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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언덕> 스틸컷


홍상수의 영화는 다분히 계보학적이었다. 주로 수컷 (지식인)들의 동물적 욕망과 비루한 습속, 위선을 낳은 지배적 가치 체계와 권력 관계를 적나라하게 파고 들어갔다. 남녀 간의 관계, 지식인의 속물 근성 등 권력 관계의 계보학에서 빠질 수 없는 소재를 중심으로 서사를 풀어갔다. 서사와 메시지는 대체로 분명했고, 때로는 너무 솔직하기 때문에 불편하기도 했다. 그 불편함은 대체로 기존의 가치 체계 내부의 관념이나 준거로 메시지를 판단하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홍상수의 영화는 계보학을 버리고 해체주의 쪽으로 노선을 전환한 것 같다. <우리 선희>에서 세 남자의 시선에 따라 교차하는 ‘선희’와의 관계를 섞어 ‘진짜 선희’ 혹은 ‘순수한 선희’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슬쩍 보여주더니, 16번째 영화 <자유의 언덕>에서는 노골적으로 서사를 흩뿌려 놨다.
영화는 날짜가 적히지 않은 일기 형식의 편지를 흩었다 긁어모아 낱장으로 들고 읽어야 하는 난감함만큼이나 시간의 선후 관계가 분명치 않다. 하지만 맥락과 서사는 영화 안에서 어느 정도 사후적으로 구성된다. 물론 서사의 빈 공간도 있다. 즉, 영화 <자유의 언덕> 안에 ‘진짜 서사’란 존재하지 않는다. 관객, 즉 주체들이 분절된 서사를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 서사를 어떤 식으로든 재구성할 수 있다. 어떤 의미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시간은 실존하는 그 무엇인가가 아니에요. 당신, 나, 그리고 이 탁자처럼 실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란 거죠. 우리의 뇌가 과거, 현재, 미래란 시간의 틀을 만들어내는 거에요. 하지만 우리가 꼭 그런 틀을 통해 삶을 경험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이렇게 진화를 한 거라서 어쩔 수 없고요”라는 모리(카세 료)의 대사는 그런 홍상수의 의도를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단지 시간의 분절과 해체만이 아니다. 홍상수는 우리가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도 진리가 아니고 알고 있는 자체도 아닐 수 있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제시한다. “일본 사람들은 착하고, 예의바르고, 깨끗해서 좋다”는 구옥(윤여정)의 언어가 “아직 일본인을 잘 모르시네요”라는 모리의 말로 단박에 반박되는 장면은 하나의 예다. 우리는 자신의 경험으로 어떤 보편성을 규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규정은 얼마나 위험천만한가. 지각되는 것만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경험론은 또 얼마나 불안한가.
<자유의 언덕>은 러닝타임 67분의 짧은 영화지만, 꽤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관람하는 객체가 아니라 서사를 재구성하는 주체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시간 구성 게임을 해본다는 조금은 편한 마음으로 보셔도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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