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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의 마중’은 시대의 폭력에 관한 영화다. 시대의 폭력은 대체로 집단과 제도 속에 가해자를 은폐한다. 반면 피해자는 또렷하다. 피해자는 늘 죄책감을 품고 산다. 시대의 폭력을 조금이라도 피하기 위해서는 자신 역시 폭력에 편승하는 가해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렇게 모두가 각자 가해자로 살아남았다 생각하지만, 대체로 동시에 죄책감을 품은 피해자가 되어 살아간다. 폭력의 상흔이란 그렇게 서로를 옭아매 죄책감의 연대를 구성한다.

펑완위(공리)는 남편 루옌스(진도명)와의 생이별 과정에서 딸 단단(장혜문)과 갈등을 빚고, 공안의 폭력까지 겹쳐 ‘심인성 기억상실증’에 걸린다. 문화대혁명으로 감옥에 갇혔던 루옌스가 20년 만에 집으로 돌아오지만, 펑완위는 그렇게도 그리워하던 루옌스의 얼굴을 루옌스로 인식하지 못한다. 펑완위에게 루옌스의 얼굴은 20년 전 과거에 머물러 있다.

죄책감의 연대는 이 가족을 서로 분리시킨다. 펑완위는 루옌스가 탈옥해 집에 찾아왔을 때 문을 두드리는 그를 외면했던 자신을 자책하며 살고, 단단은 자신의 성공을 위해 아버지 루옌스를 공안에 신고했다는 사실을 자책하고 살며, 루옌스는 이 모든 비극이 시대에 무력했던 자신으로부터 비롯됐다고 자책하며 산다. 심지어 루옌스가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펑완위의 복수를 위해 펑완위에게 폭력을 가했던 공안을 찾아가지만, 그 공안 역시 시대의 폭력에 희생된 개인에 불과함을 확인하게 된다. 피해자와 피해자의 죄책감, 피해자의 고통은 선연하지만 가해자는 집단과 제도의 등 뒤에 숨어 불투명한 아이러니를 영화는 덤덤하게 그린다.

루옌스는 펑완위의 기억을 찾아주기 위해 과거의 사진을 찾아주고, 자신이 감옥에서 20년 동안 쓴 조각 편지를 읽어주고, 과거 자신이 즐겨치던 피아노를 다시 연주하는 등 여러 가지 일상을 ‘연출’한다. 루옌스는 저런 일상을 통해 끈질기게 과거의 관계를 회복하려 하지만, 확인되는 것은 이미 훼손된 과거는 결코 원상태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피아노를 치는 루옌스의 등 뒤에서 피아노 선율에 취해 잠시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왔던 펑완위의 찰나처럼, 어떤 계기로 인해 잠시 회상에 잠길 수 있는 추억에 불과할 뿐이다. 추억과 기억은 결코 눈앞의 현실이 될 수 없다.

그런데 그것은 영화가 시대의 폭력을 낳은, 집단의 등 뒤에 숨어있는 가해자들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너희가 가한 폭력의 결과는 어떤 것으로도 치유할 수 없고 되돌릴 수 없다’는 강력한 메시지. 나는 최근 몇 년 동안 이어진 한국의 그 어떤 허접한 시대 고발 영화보다 ‘5일의 마중’이 제시하는 메시지가 더 강력하다고 생각한다.

표정과 눈빛 안에 인간이 가진 모든 회한과 그리움과 의아함을 동시에 그려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배우 공리의 얼굴을 뜯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영화다. 시간이 되시면 꼭 보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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