의 논리에 맡긴 대표적인 과정이 앞에서도 얘기한 2012년 수난구호법 개정과 수난 구조의 민영화다. 한지원은 이것이 바로 신자유주의 국가의 국민 안전이라고 지적한다. “1980년대 이후 지배 이데올로기인 신자유주의는 복지국가 모델을 비효율적이고, 낭비적인 것으로 규정했다. 국민 전체를 보호하는 사업이 아니라 비용 대비 편익이 큰 사업에 재정을 지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민의 안전도 시장의 가치로 계산되는 것이 이 시대의 논리라는 것이다.”[각주:6]

모든 것은 거래와 매매의 대상, 물과 물의 관계로 환원했다. 정부가 구조 전문업체도 아닌 언딘에 구조 전반을 위임한 것 역시 언딘과 계약을 맺은 청해진해운에 구상권을 청구해 정부가 들이는 비용 소모를 최소화하기 위해서였다. 다른 자원봉사자들에게 현장을 내주면 구조 과정에서 발생한 비용을 추후에 정부가 책임져야 한다. 시스템은 이렇게 물화했고, 인명의 구조마저 상품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모두가 현장에 얼굴을 내비치고 있지만 정작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관료주의가 작동한다. “규정에 어긋난 것은 결국 처벌받게 되지만 덜 잘한 것은 처벌받지 않는다”는 말은 관료의 속성을 명징하게 보여주는 한국 관료사회의 변치 않는 아포리즘이다. 고르의 설명을 빌리면, 관료는 국가의 권력을 보장하지만 스스로는 어떤 권력도 보유하지 않는 인물이다. 그는 자기 존재와 동일화할 수 없는 역할을 수행하면서, 자신이 책임질 필요가 없는 규칙을 적용하며, 지배기관이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매우 부분적인 실행자다. 조립된 기계의 톱니바퀴인 그는 주체 없는 권력의 도구다.

“관료는 자신이 실행자이자 섬기는 사람이라는 바로 이 사실 때문에, 결코 책임을 지지 않는다. 혁명에 무감각하고 자신의 역할에 의해 사전 정의된 의무 사항들 뒤에서 자신을 보호하는 그는 어떤 저항이든 무장해제시킨다. ‘우리로 말할 것 같으면, 우리는 원하는 것을 하지 않는다. 우리는 규칙을 적용한다. 우리는 명령을 실행한다.’ 누구의 명령일까? 누가 만들어낸 규칙일까? 우리가 그 기원들을 찾아 조직의 구조 상부 쪽으로 아무리 올라간다 하더라도, ‘그렇게 한 것은 나다’라고 대답하는 사람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각주:7]

관료주의는 왜 발생할까. 자본주의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이데올로기는 능력주의다. 가장 능력 있는 사람이 권력의 최상층에서 지배적 지위를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능력주의에 의하면 권력의 최상층은 능력의 우열에 따라 언제나 교체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교체가 언제나 예외적 상황에서만 가능해왔음을 지켜봐왔다. 지배적 지위는 늘 권력을 유지하고 독점하려는 특성을 지닌다. 권력은 순환되거나 공유되지 않는다. 고르는 “아무도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위해 권력을 획득할 수 없다. 그는 단지 매우 작은 권력이 부여되어 있는 지위들 중의 한 지위에 오르기를 시도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인간들이 더 이상 권력을 소유하지 않고, 권력의 지위들이 인간을 소유한다. (…) 이런 사회에서 성공은 출세주의자들의 몫이다”[각주:8]라고 말했다.

결국 더 이상 개인을 지켜주지 않고 시장에 개인을 내맡긴 국가 아닌 국가, 인명 구조마저 매매와 거래의 대상으로 전락시킨 시스템의 물화, 능력주의 판타지의 뒤안길에서 출세주의자들만 가득한 관료주의의 착종이 시스템을 배반하는 탈시스템마저 시스템으로 보이게 하는 착시를 만들었고, 세월호 참사라는 참담한 결과를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시스템은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시스템은 돌아가야 한다.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가장 피해를 보는 이들은 사회와 매개할 자본이 없는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이다. 그렇다면 시스템을 배반하는 탈시스템이 시스템으로 보이는 이런 착시에서 벗어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우선은 사라진 국가, 즉 공화국이라는 이름의 시스템에 대한 성찰 아닐까. 김상봉은 이렇게 물었다. “공화국이란 무엇입니까? 원래 이 낱말은 로마인들이 자기네 나라를 가리켜 부른 이름입니다. 라틴어로는 레스 푸블리카(res publica)라고 하는데, 말 그대로는 공공적인 것(public thing)을 뜻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푸블리카라는 형용사는 포풀루스(populus), 즉 인민(people)이라는 명사에서 파생된 형용사입니다. 그래서 로마의 정치가이자 철학자였던 키케로는 레스 푸블리카를 레스 포풀리(res populi)라고 풀이했는데, 이 말은 인민의 것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인민이란 계급적인 의미로 쓰인 것이 아니고 나라 구성원 전체로서 겨레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니, 나라가 특정한 집단이 아니라 ‘모두의 것’일 때 그것이 참된 공화국인 것입니다.”[각주:9]

공화국의 이름을 복원한 뒤에 필요한 것은 시스템의 공공성에 대한 성찰이다. 이 성찰을 위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 어느덧 존재하지 않는 이름이 된 공공성은 시스템의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들의 집단적 노력으로 복원되는 것이 아닐까. 자본주의적 사유화로 몰락한 탈시스템의 상태에서 공공성을 탑재한 강력한 시스템으로 환원시키는 작업은 강력한 시스템 안에서 시스템을 체화한 주체, 하나의 부품이지만 빠져서는 안 되는 총체성으로 기능하는 주체들이 성찰적으로 존재해야 가능하지 않을까. 시스템이란 결국 개인의 탁월성에 기반한 어떤 추상적 공리가 아닐까. 그 추상적 공리를 위해선 시스템과 관계의 물화를 해체해야 하고, 그 해체의 선봉에 대중의 정치성이 서 있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복원돼야 하는 것은 시스템 이전에 정치가 아닐까. 정치를 복원하기 위해선 의회주의라는 시장자유주의의 장치 너머를 상상하고 시장자유주의라는 탈시스템 외부를 조망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격분과 폭력의 발현, 상대의 절멸을 바라며 권력을 교체하자고 호소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체제 너머를 상상하는 근원적 고민, 발본적 정치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나·들> 2014년 5월호에 실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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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시사IN> 제345호, ‘국가도 기다리라고만 할 것인가’ [본문으로]
  2. 한병철, <투명사회>, 문학과지성사, 2014 [본문으로]
  3. 노무현·노무현재단, <운명이다>, 돌베개, 2010 [본문으로]
  4.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 대사 중 [본문으로]
  5. 앙드레 고르, <프롤레타리아여 안녕>, 생각의나무, 2011 [본문으로]
  6. 한지원, ‘신자유주의 시대의 국민 안전’, <매일노동뉴스> 4월23일치 [본문으로]
  7. 앙드레 고르, 위의 책 [본문으로]
  8. 앙드레 고르, 위의 책 [본문으로]
  9. 김상봉·박명림, <다음 국가를 말하다>, 웅진지식하우스, 2011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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